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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5.8 | [세대횡단 문화읽기]
유교적 모순 속에 발전한 초기 한국화 이태호 교수의 조선전기회화의 형성과 발전
이태호(2004-02-10 09:23:27)
당나라의 역사는 불교국가로부터 시작되었다. 그러나 불교 국가이면서도 관료를 충원하는 방식이 과거를 통하는 방식으로 바뀌고 그렇게 채용된 관료들이 힘을 얻어가면서 당나라는 점차 불교국가에서 유교국가로 바뀌게 된다. 이렇듯 유학(儒學)을 기초로한 사대부 문화의 형태를 보면 풍류나 은둔을 즐기며 신선이 되고자했던 삶의 형태를 이상으로 삼고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런 이상적인 삶의 형태를 갖춘 사람들의 원류가 당송 8대가이가. 당나라 초기부터 시작된 과거제도의 시험 문제가 경학, 문학이 합쳐져 시문학이 발전하고, 당송 8대가의 삶의 지향을 체계화시켜낸 것이 성리학의 요체가 된다. 불교를 기반으로 한 집권세력들이 등장하게 되는 배경이 바로 이것이었다. 이들이 관료를 하면서 보다 경제적인 기반을 갖게 되고, 한편으로는 자신의 생활은 풍류와 은둔자적하는 것으로 삶의 지향을 삼게 되었다는 것이다. 바로 이 시점에서 회화사에 큰 변화가 일어난다. 8세기 이전의 그림들은 대부분 채색화였고, 그 다음 유교시절에는 한나라 때처럼 주로 인물화가 주종을 이루었고, 불교시대에도 주로 불상그림 등 인물이 주종을 이루었다. 중국에서는 6조시대에 사혁이라는 사람이 육품이라는 활원을 정립하는데, 사혁의 육품론의 제일번이 바로 ‘기운생동 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당나라 때 까지 이런 기운생동 이론의 기반은 채색화로부터 주어졌고 아주 섬세하게 사실적으로 잘그린 그림을 기운생동한다고 했다. 그러한 시점에서 당나라에서 송나라로 넘어오면서 수묵화와 산수화가 발전하는데 바로 이것이 성리학적 기반을 바탕에 두고 발전하면서 회화사에 중대한 영향을 미치낟. 당나라를 기범으로 해서 회화사는 크게 두 부류로 나뉘는데 나중에 명나라 때 동기창이라고 하는 사람이 중국의 회화를 크게 두 부류로 나누면서 여기서부터 남종화화 북종화라는 개념이 출발한다. 잠깐 주제와 관계없이 소개를 하자면 회화 즉 그림 그리는 일은 동양사회에서 두 가지 부류로 나누어진다. 하는 궁중이나 귀족들의 생활에서 필요한 그림들을 그리는 화원들이 있었는데 이런 화원들은 당시 계급적으로 중인계급이나 기술직 공무원 정도에 속했고, 양반보다 한 단계 낯은 그렇다고 천민은 아닌 독특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다. 이런 사람들이 이른바 직업적인 화가였다. 그러나 동양회화에서는 서양처럼 직업화가만이 화원이 아니었고 사대부들 중 자기 교양으로 그림을 그리는 선비화가들이 또 존재했다. 선비화가들은 그냥 여기화가가 아니고 자기 화론, 자기 그림의 이론적인 기초를 갖고 묘사기량을 갖춘 화가들이었다. 바로 그런 선비화가들의 그림을 남종화라고 했고, 화원가들의 그림을 북종화라고 불렀는데 이처럼 신분에 따라 화풍을 구분한 것은 명나라 때의 일이었지만, 그 원류는 당나라 때로부터 시작되었다. 산수화가 발전하는 시기는 당나라, 송나라 때로 새로 형성된 신흥사대부들의 풍류와 은거 - 깊은 산, 절경, 명승에 은거해서 고사가 되고 싶어하는 삶의 형태가 산수화의 발전을 추동시켰다. 이것의 뿌리는 물론 6조시대의 청담사상이 기본을 이루고 있었다. 6조 시대에는 향촌에 묻혀 살아가면서 관료로 성장할 수 없었던 정치적인 기초가 청담사상을 만들어낼 수 밖에 없었다. 그런 형태 속에서 죽림칠현과 같은 청담사상이 산수화를 발전시킬 수 있는 기틀로 마련되었고 드디어 그런 삶을 이상으로 삼게 되는 송나라에 와서 산수화가 크게 발전하게 된다. 