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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5.7 | [세대횡단 문화읽기]
새로찾는 전북미술사 20 유연한 필체에 담긴 군자의 깊이 유영완의 사군자
이철량 전북대교수 미술교육과 (2004-02-05 16:35:54)
이 지역의 묵객(墨客)들이 대체로 학문과 글씨에서 탁월한 경지를 이룩했던 사람들이라는 점은 이미 밝힌 바 있다. 이는 지역적 조건이 선비들의 글공부하기에 적합한 데서 연유된 것이겠다. 산야의 풍치가 아름답고 경제적으로도 넉넉한 고장이었음에 문인 묵객들의 출현이 많았음을 당연한 일이겠다. 다만 아쉬운 저은 이들이 좀더 전문적 태도를 갖고 있지 못하였던 데 있다. 그들의 출중한 안목과 서체에서 익힌 운필의 여유로움 은 능수한 기량을 뽐낸 작품들이 많이 생산되었다. 그러나 이들은 다만 학문적 여흥으로 보았던 그림에 대한 이해 때문에 더욱 깊숙이 자신을 표출해 내지 못하였다. 이러한 태도는 특히 구한말 남종화가 범람하던 시기에는 더욱 깊어졌다. 그리고 이 지역 미술이 이 시기에 와서야 많은 작가들을 배출해냈던 점도 지역미술의 한계를 짐작케한다. 구한말의 정치적 사회적 혼란 속에 등장한 추사일파의 중국문인화에 대한 편애 때문에 사군자 및 남종문인화가 득세를 한다. 그리고 추세는 한일합방으로 인한 일제의 탄압기에 더욱 심화되는 현상으로 나타났다. 말하자면 시대적 혼란 속에 문인사대부들의 현실도피나 현실안주에서 사군자화의 발달이 이루어졌다는 것이다. 혈실에 대한 고통과 울분을 묵향에 담아 소화하려 노력했던 당대의 지식인들의 모습을 사군자에서 바라볼 수 있다. 뿐만아니라 사군자는 기본적으로 문인사대부들의 몫이었다. 말하자면 기능을 앞세웠던 전문화가, 이를테면 그림으로 생계를 유지했던 환쟁이들은 사군자에 접근하기가 불가능했던 특성을갖고 있다. 사군자는 문인사대부들이 그려내는 소위화라고하는 화풍 중에서 가장 중심가는 화목(畵目)이었다. 그러나 사대부들이 주장했던 문자향(文字香), 서권기(書卷氣)를 앞세운 사군자는 일반 화가들은 엄두도 낼 수 없었다. 결국 사군자는 선비들의 학문적 깊이와 수양의 정도를 가름하는 대표적 상징물이었다고 볼 수 있다. 오늘날 이 지역에 사군자나 문인화가 적지않게 남아있는 것은 결국 이 지역의 학문적 배경과 나아가서는 문화적 특성을 이해하는 데 도움을 준다. 우리는 오늘날 전북이 예향으로 불리는 이유를 여기에서도 찾을 수 있다. 그리고 그 한몫을 유영완이 해내고 있다. 유명완은 1892년에 나서 1953년까지 살았다 호을 유하(杻下)라고 하였는데 아마도 문화 유 씨 가문의 출신이라는 뜻이었던 것 같다. 유영완이 평생을 통해 세속과 멀리하고 학문에 전념하였다는 세간의 설을 뒷받침하는 것이라고 생각된다. 가문을 존중하고 기강이 곧바른 선비정신이 그의 호에서 느껴진다. 뿐만아니라 그의 사군자에서도 강직하고 빈틈이 없는 섬품의 일단이 엿보인다. 유영완은 김제태생으로 학문과 글씨 등을 석정 이정직에게 배웠다. 한다뿐만아니라 사군자 등도 이정직의 영향 아래 초기의 화풍을 형성하였으리라 믿어진다. 유영완은 제7회(1928)와 제 8회에 걸쳐 조선예술전람회에 행서와 초서로 입선하는 등 서예에서 상당한 수준을 보였다. 그리고 이러한 바탕이 단아한 선비적 풍모를 담고 있는 사군자를 남기게 하였다. 매 란 국 죽을 그린 8폭 병풍 중 여기에 보이는 4폭은 상당히 대담한 묵법과 활기찬 운필을 보이는 작품이다. 다른 병풍 속에 대(竹)그림하고는 분위기가 상당히 다른 면모를보이고 있다. 이작품들을 보면 유영완이 사군자에 대해 훌륭한 기본기를 바탕으로 하고 있다는 점과 그의 기량이 활짝 피어나지 못한 아쉬움을 느낄 수 있다. 유영완의 난(蘭)그림은 그가 운필의 묘를 얼마나 잘 터득하고 있는지를 보여주는 명작이다. 