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5.8 | [문화비평]
민간연극 발전의 기본취지가 무색했다
글/정초왕
(2004-02-10 09:18:58)
연극이 무엇인가? 사람들은 대체 왜 아직도 연극을 하고, 또 보러 다니는가? 이 척박한 토양에서 별로 영악해 보이지도 않는 그런 일을 끈질기게도 물로 늘어지는 이유는 도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이러한 질문은 참으로 어리석게 들릴 법도 하다. 그러나 사실 인간의 생명력 자체는 연극(혹은 예술 전반)의 존재 유무와는 별 상관이 없다. 바꾸어 말하면 연극이 없이도 사람들은 계속 살아갈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여기서 우리는 다음과 같은 문제를 떠올릴 수 있으리라. 보다 더 나은 삶을 향한 기대, 개인적인 행복의 충족만으로 끝날 수 없는 자유롭고 평등하며 우애로운 공동체 사회에의 희망.... 이 유사 이래 제대로 된 인간들의 본연적인 욕구 중의 하나를 떠 올릴 때에야 우리는 특히나 사회적인 유래와 기능을 갖고 잇는 연극예술의 존재의의를 희미하게나마 다시금 수긍해 볼 수 있다. 그렇다면 사막과도 같은 환경에서 비록 선인장과도 같은 형태일지언정 지금 이곳의 연극이 목숨을 부지하고 있다는 사실을, 그러한 우리네 열망과 욕구가 아직도 아주 죽어버리지는 않았다는 증빙으로 삼아, 제법 뿌듯한 기분으로 되새김해 볼 수 있을지도 모른다. 마치 삼풍백화점 붕괴사고 현장에서 헌신적으로 일하는 사람들에게서 인간에 대한 일말의 희망을 찾듯이, 그러나 그러한 인위적 재앙이 현장에서조차도 또한 탐욕, 이기심과 공명심이 날뛰고, 일신의 영달을 지키려 광분하는 자들이 공존하고 있음을 목도하여 우리는 과연 무슨 생각을 하여야 할 것인가. 차라리 그 사고가 인재가 아니라, 지진과 같은 자연적 재앙이었다면 우리는 우리 민족에 대해 더할 나위 없는 자긍심과 희망을 품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95 전북연극제 총평의 서두치고는 너무 옆길로 새버린 듯도 하지만, 글을 시작하면서 이러한 연극개론적인(?) 이야기가 불쑨 튀어나오게 된 것이 전혀 이유가 없지도 않다는 생각이다.
제11회 전북연극제가 6월 26일부터 7월 3일까지 전북예술회관에서 거행되었다. 전날의 개막행사와 다음날의 부대행사(세미나 및 시상식)를 포함하면 장장 10일 간에 걸쳐 행사가 펼쳐졌고, 참가 극단도 4개 단체에 이르니 예년에 비해 부족하지 않은 셈이다. 문제는 이러한 일견 그럴듯해 보이는 외양이 그에 상응하는 내실을 담고 있었느냐 하는 점에 있을 것이다.
극단 사랑의 “살로메”와 극단 갯터의 “엄마는 오십에 바다를 발견했다”공연은 우선 그것이 과연 어는 정도까지 작품자체의 진실에 접근했는가 하는 문제를 제기했다고 할 수 있다. 대다수의 배우들이 성격구축에 실패했고, 발성과 동작 등 연기의 기본적인 측면에서조차 문제를 내보이는 경우가 적지 않았다. 무대미술과 음악도 평범하다 못해 진부해 보이기까지 했다. 그러나 또 한편으로는 이러한 문제가 오로지 배우와 스태프들 자신만의 책임일까 하는 의문도 든다. 왜냐하면 결국에 이것은 연출의 작품 해석과 긴밀한 연관성을 갖기 마련이니 말이다. 인물해석에 관련된 문제를 떠나서도 “살로메”의 공연에서는 사건의 단순한 나열을 피하면서 중심부분을 심화시키거나 특성화시키는 과감한 연출전략이 필요했다고 보이며 “엄마는 오십에....” 공연에서도 섬세하고도 자연스러운 내면연기를 요구하는 원작의 특성에 비추어, 특히 무대장치의 문제를 미리 숙고해 볼 필요가 있지 않았을까 한다. 본디 소극장 무대에 적합한 내용을 담기에 무대세트는 너무 컸으며, 극히 사실적인 장치들은 현재와 회상을 오가는 텍스트를 관객의 머릿속에 적절히 심어주기에 오히려 방해요소가 되었다는 생각이다. 다만 바라는 것은 이러한 비평적 언사가 오로지 애정 깊은 질책으로써 더 큰 발전의 거름으로 작용했으면 하는 것이다.
