2002.6 | [문화시평]
오태석과 세익스피어의 범상치 않은 만남
극단 목화의 <로미오와 줄리엣>
정초왕 전북대 교수 독어독문학과(2003-03-26 15:44:53)
{로미오와 줄리엣}. 원수 가문의 젊은 남녀가 사랑에 빠져 결국 파멸에 이르게 되는 그 유명한 서정비극. 웬만한 사람이라면 그 줄거리쯤 모를 리 없고, 다른 매체를 통해서도 누차 접할 수 있었던 이 비극적 사랑이야기를 다룬 공연이 다시금 '지금 이곳'의 우리에게 의미를 지니려면 과연 어떠해야 할까.
5월 11일과 12일 한국소리문화의전당에서 공연된 극단 목화의 <로미오와 줄리엣> 첫날 저녁공연을 보러가며 떠오른 생각은 우선 이것이다. 우리 현대연극에서 차지하는 극작가이자 연출가 오태석의 비중을 생각해볼 때 그의 '세익스피어와의 만남'의 성과가 범상치는 않을 것이라는 믿음이 이미 어떤 기대감을 부풀리게 했을지도 모른다. 아니나 다를까. 사건이 전개되는 무대도 이곳으로 이전되고 등장인물들의 이름도 우리 이름으로 바뀌고 우리 의상을 입고 무대에 등장한다('제너미가의 문희순'과 '갈무리가의 구영남', 누가 남자고 누가 여자일까? 해당 배역을 맡은 배우들 이름에서 따온 두 주인공의 이름도 역시 의도된 해학이었나?).
그러나 이러한 공간적 이전과 우리 몸짓에 우리 소리가 따르는 외양보다 본질적으로 중요한 것은 원작의 어법과 공연양식이 거의 완전히 우리 식, 혹은 오태석 식 연극문법과 공연양식으로 대치되었다는 사실이다. 공연 후 직접 밝혔듯이 오태석은 번역극의 문제점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다. 운문체로 쓰여진 원작의 운율적인 묘미는 산문화될 수밖에 없는 번역어 문장으로는 제대로 살려낼 수 없기 마련이다. 극작가 오태석이 3,4조 4,4조의 우리 구어체 운율에 바탕을 둔 우리 어법의 대사로 대본 자체를 고쳐 써야 했던 이유는 명약관화한 셈이다. 또한 그가 채택한 '마당놀이'식 공연 양식은 굳이 '서구연극의 한국화 시도'라는 명제 이전에, 드라마 보다 공연행위에 무게를 두어 활로를 모색하는 현시대 공연예술의 방향성에 비추어 볼 때에도 이미 그 타당성이 확인된다.
어쨌든 이처럼 우리의 어법과 공연양식이 조화를 이루어 분출해내는 언어와 몸짓, 개개 장면의 토속성과 유희성, 의외성과 즉흥성, 해학성, 그 비극성과 희극성의 묘한 어우러짐은 관객으로 하여금 '또 다른 세익스피어'와 '또 다른 오태석'을 만나는 관극의 재미를 만끽하게 하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무대공간과 장치, 소도구 등의 적절한 활용, 시각적 효과와 청각적 효과의 조화도 주목할 만 했고, 오랜 시간 다져진 배우들의 연기 앙상블도 흠잡을 데가 없어 보였다. 그런데 한가지, 왜 남자 주인공이 하필이면 "까마귀"로 불릴까. 우리 의식에 '까마귀'는 '불길한 새'로 각인되어 있지 않은가? (조금은 우스꽝스러워 보이기도 하는 이것도 역시 오태석의 '해학'일까? 무대 위쪽에 날개 모양의 장식이 장치되어 있듯이 날고 싶었지만 결국 서로에게 까마귀 일 수밖에 없었던 두 젊은이...)
