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5.7 | [문화비평]
희망을 위하여
곽병창 연극인 전북대강사
(2004-02-05 16:26:14)
우리들 곁의 많은 이들이 이 무더운 초여름에 거리에 나섰다. 진정한 지방자치를 실현시키기 위하여, 양복을 입고 넥타이를 메고, 더위와 초조함으로 그 고생이 밀이 아닐 터이지만 속대발광욕 대규라 했으니, 어쩌랴! 평소에 참정의가 곳곳에서 실현되는 세상 한 번 제대로 만들어 보겠다며 사면초가의 의로운 싸움을 싸우던 보석같은 이들이 있는가 하면, 어려운 시기에 절정을 용케 비껴가며 살아 남았다가 막판까지 여야 사이를 얼르던 줄광대들 몇에다가, 드디어 집안의 명예를 후세에 드날릴 호기가 왔으니, 저 거추장스런 땅뙈기 조금 떼어 팔아서 한 번 나서 본 이들도 혹시 있을지 모를 일이다. 갈길이 멀고 할 일이 맣은 사람들에게 시간은 언제나 가혹하기 마련이어서, 어느 사이 해가 뜨고 지는지 모를 정도로 휭하니 하루가 지난다고들 발을 구른다. 거리 모퉁이에 세워둔 봉고차 곁에서는 그다지 좋지 않은 성능의 마이크를 붙들고 자신을 알리기 위해 애를 쓰는 후보들의 땀에 젖은 모습이 눈에 띄지만, 출퇴근 길의 시민들은 행여 그 안쓰러운 후보와 얼굴이라도 마주칠까봐 성급히 그 모퉁이르 돌아 사라져 간다. 묘하게 일그러진 웃음을 날리며 구십도로 허리를 꺾는 그 후보의등 뒤 빌딩에 위압적으로 걸려 있는 대형 현수막은, '쎄일 쎄일!50%~60%를 외치며 힘차게 펄럭인다. 대낮 아파트, 햇살이 따갑게 내리쬐고 있는 휑뎅그레한 주차장에서는, 유권자들의 이런무관심이 이 나라 민주주의 장래르 망칠 거라면서 사뭇 개탄하는 후보의 목소리가 이따금 들려온다. 그 연설의 내용을 아는지 모르는지, 뙤약볕 아래를 지나는건 걸음 둔한 노인들 몇일 뿐, 그 분석적인 안목을 갖고 있던 후보도 이내 봉고를 돌려 멀어져 간다. 스스로를 양식있는 지식이라고 믿는 걸로 그나마 정치적으로 위안을 받는 시민 모씨는, 진입로를 돌아 멀어져 가는 저들의 확성기 소리를 들으며, 단지 눈살을 한 번쯤 찌푸려 본다. 찡긋-하며. 기지개를 켜려다들여다 본 쓰레기통 속에는 벌써 수북히 쌓인명함광고와 공약 선전지들. 그 한사람 한 사람의 얼굴을 그냥 쓰레기통 속에 둔 채로 들여다 보던 이시민, 속으로 '안 됐다, 참' 했을까?
어쨌든 이런 일도 다 하나의 문화현상이므로 굳이 이름 붙인다면 우리는 이나라의 초현대식 선거문화의 한 단면을 보고 있는 셈이다. 묘한 것은 우리들 대다수가 이 현상을 관조하는 척하면서도 그 현상의 한 귀퉁이를 차지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후보와 시민들이 지어 보여주는 이런 얼굴 표정은 다분히 연극적이다. 실생활과 철저히 밀착된 채, 자연스럽게 만들어진 거리 집체극, 하지만 이 연극 배우들의 분장하지 않은 얼굴이 어떠할지 알고 싶은 사람들에게 이 연극은 상당히 난해하다. 무엇보다도 얼핏보기에 엑스트라인 듯 보이는 시민들이, 아침저녁으로 또 자리를 달리해가며 분장을 바꾸어대는 그 놀라운 변신 앞에서, 실제 그 배우의 원래 얼굴이 어떠할까를 추측해 보는 일은 이미 불가능하다. 그들은 정말 변신의 천재들이기 때문이다. 그들은 도처에서 지나가는 시민들의 역할을 수행하고 있지만 결코 그냥 지나가는 것이 아니다. 놀라운 표정연기, 눈을 지그시 감은채, 마치 이런 일은 자신의 명상에 아무 도움이안된다는 듯한 표정으로 지나가기도 하고, 도무지 이 모든 게 마음에 안 든다는 눈초리를 흘리며 지나가기도 한다. 물론 간간이, 자신들의 모임에 후보를 불러서 연설을 듣고 싶다며 회관 하나를 통째로 미리 빌려 두기도 할 만큼 정치적으로 각성(?)되어 있는 사람들도 있고, 하는 일은 밉지만 그래도 왕년에 우리쪽 가까운데 살던 사람을 밀자고 서둘러대는 사람도 있긴 있는 모양이다. 그러나 역시 이 엑스트라들의 대부분은 무언의 군중 신을 이루고 있을 뿐, 아무도 말하거나 행동하여 하지 않는다. 이 거대한 군중들의 바위같은 형상을 배경에 둔 채로, 무대 한 가운데서 서있는 후보들은 지금도 '이번 선거의 주인공은 바로 다름 아닌 당신들 시민이오'하고 외쳐댄다. 도대체 이 기묘한 연극의 주제는 뭔가?저무언의 군중들이 만들어 보여주고자 하는 것은 과연 무엇이며, 외치는 자들이 궁극적으로 추구하는 결말은 어떤 것인가? 알 길이 막연하지만 한 가지는 어렴풋이 짐작이 간다. 이연극을 처음부터 끝까지 주관하고 있는 연출가가 과연 누구인지, 그의 진정한 연출의도는 무엇이며, 그가 구사하는 기법의 이 일관된 특성은 무엇인가를 알아내는 일은 정작 어렵지 않기 때문이다.