전주시립극단의 “다시래기”는 드물게 접하는 잘 만들어지고 재미있는 공연이었다. 예전의 서울극단의 공연을 답습하지 않고, 무엇보다 극장을 ‘열린 공간’으로 활용한 연출이 돋보였으며, 각 배우들의 연기, 무대미술과 음악적 요소 등 여러 측면들이 별로 흠잡을 데가 없어 보였다. 그러나 자만할 정도는 아니다. 더 높은 도약을 위해 몇 가지 지적해보면, 우선 ‘지금여기서’ 이 극이 가질 수 있는 의미를 좀 더 깊이 천착할 필요가 있었다. 예를 들어 ‘우리 시대의 억울한 죽음’과 ‘새로운 출발’의 문제를 접목시킬 수도 있었을 것이다. 이는 물론 ‘저승사자’ 그리고 ‘사령과 민중들’을 어떻게 해석하여 서로 대치시킬 것인가 하는 문제와 불가분의 관계가 있을 것이다. 극중극(다시래기극)과 본극의 경계가 좀더 명확했으면 싶고, 등장 인물의 타당성도 좀더 분명해야 할 것이다. 상주 부부의 극 참여가 너무 적은 것, 풍남제 공연 때에 비해 객석에서의 연희성이 감소된 것도 아쉬운 점이었다. 짧은 연습기간에 대폭 수정함으로써 불가피하게 발생할 수 밖에 없는 문제들도 나같은 사람의 눈에는(?)드러나 보였다. 대사전달도 좀더 분명히, 자신있는 동작으로 했었으면 싶고, 각 장면들이 좀더 매끄럽고 활기차게 연결되었더라면 더 바랄 게 없었을 것이다.
창작극회의 “꽃신”은 이 지역 민간 연극의 현재와 미래, 한계와 가능성을 동시에 보여주는 공연이었다. 한편으로는 원작의 스케일, 그리고 그것을 공연화하는 데 있어서의 꽁수(?) 부리지 않는 접근방법은 그저 경탄스러울 뿐이다. 우리나라의 어느 지방 민간극단이 이 정도의 내용, 형식적 규모를 가진 공연을 감히 구상하고 또 현실화시킬 수 있을 것인가.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이러한 과감한 도전을 튼실히 밑받침하기에는 몇 가지 아쉬운 점들이 있었다고 보이며, 그것이 결국 공연의 미심쩍은 부분으로 남게 되지 않았을까 한다. 우선은 극단의 정기공연시 지적된 바 있던 ‘꽃신’-모티브의 호소력 부족이 개선되지 않은 점을 지적해볼 수 있겠다. 그것이 작품의 제목으로서 타당하고도 확고한 의미를 갖기 위해서는 단지 극중극의 모티브에 그치지 않고 본극으로도 그 의미가 확장되면서 극을 전반적으로 떠받드는 이미지로 발전될 필요가 있었다고 보인다. 이점은 물론 그것을 구체화하는 연출 역량과도 밀접히 연관되는 문제이기도 하다. 이번 공연은 지난 정기공연에 비해 군더더기가 많이 잘리면서 지루함을 덜고 속도감을 주는 데는 성공했다고 보이나, 끝마무리가 너무 갑작스럽다는 느낌도 주었다. 이 작품은 결국 끝마무리가 핵심이며, 따라서 어떤 점에서는 앞의 모든 장면들이 그것을 위한 사전 토대와 동기 구축과정일 것인바, 좀더 설득력 있도록 플롯을 가다듬었으면 한다. 또한 기본세트의 색감이 어두운데다가, 특히 초반부에는 뒷막을 치고 부분 조명을 구사함으로써 답답한 느낌을 주었으며, 빈번히 구사된 붉은 색조의 조명은 눈을 상당히 피곤하게 만들었다.