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5.7 | [서평]
그리움과 두려움
김용택,<강 같은 세월>, 서울:창작과비평사, 1995.
정철성 <문화저널> 편집위원 전북대강사
(2004-02-05 16:37:12)
김용택의 새 시집<강같은 세월>이 나온지 벌써 넉달이 지났다. 겨울에 나온 책을 장마를 예고하는 후덥지근한 바람 속에 소개하려니 질기가 찌럭소 가죽보다 더하면 더했지 모자라지 않으리라는 비난이 귀에 쟁쟁하다. 독자께서 우리 잡지를 받아보실 무렵이면 창문 너머로 국수밭같은 빗질을 하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요즘 국수는 - 도재체 밀가를 믿을 수가 있어야지 - 뒷맛이 개운치 못하다.) 하지만 지난 봄에는 가방에 <강 같은 세월>을 넣고 다닐수 있어 즐거웠다.
저산너머에 그대 있다면
저 산을 넘어 가보기라도 해볼 턴디
저 산 산그늘 속에
느닷없는 산벛꽃은
웬 꽃이다요
저 물 끝에 그대 있다면
저 물을 따라가보겄는디
저 물을 꽃 보다가 소리 놓치고
저 물소리 저 산허리를 쳐
꽃잎만 하얗게 날리어
흐르는 저기 저 물에 싣네.
(산벛꼿 전문)
아홉 개 의 '저'와 하나의 '저기'가 가슴을 탕탕 두드리는 것 같지 않은가? 시인은 청산이 강물을 잡아 돌리는지 강물이 청산을 돌아 흐르는지 모를 풍경 안에서 한 그루 흰 산벛나무가 산수(山水)와 더불어 그리는 교감의 세계를 절묘한 목청으로 노래한다. 반쯤 잠긴 듯 물위를 넘어간 다리 건너 천담분교가 있는 강변에는 상류에 댐을 쌓은 뒤로 수량도 줄고 물도따라 흐려져서 풀만 무성하다고 한다. 그래도 여름이면 사람들이 지성ㅇ로 찾아와 한 무더기씩 쓰레기를 남기고 간다. 그윽한 맛이 더하기로는 여기서 강변을 따라 잊어버리고 걷다보면 만나는 마을, 어디 이런 데 사람사는 마을이 있다, 길은 맞지, 어쩌고 중얼거리다 모퉁이를 돌아서면 홀연히 나타는 구담이 있지만 다행스럽게도 길이 좁고 멀어 사람소리가 드물다. 여기쯤인가, 산벛꽃이 피었던 자리는?
김용택 시인이 사는 진메-장산리-를 거쳐간 사람은 많다. 독자가 이 시집을 천천히 읽오ㅓ보면 최영미와 황지우의 이름을 발견할수 있을 것이고, 당신만 빼고 이런 저런 구실을 만들어 다들 다녀왔다는 것도 깨닫게 되겠지만, 서운한 마음에 덩달아 매연을 휘날리며 임실까지 쳐들어가야 할 이유는 없다. 독자여 슬기로운 독자여, <강 같은 세월>을 읽으시라. 이 시집을 읽으면 '섬진강'과 '맑은 날' , '꽃산가는 길'과 '저문 강가의 누이'와 '그리운 꽃편지'와 '거침없는 사랑'이 보일 것이다. 풍경을 그린 작품이 아름다운 것은 풍경을 구성하는 물상들의 배열이 좋게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곳에 의미를 부여하여려는 인간의 마음씨가 더크기 때문이다. 시인이 아니었다라면 진메마을도 기울어가는 강마을의 하나에 불과했을 것이다.
진메마을에는 전라도의 묵은 마을을 어김없이 지키고 있는 정자나무들이 푸르다. 시인은 이나무를 소재로 <푸른나무>연작을 쓰고 있다. 그러나 마을의 시인은 심심하다. <심심한 하루>, <당숙모네 집>,<겁나는 집> 이 네편의 시들은 농촌공동체의 분화와 소멸의 분위기를 군더더기 없는 구성으로 형상화한다. "길이란 길엔 사람 하나 안 지라고/ 아, 세상이 다 심심하게 비맞는" 늦가을 어느날 시인이 맛본 심심함은 때때로 두려움으로 확산되며, 아이들마져 떠나버린 이 마을에서 혼자 학교에 다니는 주성이의 모습이 겹쳐진다. "저 강변 하얀 눈발위의 눈부신 햇살 주성이 발자국마다 그늘 고이다" 라는 시행에서 얼어붙은 발자국의 흔적에 명암이 교차하면서 만드는 그림자는 외로움의 깊이 만큼이나 처절하다. 시인은 두렵고 주성이는 외롭다. 마을은 적만하고 아이는 무료하다.
