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5.7 | [문화가 정보]
백제기행 제43회
때죽나무 꽃눈물 흘리는 산길을 따라
지리산 150릿길 여정
김인정 양지중학교교사
(2004-02-05 16:35:18)
지난 2월 월출산을 다녀온 후 해방50주년 기념 기획으로 계획된 계획서를 보고 6월의 지리산행을 애타게 기다렸다.
6월17일 토요일, 바쁜 일과를 끝내고 직장에서 집에 돌아노니 두 아이는 행여 자기들을 떼어놓고 갈세라 허둥지둥 준비중이다. 어릴 때에는아무것도 몰랐지만 언제부터인가 데리고 가라고 야단이다. 국민학교 2학년 아들과 국민학교 3학년 딸. 지금껏 소품을 빼놓고 1km이상을 걸어본 적이 없는 아이들이다. 계획서를 보니 피아골 일대와 연곡사라하니 모험을 걸어볼 만하다고 생각 이 되었다. 나는 지금껏 그 유명한 지리산을 등반한 경험이 없다. 그저 변두리만 차로 맴돌았을 뿐이다. 그러니 용감해진 것이다.
"그래, 그럼 약속한다. 여행중에 어떠한 어려움이나 괴롬움이 있을지라도 울거나 떼쓰지 않는다. 만약 그러할 경우 다음부터는 절대 여행을 데리고 가지 않겠다."
몇 번이고 약속을 한 후 지정된 장소로 나가니 출발직전 오후 2시. 차에 오르니 그동안 몇 번의 기행으로 인하여 낯익은 얼굴들이 반갑다. 차는 곧바로 남원쪽을 향하여 달린다.
짙푸른 녹음. 여름은 어느덧 내 곁에 와 있다. 설렁이는 바람, 비가 온다는 예보이니 아이들을 데리고 온 나는 여간 신경쓰이는 일이 아니다. 비 사이사이 운좋게 여행을 하기를 마음속으로 빌고 또 빌어본다. 달리는 차안에서 자기소개를 한다. 여행 안내는 산모임 두류패에서 맡았다. 특히 이번 기행은 지리산 일대에서 빨치산 활동을 하여 수십 년간 복역하다 지금은 출소하여 생활하시는 임방규 선생님과 해방후 빨치산 활동을 하시다 32년 복욕하신 박선생님이 함께 자리를 하고 계신다.
차는 어느덧 사치재(남원 아영면)를 지나고 인월을 지나 뱀사골 전적 기념관에 닿는다. 오후 4시 지금부터 12km.약 4시간 동안의 뱀사골 산장으로 가는 산행이 비로소 시작되는 것이다. 오르고 또 오르는 길, 수많은 돌부리에 채이고 또 걸리며 걷고 또 걷고 걸었다. 때죽나무의 힌넋이 땅 위에 우수수 떨어져 있다. 이름없이 죽어간 영혼을 위하여 저렇게 온몸으로 땅 위를 어루만지고 있다. 좋은 세상, 누구나 평등하게 잘사는 세상을 만들어 보겠다고 투쟁하다 무덤도 없이 묻힌 영혼을 위하여 자연은 저렇게 꽃눈물을 흘리며 위로해 주고 있는 것이다. 진달래꽃으로... 철쭉꽃으로, 산딸나무로, 층층나무로...
지리산은 '두류산'이라고도 하는데 백두산의 정기가 흘러내려 이곳에 멈춰진곳이라는 뜻이란다. 우리 조는 4조이다. 어린아이를 위한 배려로 특별히 두류패회원 중에서 사진작가이시고, 또 여행안내에 있어 유능하신 이승일 선생님이 우리 조르 맡았다. 행운이라면 행운이다. 물어보는 꽃, 풀, 나무에 대해 모르시는 것이 없는 것 같았다. 서울에서는 '아마추어 야생화 연구모임'이 있어 활둥 중이라는 말씀도 해주셨다.