〔작품 전반을 지배하는 이러한 붉은 색조에도 불구하고 막상 출정 장면에서는 흰 깃발이 등장하였다. 싸우러 나가면서 백기(?)라니....〕전국대회에서의 좋은 성과를 위해서는 어쩌면 시각적 효과 전반에 대한 전면적인 재검토가 필요할 듯하다. 음악은 전반적으로 압권이었다. 그러나 좀더 애잔하고 정감어린 음악이 함께 어울리길 바란다면 지나친 욕심일까? 그러기 위해서는 물론 그러한 장면 자체가 설정되어야 하겠지만 아무쪼록 좀더 다듬어 전국대회에서 이 지역연극의 명예를 드높이기 바라마지 않는다.
연극제는 창작극회의 ‘꽃신’이 작품상을 차지하고 전국연극제의 전북대표로 선발됨으로써 막을 내렸다. 당연한 결과이긴 하지만, 전주시립극단의 공연이 본디 축하공연인 마당에, 나머지 두 극단이 애당초 본상의 경선을 포기함으로써 적잖이 빛이 바랜 느낌이다. 가능성이 별반 보이지 않을 경우 아예 참가를 않거나 비경선 참가를 내세우면 최소한의 명예는 지켜지는 것인지. 사실 그나마 참가라도 한 극단들의 성의는 그래도 평가 받아야 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이러쿵 저러쿵 다 얘기할 수도 없지만 이것이 갑작스런 풍토는 아니니깐 말이다. 그럼에도 소집단 내에서의 입지에만 집착하는 소아병적 태도를 탈피하여, 지역연극의 발전이라는 명제를 그 무엇보다 우선하는 것이 결국은 ‘제 무덤 파는 자들의 똑똑한 동맹자’ 노릇을 최소한은 피하는 일이 아닐까.
이번 연극제는 행사의 기획 및 진행에 있어서도 적지않은 문제점들을 노정했다고 보인다. “지역연극의 현실과 미래”라는 주제를 내세운 세미나도 실상 실속이 별로 없었던 데다 그나마 한 명은 발표조차 못하고 말았다. 애초 예정된 시간이 짧기도 했지만 시상식에 얼굴을 내밀어 온 내빈들을 배려하는 것이 그렇게도 중요했던가. 전례없이 특정 언론사를 주최자로 만들어 결과적으로 홍보에 결정적인 장애를 초래한 것은 또 어찌된 연유인가. 그러나 가장 큰 문제는 개인상 경선에 시립극단을 동등하게 포함시킴으로써 결과적으로 민간극단의 사기를 현저히 저하시켰다는 점이다. 이는 민간연극 발전이 기본 취지임에 틀림없는 연극제의 의의에 배치되는 것이 아닌가. 나중에 듣건대 방침을 결정하는 과정에서 의견수렴도 없었다지만, 확연히 예측가능한 결과를 전혀 미리 고려하지 않고 있다가 막상 상황이 코앞에 닥쳐서야 안절부절 못하는 모습은 보기에도 안타까운 한 편의 블랙 코미디였다. 아무쪼록 협회 당사자들이 걸머질 수 밖에 없을 여러 문제점들을 철저히 검토하여 내년의 연극제가 보다 알찬 것이 될 수 있었으면 한다. 연극예술이 보편적으로 당면한 문제들과 지역연극의 더 큰 어려움들을 되새기며 연극인들의 철저한 자기성찰과 분발을 촉구하고 또 스스로 다짐하고 싶은 마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