채색산수와 수묵산수의 큰 차이는 채색산수는 대상이 가진 모습을 사실적으로 그리는 것이라는 점이었다. 그때 당시에는 이런 형태의 그림을 사생 또는 사진이라고도 했다. 그 다음 선비들의 그림은 사의(寫意)라고 했다. 여기사 사의는 수묵화의 발전을 가져오게 하는 기본적인 활원이 되었다. 그것은 말하자면 ‘마음’이었다. 사의는 마음을 쏟아낸다는 뜻인데 그 마음을 그리는 그림, 즉 그 외형에서 느끼는 마음을 그리는 것을 서양사람들은 추상이라고 했다. 동양에서는 ‘사의’마음을 찾아낸다는 뜻이 된다. 마음으로 읽는 그림이 되면서 수묵화가 발전하게 된다. 성리학의 기본적인 체계는 만물의 본질은 변하지 않는다고 하는 이치를 가지고 있었다. 이런 결정론을 그 당시 신분사회에 적용하면 ‘한번 양반은 영원한 양반’이고 ‘한번 백성은 영원한 백성’이 되는 셈이었다. 이 봉건적인 모순의 틀을 이미 당나라 때부터 과거제도를 통해서 성립시켜 놓았던 것이다. ‘양반’은 이마 하늘로부터 부여받은 것이다. 그래서 천부적으로 부여받은 마음으로부터 사의로 그림을 그리는 것이 가능하다는 것이었다. 그때는 신분사회로 묶인 틀 속에서 선비만이 할 수 있는 일이었다. 그러면서 이런 사의가 바로 수묵산수화를 발전시킨다. 그러나 이것은 12-3세기에는 나름대로 설득력을 가질 수 있었으나 17-18세기에 이르면서 상황은 달라지게 된다. 17-18세기는 이른바 근대사를 준비하는 시기로서의 의미를 갖는다. 이렇게 해서 북종화, 남종화의 기틀이 마련됐지만 실제로는 화원화가들의 인격이나 선비화가들의 인격이나 다름이 없었다. 이미 북송 때 박기라는 화원은 자기 활원을 전개시킬 만큼 이론에 밝았고 화원들이라고 해서 활원을 못내지도 않았고 다 경학을 공부한 상태였기 때문에 불만은 쌓여져 갔다. 이런 상황이 조선 초기부터 갈등의 요소가 되었다. 화원들은 궁중의 초상화, 벽화를 그리면서 출세를 하게 되는데 왕의 초상화를 잘 그리면 금배를 받게 되지만 당시의 성리학적 풍토 아래서 이런 사람의 아들들이 양반이 되는 것은 아니었다. 이런 일이 조선 초기에 많이 나타나게 되고 후기에도 많이 나타나게 되었다. 우리나라 화가 중에 3대 주당이 있는데 그 한 사람이 바로 김명국이 라는 사람이었다. 김명국은 항상 술에 취해야 그림을 그렸는데 만취되면 떡이 되어버렸다. 그것은 화원으로서의 자기 위상을 못견뎌한 그런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었고 그래서 술로 신분적 스트레스를 해소했다는 것이다. 여기서 좀더 근대적 방식으로 간 경우가 최북의 경우다. 최북이 어느날 대감집 사랑방에 그림을(최북은 호를 호생관이라 했고 붓으로 그림을 그려서 먹고 산다는 뜻으로 북 호를 썼다고 한다) 그리러 갔더니 하인놈이 문앞에 나와서 사랑방에 큰 소리로 “초직장 오셨습니다.” 라고 외치자 최북이 벌떡 화내면서 “내가 언제 직장을 지냈느냐 기왕 할려면 최정승이라고 해라”했다고 한다. 그런 다음 사랑방에서 산수화를 그리고 있는데 그집 아들이 그림을 보더니 “왜 산수화를 그리면서 산만 그리고 물은 안 그리는가”하고 핀잔을 주니까 최북이 화를 내면서 “이놈아 종이 밖이 다 물이다”하면서 이런것도 모르는 놈들 앞에서 내가 그림을 그려주다니 하면서 붓끝으로 자기 눈을 찔렀다고 하는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다. 그래서 최북은 외눈이로 살아야 했다. 그 외에도 그러나 신분사회의 질서에 부단히 거부하고 그것을 이겨내려는 노력을 보여주는 많은 일화가 있다. 또 한 사람, 말년의 이름난 주당으로 장승업을 들 수 있다. 장승업 같은 경우는 그림을 얻으러 오는 양반들이 하도 거스름을 피워서 자기집 대문을 허리 아래로 낮추었다고 하는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다. 