뱀사골 산장에 도착하니 저녁8시. 어둠이 우리보다 먼저 내려와 있다. 서둘러 저녁 식사를 끝내고 9시30분에 빨치산 투쟁을 하셨던 임방규 선생님의 강연이 있었다. 선생님은 1932년,부안출신으로 14세 때 해방을 맞이하셨고 고창중학교 시절(16세)에 학생운동을 하셨다. 결국 투옥되었고, 17세때 탈출, 19세에 서울에서 전쟁을 맞이하였다. 선생님은 회문산을 거점으로 100여 명의 빨치산을 조직하여 독자적인 활동을 하다가 다시 다른 부대와 합쳐 정치부 중대장으로서 유격대 활동을 전개하셨다. 1952년에 체포(21세)되어 군법에서 사형언도를 받고, 같이 붙잡힌 동지들이 200여 명이 있었는데 54년 제네바 협상시 살 수 있으리라는 희망을 가졌으나 정치회담이 있기 전에 미리 많은 사람이 사형되었다. 54년 2월 무기징역으로 확정되었고,전향을 하여 특별 감면, 61년에 일반사면되어 72년에 전주에서 20년만기로 석방되었으나 75년 사회안전법이 제정되면서 또다시 재판없이 감금되어 외부에 알려지지 않는 산지억 '청주 보안감호소'에서 혹독한 탄압을 받가가 89년 사회안전법이 철폐되어 출소하였다. 지금은 서울에서 부인과 함께 생활을 하고 있으며 빨치산 감옥생활의 이야기를집필하여 출판을 앞두고 있다고 하셨다. 선생님이 16세에 반미전선에 뛰어들게 된 직접적인 계기는 그때 당시 선생님이 말씀의 영향이었단다. 덧붙여 말씀하시기를
"우리는 해방직후의 역사를 바로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치욕적인 50년 역사를 바로 잡아야합니다. 현재 우리가 있는 것은 수많은 분들의 직접. 간접적인 영향과 수천 년 동안 이룩해온 민족문화의 영향에 의한 것입니다. 외세에 의존하는 정신을 배격하고, 역사와 민족, 통일, 진실한 삶에 대해 진지하게 연구하고 통일에 대한 희망과 염원을 가져야 하며, 특히 올바른 교육을 위해 힘써야 합니다. 이론과 실천을 병행해야 합니다..."
50년 세월을 역사의 가장 한가운데 서서 온몸으로 투쟁하셨던 선생님의 말씀은 11시가 넘도록 그칠줄 몰랐다. 어쩌면 우리가 그분의 50년 질곡의 세월을 단 한 시간 동안에 들어야 하는 것이 무리일 것이다. 16살 어린 나이에 꿈꾸었던 세계는 어떤 것들이었을까? 일흔넷 연세에 지금까지 그치지 않는 정열로 그토록 염원하는 것은 무엇일까? 어떤 정치적 목적을 위함도, 개인의 영달을 위함도 아니라 그저 더불어 잘사는 조화로운 세상, 인가다운 세상을 위함일 것이다.
선생님의 강연에 이어 도립국악원 피리 연주가인 박양규 씨의 피리연주가 있었다. 경풍년과 상영산 곡을 들었다. 경풍년은 잘게 엮어 만든 한 편의 노래이며, 상영산은 선비들이 마음을 가라 앉히기 위한 곡으로 아주 느린 곡인데 불교음악의 한 종류로서 피리곡 중 가장 어려운 곡이란다. 애절하게 가녀리고 끊어질 듯 이어지며 휘감기는 피리소리, 5천년 역사 속을 빠져나온인생의 회로애락이 응축된 댓소리, 한국의 소리, 청자냄새, 백자냄새, 하늘냄새, 바람냄새,풀냄새... 피보다 진한 역사의 터널 속을 걷다 쓰러져간 수많은 영혼을 위한 진혼곡이 아프게 아프게 어둠속을 흘러내린다. 밤이 깊다 계곡의 물소리도 잦아들고... 무엇을 생각할 틈도 없이 잠에 빠져든다.