이 연극의 연출가는 아마 한 개인이 아닐 것이다. 이렇게 많은 배우들을 다스리면서 정작 자신이 조종되고 있다는 것조차 깨닫지 못한 채 둔하게 움직이게 하고, 그 앞의 주연급 배우들을 더욱 안달이 나게 만드는 이정교한 연출방법으로 미루어 짐작하건대, 이건 한사람의 두뇌에서, 나오는 솜씨가 아니다. 그 집단연출, 영리하고 분석적이어서 관중들의 심장 속까지 다꿰뚫어 알고 있는 연출진들 앞에 그러니까 대다수의 배우이자 관객들인 우리는 속수무책으로 노출되어 있는 셈이다. 저들이 사용하는 연출기법의 특징은 무엇인가? 한 마디로 해체와 혼돈의 기법이다.관객들로 하여금 일관된 줄거리를 찾아내지 못하게 하고, 배우들이 자신의 역할에 대해 오래 연구하는 것을 자꾸 차단하며, 다만 장면 장면마다 주어지는 순간의 주제에 깊이 탐닉하게 하는 수법, 그리 새로울 것은 없지만 무대와 객석을 온통 불가지(不可知)의 혼돈 상태로 몰아가기에는 딱 알맞은 그 테크닉을 저 연출진들은 구사하고 있다. 그리하여 이 새로운 연출기법의 화려한 외양에 배우와 관객모두가 홀딱 반하게 해서 저들 앞에 영원한 경배를 바치게 하는 것이다. 누구도 누구를 믿지 않는 세상, 모든 사람이 다 분칠한 배우로 보이는 세상, 그래서 귾임없이 실체도 불분명한자기만의 세계속으로 자꾸 기어 들어가게 되고, 본질적인 것에 대한 이야기는 매우 하찮고도 위험한 것으로 여기게 하는, 그런 세상을 원하는 연출가들이 어딘가에 웅크리고 앉아서 이 혼돈의 때를 즐기고 있는 것이리라.
하지만 혼돈은 필연적으로 희망을 내포할 수 밖에 없는 것. 혼돈의 축제는 밤의 마지막 순간에 그 광기를더욱 고양시킨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우리는 저연출가들의 때가 그리 길지 않으리라는 신념을 가져야 한다.당연히 그 실체를 자꾸 겉으로 끄집어내어서 온 천하에 두루 알려야 한다. 그 음험한 존재를 들추어 내고 나면, 이 혼돈의 끝에서 분명 우리가 그렇게 바라마지 않던 세상의 한 자락이 보일 것이다. 낡은 것 부정한 것, 모호한것들의 세상이 가고, 새것, 정직하고 또렷한 것들의 시대가 열릴 것이다. 그때를 위하여 우리는 이 무덥고 칙칙한 때를, 지겹지만 포기할 수 없다. 포기하는 자들에게 혼돈은 영원히 끝나지 않을 것이기 때문에, 우리는 이 우스운 연극을 끝내야 하는 것이다. 진짜 좋은 연극은 극장에 가서 관람하기로 하고, 현실에서는 좀 더 밝고 좀 더 분명한 실체들과 맞대면하려는 노력을 지루하지만 계속해야한다. 희망을 잃지 말고 말이다.
아. 이질기고 질긴 희망을 어찌할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