그래서 누구든 그림을 얻으러 오는 사람은 절을 할 수 밖에 없도록 했고, 그때 자기가 마당에 나와 손님을 맞았다고 한다. 이런 갈등이 중국에서도 명나라 때에 이르러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중국의 명나라는 근대사에 자본주의 사회를 준비하는 단계로서의 의미를 갖는다. 명나라 후기에 오면 물론 청나라의 침략으로 망했지만 자체내에서도 계급투쟁이 심하게 일어나게 된다. 그 극단적인 표출이 바로 농민전쟁이라고 볼 수 있다. 명나라 때에 이르면서 ‘성리학으로는 못살겠다’해서 부민층이 성장하고 상인들, 그중에서도 소금장수가 굉장히 큰 경제적인 힘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한 상황이 되면서 결국 성리학으로는 그 사회를 제도화해 나갈 수 없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면서 성리론은 그 사회기틀을 체계화시켜내지 못하고 심리(心理 마음의 이치)라고 하는 양명학의 시대로 간다. ‘심리’ 즉 현상적으로 보면 세상에 고착되어 있기는 했지만 현상적으로 고착되어있지 않고 마음에 따라 달라진다고 하는 것이다. 당연히 대상을 보는 눈도 달라지고 대상에 대한 인식도 달라진다. 그러나 대상의 본질은 물론 변함이 없는 것이었다. 이것이 예술의 근대성이 라는 개성주의를 만들어낸 중요한 기틀이 된다. 여기서 본질을 보다 더 근원적으로 찾기 위해서 청나라 때는 고증학(금석학)이 발전한다. 이러한 변화 속에서 개성주의적인 화파와 실증주의적인 화파가 형성된다. 명나라 때 와서 남종화와 북종화로 갈라지게 하는 절파와 오파라고 하는 화파가 형성되게 된다. 명나라 초기 15세기에 대진이라는 화가가 있었는데 그는 너무 왕의 사랑을 받아 주변의 시샘을 받을 정도였다. 대진이 그린 그림 가운데 낚시하는 그림이 있었다고 한다. 그 그림에서 낚시꾼이 노란색 옷을 입었는데 황색은 오방이 중앙색, 바로 중앙의 황제인 임금을 상징하는 것이었다. 바로 이 사실이 임금님보고 낚시나 하라는 소리와 같다고 하는 모함에 걸러 그는 결국 궁중에서 쫓겨나 절강성에 가서 은둔생활을 하게 된다. 절강성은 양자강 중하류에 위치한 곳으로 중국의 문화, 예술을 발전시킨 장소 이기도 하다. 이때에 신주, 문진명 등의 선비화가들도 같은 곳에 은거해서 오파를 형성한다. 이미 송나라 이후에 와서는 화원이나 선비나 후묵산수화를 그린다. 화원가 출신도 돈을 번 다음에는 은거해서 수묵산수롸를 그렸다고 한다. 점차 일반인이 보기에 화원가 그림과 선비화가의 그림을 구분할 수 없게 된다. 명나라 이후에는 남종화, 북종화의 개념이 없어진다. 그런데 이것이 조선에 와서는 18세기에 그대로 남아서 지금까지도 그 영향이 잔존하고 있다. 그러나 사의적인 수묵산수화는 동양화의 독특한 자기양식을 통해서 예술문화의 발전에 역할을 한다. 송나라 때 정립되는 산수화와 북송 때 10-11세기 당나라 말기부터 발전한 수묵화가 일세를 풍미하면서 이성과 곽희 같은 이각파 화가들이 나타나게 되었던 것이다. 이어서 북송 때 화북의 지방지세를 기초로 한 화풍이 발전하다가 남송대에는 화원들이 회화양식이 발전하는데, 이것은 양자강변과 풍경을 그리면서 형성된 마원과 하규, 마하파가 형성이 된다. 그림의 특징은 이곽파는 산수의 모습이 뭉개 구름 피어나듯이 그린다는 운두준, 그 다음에 겨울나무들이 게의 발톱처럼 보이게 그리는 해조묘의 기법을 창안해내고, 화면구성을 보면 고원법으로 산이 높은 화면에 꽉찬 구도법을 갖게 된다. 남송에 와서는 양자강변의 풍경을 그리다 보니까 화면이 옆으로 많이 확대가 돼서 주로 양자강변이 가진 특징은 강변의 바위에 있는데, 강변을 그리는 부벽죽 즉 바위를 도끼로 쪼갠 것 같다는 표현이 나타난다. 