새벽 5시. 오고가는 소리에 잠이 깨었다. 빗방울듣는소리. 걱정이다. 소나기는 아니지만 또다시 아이들 걱정이 마음을 두렵게 한다. 비옷을 걸치고 8시에 산장을 출발하여 화개재를 지나 삼도봉으로 오른다.끝이 없는 길.등산을 해보지 않은 나는 힘들기 그지없다. '죽겠다'를 뇌며 걷는다. 이런 길들을 빨치산들은몇 번이나 오르내렸을까? 그들이 꿈꾸었던 세계를 향하여 끊임없이 오르내렸을 것이다. '그렇다 그때 그 사람들이 되어보는 것이다.' 라고 생각하며 걷고 또 걸었다. 그러나 '삶,죽음,만민평등,정의'이런 것보다도 나에게 더 절실했던 것은 육체적인 한계였다. 우리뒤에서 힘을 주시고, 안내해 주시는 조장 이승일 씨께 묻는. "이산을 도대체 몇 번이나 등산하셨어요, 또 무슨 생각을 하며 오르세요?" 물음같지 않은 물음에 선문답같은 미소만 지을 뿐 말씀이 없다. 그렇다 오르는데 무슨 이유가 있을것인가? 인간도 자연의 한 부분으로 그저 나무처럼,바위처럼 그렇게 조화롭게 살아가는 것이라는 것을... 산은 우리의 마지막 안식처요, 누구도 배척하지 않는 든든하고 자애로운 어머니의 품인 것을...
드디어 삼도봉에 올랐다. 삼도봉은 1550m 경상도와 전라남.북도의 분기점이라 '삼도봉'이라 불린다. 이곳에서 '우리의 소원은 통일'을 목놓아 불렀다. 길을 걸을 때 박봉현 선생님은 말씀을 하셨다. 우리는 통일에 대해 희망을 가져야 한다고... 그리고 분명히 통일은 올 것이라고... 어느것 하나도 노력없이 이루어지는 것은 없으며, 그 노력의 힘으로 결국 역사는 새롭게 피어나는 것이라는 확신을 가지신 분.
삼도봉에서 2km 반야봉으로 다시 힘든 등정을 시작한다. 노루목 근처에 가방을 두고 간다. 바위를 얼싸안으며 어물쩍어물쩍 비가 와서 미끄러운 길을 걷는다. 드디어 반야봉에 올랐다.1732m 지리산에서 가장 높은봉은 천완봉이지만 이 반야봉역시 제1봉이라 할만큼 높은 봉이다. 내생에 최고의 시간, 지금까지 40여해를 살아오면서 이렇게 높은 곳에 온전히 걸어서 올라온 것은 처음이었으니까, 늦은 철쭉이 기다리다 바랜 얼굴로 우리를 맞이하고 구상나무의 건강한 웃음소리 같은 모습이 싱그럽다. 정상에 오른 기념으로 간단한 등정식을 하였다. 국민의례에 이어 만세삼창, 함성... 뒤이어 이승일 선생님의 반야봉에 대한 설명이 있었다. 이 반야봉 앞쪽에는 천왕봉, 뒤쪽에는 노고단이 있으며 , 지리산 8경 중에 제2경으로 반야일몰이 유명한데 천왕일출 못지않게 반야일출도 절경이란다. 그러나 반야봉은 온통 안개에 휩싸여 주변의 모습을 볼 수가 없어 아쉬웠다. 또한 오르는 길에 꺾어온 나물을 설명해주셨다. 곰취,둥글레차,참나물(미나리취),개발바닥(단풍취) 등등... 대견스럽게 잘 올라온 아이와 반야봉 표지물에서 기념사진을 찍었다. 훗날 힘들고 괴로울때어린시절 힘들었던 그날을 추억하면 힘이 될 것이라는 기대를 하면서...