김용택이 끊임없이 섬진강을 노래하는 이유를 이제 짐작할 수 있을 것같다.섬진강은 "세상에 이르고 싶은 강물"(강가에서)이다. 뒤집어 말하면 시인은 강마을 촌사람들의 세상과 함께 살아가고 싶다는 소박한 소망을 세상에 알리고, 그들의 삶의 근거지를 파괴하는 것이 부당하다는 사실을 역설하려는 것이다. 농촌의 희생을 바탕으로 경제성장을 이룩했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라고 한다. 예사람은 비유를 들어 희생(犧牲)의 제물로 뽑힌 소에 비단옷을 입히고 화고나을 씌워 진수성찬을 대접한들 그놈이 먹이를 맛있게 넘길수 있겠느냐는 물었다. 아예 껍질을 벗기자고 덤벼드는 지금의 한국농촌에 비하면 그래도 대접이 나았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희생적인 사랑의 끝에 존재의 적극적인 자기부정이 있다는 사실을 시인은 두려워 한다. 생명체의 기본 욕구는 생명의 유지이며 유한성을 부정하려는 이차적 욕구가 자기복제를 통하여 생명체로서의 한계를 극복하려는 시도로 나타난다. 사랑이란 이러한 이중의 욕구들을 실현하는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삶의 중심을 연결하는 힘으로 등장하는 것이다. 사랑의 궁극적인 목표는 자아의 부정을 통한 생명의 추구라는 모순을 현실화하는 데 있으며, 정상적인 사랑의 과정이 종종 우리에게 두려움을 주는 것은 부정의 결과를 확인할 수 없다는우려 때문이다. 이러한 과정의 결과만을 취하려는 오만은 사랑을 강요하고 이것을 희생적이라는 수직어를 붙여 찬미한다.
김용택이 느낀 두려움의 크기는 <저 강변 잔디 위의 고운 햇살>연작에서 시인이 거의 언어를 잃어 벌릴 지경에 이르러 일상 언어에서 거의 쓰이지 않는 원형동사의 시제로 감정을 극도로 억제하며 사실만을 열거할 때 잘 나타난다. "말이 되지 않는 꽃들이 마구 내(시인의)꿈을 어지럽히"고 있었다. 김용택은 이번 시집을 세상을 뜬 이광웅, 김남주 두 시인에게 바치고 있다. 강요된 희생을 기꺼이 받아들였던 두 시인에 대한 흠모의 정이 자괴심으로 변하면서 시인을 괴롭히고 이들과 동화하고 싶다는 욕마응로 발전한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이광웅, 김남주 두시인 외에도 문익환 목사, 시인 고정희, 평론가 김현 세상을 떠난 이들에 대한 애정은 살아도 멀리 떨어져 사는 홍성담, 임옥상, 묘정 스님 등에대한 그리움과 다르지 않다.
농민이 시인과 마찬가지로 적극적인 자기희생의 길을 나아간 예를 우리는 "일 다 해놓고 일 없을 때 죽은" 농사꾼 철순이 양반에서 발견한다.<농민들은 농사철에 죽지 않는다>는 제목부터 심상치 않은 이 시는 굶어 죽더라도 씨앗은 먹지 않는다는 농민의 의지가 어떻게 빈자리를 만들면서 우리 앞에 나타날 수 있는가를 보여준다.이번 김용택의 시집 <강 같은 세월>은 <산벛꽃> 이나 특유의 해학이 정겨운 <재붕이네 집에 봉숭아 꽃 피었네>같은 시들이 즐거움을 선사하지 않는 바 아니나 책장을 넘기는 횟수에 비례하여 가슴을 눌러오는 답답함이 다시 한 번 섬진강변의 진메마을과 우리들의 농촌을 되볼아보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