부벽준을 쓰는 그림을 그리면서 변각구도 즉 한쪽에 풍경을 치우치고 여백을 남겨두는 그림들이 화원화가들에 의해 그려진다. 이 시기에 와서는 이런 두 개의 조류화파들 이외에 은두했던 선비화가드이 배출이 되는데 그 대표적인 예가 미불이다. 이 사람은 그림의 분위기를 창출하기 위해서 붓을 옆으로 찍어서 미점산수를 창시한 화가이다. 동원과 거연은 은둔해서 강남지방 양자강 상류에 은둔해서 그곳의 풍치를 그리는데 피마준이라고 하는 삼껍질을 벗긴 듯한 부들부들한 선으로 산으로 계곡과 언덕의 주름살을 그리는 준법을 개발해냈다. 이렇게 해서 송나라 때 중국땅을 그리는 형식의 기틀이 완성된다. 그것이 원·명·청나라에 오면서 점차 재해석되고 그 같은 과정을 거쳐서 중국의 회화사가 형성이 되는데 그 기틀의 완성은 북송 때라고 볼 수 있다. 아까 얘기한 중국화 활원 중에 기운생동이 일품인데 육품이 전위모사부터 기운생동으로 발전하게 되는 과정이다. 전위모사는 대상을 그대로 옮겨 그리는 방식이 하나이고, 두 번째는 고화나 선배들의 그림을 그대로 모사하면서 학습하는 방식이다. 중국 사람들은 자기가 좋아하는 선비화가들을 그대로 모사하면서 공부하는 훈련이 지금까지도 남아 20세기 현대 중국화의 기틀이 되기도 한다. 남송 5파는 미불, 동원, 거연을 기초로 해서 선비화가 남종화풍과 피마준법 등을 써서 아주 까슬까슬하고 먹을 아끼는 그런 회화이념을 펼쳤다. 명나라 때 북종화를 형성한 절파는 부벽준을 기촐 한 화풍을 기본으로 하고 있다. 그것이 복합되기도 하고 다양하게 나타난다. 이런 송나라의 형식은 고려에 들어왔을 때 산수그림이 아쉽게 한 점도 안 남아 있어서 확인할 길은 없다. 물론 고려불화가 남아있긴 하지만 수묵산수화로서는 아니다. 송나라 양식이 원나라에 그대로 이어지게 되고 그것이 조선에 들어오게 되는 것은 고려말로부터 시작된다. 특히 충선왕 때 연경에 만권당을 설치해서 중국의 학문을 고려에 이입시키게 되는데 이때는 원나라의 조맹부와 이곽파 화가들이 활동하고 있었을 때였다. 이 조맹부는 친원파였던 사람으로 이 곽파 화풍을 그렸지만 송설체라고 하는 개성있고 탄력있으면서도 단정한 글씨체를 개발한 중국서예사의 중요한 인물이다. 이 시기에 만권당에 가있던 인물이 바로 익재 이제현이었는데 이제현은 서예가 이며 화가이자 동시에 학자였다. 이런 시점에서 고려에도 성리학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불교에 의해 문란한 사회체제를 새로운 신학문을 통해서 개조하고자 했던 것이 그 배경이었다. 이제현이 만권당엣 조맹부로부터 송설체를 직접배우고 이곽파를 배워왔다고 한다. 성리학을 통해서 송설체 이곽파들이 고려말에 들어와서 조선 초기의 전반적인 분위기를 형성하게 되었다. 이곽파 양식을 조선초기에 왕성한 사람이 바로 안견이다. 그리고 그 송설체를 완성한 사람이 안견과 친했던 안평대군이다. 우리나라 3대 서예가 중의 한 사람이다. 조선시대 그림이 안 남아있긴 하지만 혀냊 남아 있는 증거로 이성과 곽희의 화풍인 남송화풍이 들어왔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는데, 화원화가였던 이상좌 같은 화가가 미하파의 풍을 따른 그림을 남기고 있다. 그와 함께 조선초기의 회화적 특징은 편파구도로 초기 산수화의 양식을 형성, 16세기에 오면서 초기 성리학의 수준이 더 높은 수준의 성리학으로 발전해 간다. 그러나 학문적으로는 그같은 발전이 이루어지지만 정치적으로도 초기에는 성리학이 새로운 사회를 만들 수 있는 체제논리가 될 수 있다는 자신감을 가졌던 것 같다. 그러나 시간이 갈수록 그같은 학풍이 명분론으로 흐르고 한편으로는 이미 12세기에 만들어진 성리학을 15세기에 적용하려고 하니깐 맞지 않는 부분이 많았던 것 같다. 그러면서 고려말기에 성리학자는 두 부류로 나뉜다. 하나는 정치에 참여했던 명분론, 그 다음 정몽주니 이색이니 하는 사람들처럼 두 왕을 섬길수 없다 해서 은둔해버리는 일파들인데 그 일파가 16세기에 와서 두드러진다. 