이제 다시 노루목 근처에 가방을 놓았던 곳으로 간다. 가방을 다시 메고 용수골을 지나 피아골산장으로 가는 것이다. 이곳에서 피아골 산장까지는 5km남짓 될까? 그런데 지금부터문제인 것이다. 골짜기인지라 돌과 돌 사이를 걷는 것이 너무 힘이 들었다. 비에 젖은돌, 나무들이 너무 미끄러웠고 수많은 개울물을 건너야 했던 것이다. 발이 부르트고 발가락이 아프다, 장난삼아 '유격훈련'시키냐는 투정을 해본다. 중간쯤에서 점심을 먹었다 우리 조는 라면에 밥을넣어 죽처럼 끓였는데 과거 빨치산들이 활동할 때 이런 죽을 먹지 않았을까 생각이 들었다. 오후 2시, 다시 피아골 산장으로 향한다. 2시간 남짓 걸어야 한다니 이건 정말 생지옥이다 그래도 걸야 한다 주위는 온통 바위,나무계곡을 흐르는 물뿐. 어떤 문명의 이기도 찾을 수 없다. 어쨌든 내 다리로 걸어가는 수밖에 없다. 인생길이란 원래 이런 것이다. 그누구도 대신해 줄 수 없는 것, 수 시간을 걸으면서 다시 깨닫는다. 그리고 자연 앞에 겸손함을 배우는 것이다. 저 우뚝한 바위, 나무들처럼 의연하게, 자꾸만 낮아지며 겸손해지는 물처럼 살아가리라고...
피아골 산장에 도착하니 오후4시경. 피아골 산장은 해발 850m. 피아골은 가을 단충으로 유명한 곳인데 지리산 8경중 하나다. 피아골이란 뜻은 '피밭골'에서 유래된 말로 피아골 아래 마을에서 '식용피'를 재배하였기 때문이란다. 그러나 '피'라는 말에서 이미 섬뜩한 기분을 느낄 수 있음은 나만 느끼는 정서는 아닐 것이다. 피아골 산장을 지을 때 거의 한 트럭분의 매장된 유골이 나왔다고 하는데 모두 빨치산 의 유해였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지리산 토벌 작전 때 서로 흘린 피는 얼마나 될까? '피'하면 떠오르는 것-정의,정열,뜨거움,열정,싸움,공포,두려움,전쟁,죽음 등등 이지만 이제나는 진정한 피의 의미를 알겠다. 순수를 지향하는 대가아없는 기도라는 것을...
이제 직전마을까지 걸어가야한다. 3~4km남짓한 거리. 1시간 30분을 가야한다. 끝이 없다. 완전히 지쳤다. 무아지경이라는 말이 옳을 것이다. 두 아이는 아픈 발가락 때문에 이제 거의 울상이다. 그러나 못 본척 한다. 조금난 가면 된다는 말이 유일한 격려일 뿐. 남매폭포, 구계곡폭포, 삼흥소를 지나 드디어 직전마을에 도착하니 오후 6시. 감격.
이젠 실컷
산내음을 맡을 줄 안다.
그런 짐슴이 되었나 보다.
바윌 넘어서
숲을 헤쳐서
제법 날쌔게 쏘다닐 줄도 안다. (하락)
(신석정의 '산' 중에서)
두 아이가 말한다.
"엄마, 평평한 길 걷기가 이제 쉬워요"
"그래 엄마는 너희들이 대견스럽다. 이번 여행처럼 힘든 날이 지금까지는 없었지? 아무리 힘들어도 끈기있게 참으며 노력하면 안되는 것이 없다는 걸 알았지?"
"엄마,친구들에게 자랑할거에요"
간단한 저녁식사 후 전주로 향한다. 달리는 차안에서 생각에 잠긴다. 어제 4시간 산행, 오늘 오전 8시부터 오후6시까지의 산행이니 거의 14시간 동안 줄곧 걸은 것이다. 정말 지리 지리한 지리산 이다. 그 속깊은 이름만큼이나 끝없는 인내를 시험하는 참을성 깊은 지리산! 지리산이여 안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