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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5.7 | [파랑새를 찾아서]
하늘과 숲만 가득차 있는 이 산속에서 우리는... 6월의 숲 - 뱀사골 가는길
조연 산모임<두류패>회원 (2004-02-05 16:43:11)
초록이 끝나면 청춘도 끝이난다 6월의 산행중 내내 화두처럼 메달린 상념이다. 퇴페적일까, 비에젖은 한탄일까. 어떤 시인의 시구도 아니고 비전향 장기수가 한참의 감옥살이 후에 풀려나와 어느 산행 중에 문득 내뱉은 말이다. 이 시대에 이데올로기는 큰 의미가 없다. 경제와 나라살림에 이념을 능가하며, 모두의 과제는 보다 나은 삶이다. 이데올로기는 이제 구시대적 유물이 된 듯하다. 더불어 잘 살고 사람답게 사는 것이다. 먼 더 큰상이 돌아온다는 믿음,신의 은총에 대한 믿을 바탕으로한 죠기길더의 자본주의에 대한 신념에 공감을 하며 죽는 그날까지 명예롭게 지내는 것이다. 6월의 산행은 가파른 릿지나험난한 계곡을 직등하는 것 보다는 숲속에서의 생활이 된다. 당연히 투쟁적인 산행은 배제되고, 여유스럽고 장난스러운 때도 많다. 어느 산인들 숲이 꽉 차 있지 않은 곳은 없지만 지리산의 초록숲은 정말 꽉 차 있다. 뱀사골 입구에 들어서면초록이 하늘과 길을 빼놓고는 모든 것을 압도한다. 이숲속은 자유와 해방이 있고 , 있는 그대로를 누리게 하는 곳이다. 숲만이 가득 차 있는 곳, 하늘과 숲만 가득 차 있는 이 산속에서 우리는 하나가 됨을 느낀다. 자연과 가장 가깝게 되는 때는 이 여름 숲이이 온갖것을 덮어버리는 때, 이 지리산에 들어와 하나가 되는 때이다. 이 숲에서 만물은 하나로 돌아간다는 명제에 도달할 수 있다. 계곡의 바위 가운데에 소리가 있다. 그리고 숲은 그 소리를 다 품어버린다. 오이겐자부로- <성적 인간>, <새로운 사람이여 눈을 떠라>,<타오르는 푸른 나무>등을 책을 쓴 작년에 노벨문학상을 받은 작가이다. 처음 노벨상을 받은 가와바타, 야스나리는 아름다운 일본을 고집한 국수주의자였으나 오이겐자부로는 모든 아시아인과의 공생과 공여의 비전을 주장했었다. 이러한 그에게 절망과 어둠의 장애라고 고백을 했던 뇌성마비의 아들이 있었는데, 그 아들은 거의 말을 하지 못했다. 한국 친구가 어느날 집을 방문하고 귀국했는데. 그 아들에게 들려주라고 당부하는 편지와 함께 <새타령>국악집을 보내 주었다. 새타령 레코드 음악을 듣고 그 아들은 새소리에관심을 보였다. 이러한 음악을 인연으로 오이겐자부로의 아들인 오에히커리는 일본 제일의 작곡가가 되었다. 그의 아들 히커리는 숲속에서 진짜 새소리를 듣고 새의 이름을 말함으로 태어나서 처음으로 말을 하게되는 기적을 낳게 되었다. 그 호젓한 계곡에서 하찮은 미물의 노래소리가 절망과 어둠에서 벗어나 새로운 문학세계의 빛이며, 스승이 되었다고 그 아버지는 노벨상수상 소감에서 밝혔다. 숲속에서 하나의 아룸다운 소리뿐인 하찮은산새의 울음이 그 아들에게는 놀라움이고 하나의 세계였다. 계곡을 들어서면 셀 수도 없는 많은 발자국이 그 길을 넘나들었으며 온갖 얘기가 다 녹아 있으리라, 사람 발길이 잦으면 흙은 씻기고 바위와 너덜길만 남게된다. 길 산딸나무, 노린재도 하얗게 모두를 반긴다. 숲길은 온통 정원이 되는셈이다. 우리들의 온갖 증오와 갈등에서도 그 꽃과 음악과 향기를 감추지 않는다. 신성한 아름다움과 사회의 추악함을 대조시킴으로 사람들의 기를 꺾어 놓는다. 자연은 비정하다, 법칙 뿐이다, 산에 오르는 우리는 자연인이 되어 있다. 좁쌀만한 흰새의 벌꽃이며 나도 개별꽃에 이르는 아주 작은 야생화이며, 흔히 있는 오랑캐꽃 티클만한 야생화 속에서 우주를 느끼고 있다. 자연은 우주이다. 어느해인가 한여름에 의학을 지망하는 젊은이를 만났을 때 그들에게 권하기를 위대한 의학자, 화학자가 되려거든 자연으로 돌아가라고 권한 적이 있었다. 그들에게 모든 병은 사람에게서 생겨난다. 그러나 그 병은 자연에서 치료 될 수 있을 것이다. 우리가 발견하지 못했을 뿐 분명 이 자연 속에 모든 질병을 치료하는 성분이 있지 않겠는가. 계곡이 깊어지면서 숲길도 점차 좁아지고 가파라진다. 돌무더기 그득한 석실은 어느 때에만 아들만을 점지해 주기를 기원하는 아낙들의 돌이 수북한 것이 동네 서낭당 같았으나 지금은 장난처럼 모두가 돌을 던져 온통 돌무더기로 되어 있다. 