이 세력들이 신진 사림파가 된다. 조선의 개국과 함께 명나라가 들어섰고 그래서 조선은 명나라를 숭배하게 되었다. 숭명사상에 입각함과 함께 새로운 조선적인 사조를 수용하게 되는데 이것이 바로 명풍이다. 명풍 가운데 화원들이 그렸던 그림들과 함께 절파계통의 화풍을 수용하게 되는데 이것이 16-7세기에 확산이 된다. 16세기에 강희안처럼 중국에 사신을 다녀오는 지식인층에 의해서 신풍이 들어오게 되고 이것이 바로 절파가 된다. 절파는 중국에서 북종화인데 이경룡이나 강희안, 김재 등 선비화가로 명나라의 것은 구분없이 새로운 사조라고 해서 수용하게 된다. 이것이 조선 초기와 중기에 걸쳐 절파화풍을 형성하게 되는 배경을 이룬다. 17세기에 오면 임진왜라놔 병자호란이 끝난뒤 이제 이런 명분론과 도의론이 대립하면서 극히 조선적인 성리학이 자리잡게 된다. 그러면서 이황과 이이가 등장한다. 이 사람들의 등장은 조선적인 양식에 입각한 성리학의 기틀이 형성되었다는 것을 의미하는데 이것은 이어서 붕당정치로 전개된다. 그러나 이런 상황은 철학적으로 보면 사상논쟁이었고, 정치경제적으로 보면 정권투쟁이 된다. 이러한 가운데 17세기를 맞게 된다. 이러한 변화는 이제는 경제적 기반을 확고히 하면서 확장하려고 하는 가운데 은둔과 풍류를 시도하는 것으로 나타난다. 안견과 이상조의 신자소는 삶의 이상을 중국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던 것을 이제 조선적인 성리학의 기틀을 마려하면서부터는 그 이상이 바로 이땅에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던 것을 이제 조선적인 성리학의 기틀을 마련하면서부터는 그 이상이 바로 이땅에 있다고 생각했다. 이러면서 사대부들의 대거 부동산 바람(?)이 불게 된다. 그래서 퇴계는 도산서원, 이율곡은 항해도 고산구곡으로 은둔하는데 고산구곡에서 아름답다고 노래할 수 있었던 것은 그땅 일대를 자기 땅으로 장악했기 때문이다. 그 다음에 정권을 장악하는 계층이 서론에서 노론으로 넘어가고 서론의 핵심인 송시열을 괘산일대 계곡을 차지하게 된다. 이러면서 자연히 우리땅의 아름다움을 인식하고 내땅을 그리기 시작하는 것이 17세기이다. 이런 속에서 큰 정치질서가 변하기 시작하는데 중국의 명나라가 망하고 청나라가 들어서는 것이 그것이다. 이제 중국의 정통법통을 조선이 이었다고 그들은 생각했다. 그래서 송시열을 주자가 주자전을 냈듯이 송자대전을 만들었다. 그것을 이제 소중화주의 또는 중본주의라고 역사학에서는 얘기한다. 결국 노론 집권하에서 차츰 성장해온던 17-18세기 호족세력들의 경제력과 부딪치게 되고 그러면서 신분질서는 점차 와해되게 된다. 그러면서 우리경제도 근대경제로 여명을 틔우게 된다. 이러한 상황하에서 우리땅을 그리는 실경산수가 발전하는데 그것은 18세기에 와서 정선이 금강산을 그리고 땅에 살아가는 사람들의 노동하는 모습들을 그리는 풍속화로 나타나게 된다. 이런 가운데 자연히 신분의식을 함께 자신의 신분에 대하 인식과 함께 자신의 신분에 대한 의식의 보수성을 드러내는 경향을 띠게된다. 17세기에 남종화가 유입되는데 남종화의 유입과 함께 명나라 때 크게 발전하는 것이 화보이다. 남종화, 북종화의 이론을 교과서로 만들면서 채색목판화로 화보를 만든다. 유명한 화보가 개자원화보, 그 다음에 남종화의 유입과 관련해서 가장 유명한 것이 고씨 역대 명인 화보들이고 그것들이 17세기에 우리나라에도 소개되기 시작한다. 그것을 통해서 그림이라는 것은 선비그림과 화원그림이 다르구나 하는 보수적인 인식이 형성되고 이런것들이 바로 후기회화의 기반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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