그러나 드라마적인 면에서 볼 때 오태석의 거의 유일한 세익스피어 재해석은 마지막에 가서야 모습이 드러난다. 두 젊은이의 죽음으로 두 가문의 사이는 더 악화되고 양가 패거리들은 서로 칼을 휘두르는 피의 도가니 속에서 모두들 죽음을 맞이하게 된다. 소개책자를 보면 이러한 결말이 꼭 비관적인 세계관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는 점을 알 수 있기도 하지만, 원작의 가상적(?) 화해에 견주어 볼 때, 보다 현대적인, 그리고 우리 동시대의 현실에 적합한 결말인지도 모르겠다.
재해석 작업이란 우리 전통의 현대화를 위해서도 서구문화의 우리화를 위해서도 불가피하게 요구된다 하겠고, 좁은 소견으로 볼 때에도, 그러한 점에서 오태석의 이번 공연은 전체적으로 우리 연극의 발전에 많은 기여를 한 것으로 평가해도 좋을 듯 하다. (그런데 이는 어쩌면 너무나 당연한 일이리라. 공연 팜플렛에도 그런 문구가 있듯이 "이름만으로 연극을 보고 싶은 연출자, 한국 연극의 자존심"인 오태석의 경우니까 말이다.) 그럼에도 개인적으로는 조금은 미심쩍은 점들도 없지 않다. 이번 공연은 1995년 호암아트홀 개관10주년 기념작으로 공연되었던 것을 2001년 4월 독일 브레머 세익스피어페스티벌 초청공연으로 올리기 위해 다시 손을 본 작품으로, 서양식 의상을 우리식 의상으로 바꾸고, 덧붙여 행위의 단순화, 연기의 유연성을 더욱 가다듬었다 한다. 첫 공연을 보지 못한 처지에 두 공연을 비교해볼 수는 없는 노릇이다. 다만 이번 공연에서는 작품의 해학성, 또는 희비극성을 부각시키기 위해 의도적으로 시도한 것인지는 모르겠으나 그 어떤 작위성(?), 그리고 내용과 표현이 잘 어우러지지 않는 듯한 부조화의 느낌을 주는 부분들도 있어 보인다. 혹 이점이 서구인들이 주된 관객인 국제연극제를 위해서, '한국식으로 해석 표현된 서구 전통극'이라는 공연 취지에 비추어 '볼거리'들이 의식적으로 배치될 수밖에 없었던데 기인하는 것은 아닐까?
'현재 이 시대가 안고 있는 상황들에 초점을 맞춘다'는 명제가 '결말의 재해석'만으로 충분히 달성되었나 하는 의문도 남아 있다. 이는 결국 주제와 관련한 '비극의 근거'를 어디서 찾을까, 이를테면 '어린 연인들을 자멸토록 이끄는 피할 수 없는 강제성'에 지금 여기의 우리는 - 당대의 관객처럼 '본능적'으로가 아니라 - 구체적으로 무엇을 근거로 '공감대를 형성하고 망실감을 공유'할 수 있을까 하는 문제일 것이다. 오태석은 "우리가 서로 이유 없이 미워하고, 욕심내고, 괜한 증오심에 휩싸이는 일들이 너무도 많습니다"라고 말한다. 그런데 정말 이유가 없을까, 괜히들 그럴까?
세익스피어의 상상력이 한국적 표현을 발견하였다고 할 때, 한 걸음 더 나아가 우리의 동시대적 상황까지 좀 더 구체적으로 얻어내었더라면 더욱 좋지 않았을까 하는 욕심을 부려보지만 (작가가 관객과의 대화에서 얼핏 '남북관계'를 언급했듯이) 이는 그의 작품의 '여백'을 읽어내야 하는 관객들에게 넘겨진 과제일지도 모르겠다.
극단 목화 단원들과 좋은 기획공연을 유치한 '소리문화의전당' 측에 고마움을 전하며 앞으로도 좋은 공연들을 가까이에서 마주할 수 있는 기회를 지속적으로 제공해주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