자연과 하나가 되는 오르는 행위가 온갖 관광객들을 위한 관리시설과 놓여진 철다리를 건너며 전설을 찾으려 하니 우습다. 더욱 편리하도록, 안전히 지나도록 온갖 지혜를 다하여 서치해 놓은 시설물들에 대한 감흥은 결코 유쾌하지 않으며, 사정없이 파헤쳐 놓고 살아있는 산에 매끄러운 산길을 내놓은 모습을 보고 후손들은 경탄과 고마움을 느끼고 위대하고 배려깊은 선조들이라고 생각할 것 같지는 않다. 온갖 위락시설의 범람과 취사금지, 야영금지, 산불경방기간 입산금지, 야간 산행금지, 우리 산사람들은 아무런 힘도 없이 멀리서 숲과 봉우리만을 쳐다봐야 할 참이다. 규정대로라면 우리는 사람들이 붐비는 위락시설과 편리시설이 있는 곳만 찾아서 돈이나 실컷 써봐야겠다. 생애를 걸고 운명적으로 산을 찾았던 산사람들은 그영광을 어데가 찾으리오. 늘상 올라 다니던 봉우리에서 자기 자신을 찾아낼런지도 모르고, 외로운 숲길에 값있는 목표를 발견할수도 있을터인데, 계곡 중간중간 빈터와 산길 양쪽에 찾길 내내 피어있는 망초꽃이 가득 차 있다. 망초, 망초, 또 망초 아메리카 인디언 지역에서 자생하던 이 꽃이 구호물품에 묻혀왔다가 전국 길가나 빈 마당, 빈집터, 빈 밭이면 틀립없이 가득 차 있다. 아름다운 야생화가 미국에서 왔다는 얘기는 아주 늦게서야 알게 되었다. 이 산야초가 번창한 그생명력의 근원은 잡초이기 때문이다. 잡초는 밝히고 뽑히고 그렇게 짓눌러도 없어지지 않고 나타나는 것이다. 우리 민중을 민초라 했다. 풀뿌리라 했던가, 이조시대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쫓기고 억눌리면 분연히 일어났다가 잡초처럼 처참하게 제거되고, 그러나 다시 자라난다. 흰색의 야생화와 꽃나무를 향기로운 꽃터널을 지나면 어느덧 반야봉에 이르는 계곡에 이른다. 나무 밑을 보면 산나물이 곳곳에 이제야 구상나무는 새로운 싹이 터있다.가파른 능선을 땀 범벅이 되어 기어 오르면 반야봉 정상이다.지리산의 중심이다 제일 높은 봉우리는 천황봉이나 산의 위치는 이 반야봉이 주봉인 셈이다. 앞을 보면 백운산을 사이에 두고 바람에 물비늘을 일으키는 섬진강이 눈 아래 나타난다. 어느 곳에서도 이 섬진강은 전체가 보이지 않는다. 물이 흘러 길이났고 사람들은 길을 따라 터를 잡았다. 경주를 아는 사람은 경주가 천년의 고도이며 삼국을 통일했다고 주장하는 그들이 당연히 말하는 풍수의 변이 있다. 반월성이 남산을 품고 있다고 한다. 그래서 남산은 성산이며 해결되지 않거 것이 없다고 했다. 이 지리산은 백두 금강과 더불어 삼신산이다. 그 무엇도 이 지리산을 품을 수가 없었다. 성스런 정기와 신령스런 산으로 모든 것을 다 받아 들였다. 그리고 초록의 숲은 모든 것을 전부 어머님 품처럼 감싸주었으나 그 숲안에서 인간의 애증은 극에 다다랐었다. 이조 후기 퇴계와 도학에서 쌍벽을 이룬 남명 조식 선생 - 지금 그의 사당 및 기념관은 경상남도 산청군 시천면 덕산부락에 있으며 덕산은 여승들의 도량인 대원사 계곡 초입에 위치해 있다 은 지리산을 말할 수 없어서 단지 그것이 지리산만 하겠오 하늘이 울어도 울리지 않는다오 그리고 국토의 잠자고 있는 보물을 찾아다니며 우리 문화 유산의 보물을 보여주는 유홍준 씨도 산사나이가 아닌 탓도 있겠지만 그 장엄함을 감히 담을 수 없어 산은 지리산이다 라고만 했다. 자연에 대한 고마움이나 자연의 위대함을 우리 선조들은 알 필요가 없었다. 삶 자체가 그어느것 하나도 자연에거스르지 않고 자연과 하나되어 살아남기 때문이다. 그러나 근대화된 문명의 길로 들어서면서 고대 그리스 철학과 기독교의 자연관이 뒤섞여 인간 중심주의적 세계관이 온 나라를 뒤덮어 자연이 하나의 착취와 개척의 대상이 되어 그 어느곳 하나 그대로 놓아둔 곳이 없게 되었다. 이 세상 어느곳에도 인간이 등정하지 않은봉우리는 거의 없다. 전설같은 등정이 없어진 셈이다. 등산은 현대적 의미이고 우리 선조들은 산에 오른는 것을 입산이라 했다. 즉 산과 하나가 되는 것이다. 산과 사람이 만나면 그 산은 이미 생명력이 있으며 산이 살아 움직이고 있으며 가득 차있는 곳이다. 깊고 깊은 '초록의 숲이 끝나면 청춘도 끝난다'는 화두는 아직도 유효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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