그의 그림이 대체로 훤칠하고 유연한 필세에 의지하며 때때로 절묘한 작품을 만들어내는 있는 데 반해 아쉬운 점은 독창석의 결핌에 있다. 이 작품도 막힘없이 흐르는 유연한 선묘가 난의 기세를 듬뿍 살려내고 바위의 표현도 웅장한 데가 있다. 유영완의 기량을 보여주는 훌륭한 병풍이다. 그러나 선의 기세가 이정직이나 조주승의 범주에서 크게 벗어나 있지 않다는 점에서 아쉬운 부분이다. 화면구성의 방식은 대원군이 즐겨 다루었고 이후 조주승 등에서 많이 나타나는 편파구도를 사용하고 있다. 그리고 잎의 당두(사마귀배 모양)를 만드는 형식이나 서미(쥐꼬리형의 끝부분)를 이루는 것도 대원군에서 이정직으로 이어지는 흐름의 선상에 있다. 다만 이들 선배화가들에서 쉽게 보이지 않던 끝을 뭉뚱하게 끝내는 절두법을 많이 쓰고 있는 점이 눈에 띈다 그의 바위를 그리는 수법은 여타 사군자들에서보다 훨씬 대담하다. 특히 작은 매화가지를 곁들이기 위해 세워진 괴량감 넘치는 바위는 그의 회화작법의 한편을 보여준다. 대체로 난의 선이나 대, 그리고 국화를 그린 필선은 날카로운 면이 두드러지는데 비해서 바위는 둔탁하며 묵직한 양감을 풍부하게 살리고 있다. 바위와 초목의 대비를 강조하여 회화의 긴장감을 유도한 듯 싶다. 강한 먹빛과 굵고 거칠게 용트림하는 선 위에 숨가쁘게 찍어내는 점들이 파묵의 효과를 극대화시키고 있다. 이렇게 괴량감 넘치는 육중한 바위를 한 중앙에 우뚝 세워 대단한 시각적 효과를 내고 있다. 그의 바위를 그려내는 탁월한 솜씨는 국화그림에서 성공적으로 나타난다. 바위의 윤곽선은 훨씬 유연하게 자연미를 살려내고 있는 적절히 배열된 태점(선 위에 찍는 점)들이 그림의 흥을 한껏 돋우고 있다. 바위 가운데를 여백으로 살려내 다소 거친 듯한 선과 점들이 생동감있게 들어나있다. 국화의 종류는 우리의 재래국화는 아닌 듯하다. 묵선만으로만 그려내는 몰골법(윤관석을 그리지 않는 방법)형식의 국화에서 가장 많이 등장하는 국화 종류인데 아마도 유영완은 중국의 화보를 통해 국화를 공부하였던 듯하다. 어떻든 유영완의 국화 생태에 대한 정확한 이해와 능숙한 묘법은 대단히 뛰어났었다고 보여진다. 유영완의 활발한 바위 그림과 난 국에서 보는 완벽한 이해력이 그의 대 그림에서 잘 나타나고 있다. 유영완의 대그림은 대단히 정갈하고 완벽한 구조미를 보여주고 있다. 대그림으로만 8폭으로 병풍들의 일부인데 폭마다 각기 다른 형태를 보여준다. 대 그림 전부는 두 줄기의 대가 서로 교차하면서 얽혀 있는 모습이다. 이런 구성은 실상 가장 어려운 포치 중의 하나인데 이 그림들에서는 지극히 자연스럽고 고고하게 살아나 있다. 이렇게 극히 단순하게 배치되는 줄기의 구성에 맞추어 잎도매우 단순한 기본형식만으로 그려냈다. 거의 개자(介字)의 기본방식의 범위에서 크게 벗어나있지 안은데 잎도 그 수를 최소한으로 줄여 고요함을 자아낸다. 다만 지극히 간단한 변화를 통해 시각적 흥미를 자아냈다. 이를테면 한 화면에서 농담(진하고 연함)의 변화가 있게 잎을 그린 점과 여러 폭 사이에 바람에 휘어지는 풍죽을 끼워넣어 지루함을 벗어냈다. 뿐만 아니라 밑으로 늘어진 잎과 날렵하게 위로 솟느 잎등을 적절히 섞어나가 그가 이 작품을 만들기 위해 세심한 배려가 있었음에 알게 된다. 어떻든 그의 대 그림에서는 앞서 언급한 바위 그림 등에서 보였던 파격의 미는 보이지 않는다. 오히려 그 반대로 고요와 정적이 화면을 가득 메워 우아함의 극치를 보는 듯하다. 유영완의 이러한 사군자를 통해보면 그는 분명 당대를 대표할만한 뛰어난 화가였음에 틀림없다. 다만 여타의 작품이 소개되어 그의 작품세계에 대한 면모가 충분히 연구되어지길 기대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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