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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5.8 | [세대횡단 문화읽기]
작가로서 뛰어난 기량과 고매한 인품의 화가 효산 이광렬
글/이철량 (2004-02-10 09:31:08)
전북의 문인화가들 중에서 이광열만큼 필묵에 대해 절묘한 이해를 지니고 있었던 작가는 그리 많지 않다. 지극히 한정된 자료를 통해 작가들을 비교 분석한다는 매우 위험스러운 일단을 접고 본다면 분명 이광열은 대단히 감각이 뛰어나고 기량이 출중한 대표적인 작가로 지목하는데 손색이 없을 것 같다. 이는 그가 기본적으로 서도(書道)에 대해 깊이있는 공부를 바탕으로 필묵을 다루었고, 뿐만아니라 문인화에 대한 재반 소재들에 대해 충실한 기술을 연마했었다고 보여지기 때문이다. 이광열은 장기는 역시 사군자와 화조 그리고 기명절지(器皿折枝)등에서 파악된다. 사군자는 구한말을 살았던 대부분의 화가들이 가장 즐겨 다루었던 화목이므로 이 방면으로 뛰어난 화가들이 많다. 이를테면 이정직과 조주승을 비롯하여 송태회, 유영완, 김정회 등과 같은 인물들 외에도 많은 작가들이 폭넓게 활돌했다. 그러나 이들 중 이광열은 가장 감각적이며 근대적 표현법을 보여주고 있다고 생각된다. 또한 기명절지에서도 김회순(金熙舜 1886-1968), 최순모(崔純模 1910-1940) 그리고 화조화에서는 가장 기량이 돋보였던 이상길(1901-1959)에 버금가는 수작을 남겼다. 아마도 전북화단의 대표적 인물 중의 하나로 꼽는 데 손색이 없는 작가라 할만하다. 이광열은 전주에서 태어나 호를 효산(曉山)혹은 수명루인(水明樓人)이라 불렀다. 1895년에 나서 71세의 일기를 살았으니 아마도 남은 작품이 많을 것이라고 생각된다. 그는 일찍이 학문을 하였던 부친의 영향으로 경서를 읽고 글씨를 쓰다가 당대 가장 널리 소문이 나있던 조주승의 문하에 들어갔다. 조주승의 문하에서 그는 글씨와 사군자에 대해 깊은 공부를 하였다. 이광열의 조주승 문화에서 어떤 형식으로 공부하였는지에 대해 확인되고 있지는 않지만 이광열이 15세가 되던 1900년에 전주공립소학교를 졸업하고 공무원 생활을 시작하였다는 기록으로 보아 학교에 입학하기 전 유인시절에 잠시 공부했을 것으로 보인다. 실제 조주승은 이광열이 8세 때 세상을 떠났던 것으로 미루어 이광열을 조주승의 큰 영향을 받았을 가능성은 매우 적다. 그리고 이광열의 화풍 역시 조주승의 그것과는 감각면에서 많은 차이를 보이고 있다. 그렇다면 이광열은 어떻게 글씨와 그림에 대한 공부를 진행하였을까 하는 의문이다. 이광열의 나이 41세에 조선미술전람회에 묵매로 입선하고 이듬해는 묵죽으로 입선한다. 뿐만아니라 이후 일본 서도 전람회나 문전 등에 출품하여 입선함으로 해서 탄탄한 기량을 내외에 과시했다. 그러나 그는 이때까지 학문화 서화에만 몰두하였던 것은 아니다. 그는 소학교를 졸업하고 나서 관리생활로 시작하여 함육학교 교사와 제2공립보통학교 교사로 근무했다. 그가 이렇게 바쁜 일과를 충실하게 소화해내면서도 지속적으로 서화에 몰두하였던 것은 이광열의 서화에 대한 애호와 집념의 소산이라고 봐야겠다. 어떻든 이러한 행적을 통해보면 이광열은 조주승의 영향을 직접받았다고 보기는 어렵다. 그리고 어느 누구에게서도 본격적인 서화공부를 하였다는 흔적은 없다. 필자의 판단으로느 당얀한 화본과 서첩을 기본으로 하면서 앞선 선배들의 작품을 통해 스스로의 길을 개척하였던 것으로 믿어진다.. 이러한 심증은 그의 작품 속에서 충분히 읽어진다고 볼 수 있다. 그의 8폭 병풍 속의 사군자 작품은 이광열의 작품세계를 들여다 보는 데 손색이 없다. 이 작품들은 이광열이 당시 전북 사군자 화풍에서 훨씬 빗나가 있음을 보여준다. 묵법과 필법이 상당히 현대적 풍모를 담고 있는 작품이다. 매·난·국·죽의 모드 소재가 손색없이 다루어여 있다. 먼저 암석이 표현에 있어서 명암의 극단적 대조가 눈에 띈다. 화면의 시각적 효과와 여백이 운용이 암벽을 대담하게 흰 공간으로 남겨두는 방법으로 발전된 예라고 볼 수 있다. 이러한 표현은 매우 대담하고 새로운 화면인식에서 오는 수법이라 할 만하다. 뿐만아니라 경물의 배치나 조함에서도 특별나다. 이를테면 국화나 대의경우는 큰 암석 뒤로 살포시 엿보이는 국화 두서너 송이를 그려넣거나 댓잎이 바위 뒤에서 고개숙인 모습이다. 이러한 형식은 종래에는 거의 나타나지 않았던 극단적 대비 효과를 이용한 화면 경영이다. 말하자면 종래에는 주가 되는 경물을 화면 전체에 꽉 채운 모습이거나 화면을 주된 소재 위주로 경영하던 방식에서 크게 달라진 것이다. 뿐만아니라 매화의 경우는 화면 한 가운데에 우뚝 서있는 모습인데 이렇듯 수직으로 화면 중앙에 세우는 대담한 구성력은 대단히 파격적인 것이다. 특히 끝이 다 잘려나가고 난 가지들이 밑으로 쳐져 웅크리고 있는 모습에서 풍상에 시달린 처절한 노목에 매화를 극적으로 표현했다. 이러한 그림을 통해 이광열이 꼿꼿한 기재를 지닌 선비였음을 읽게 한다. 난 그림의 화면 포치는 대원군과 이정직 그리고 조주승 등에서 쉽게 볼 수 있는 좌측으로 대담하게 밀어부친 형식이다. 그러나 이 작품을 통해보면 이광열이 그의 선배화가들에게 일탈하려는 노력의 흔적을 여실히 읽어낼 수 있다. 여기에서는 그들 선배들이 보였던 날카로운 필맛이 훨씬 둔화되면서 필세의 힘을 더하고 있다. 그러나 이 작품들 속에서 과거와 다든 새로운 감각은 앞서 언급한 화면 경영이나 필세에서만이 아니다. 이광열의 묵법은 여타의 다른 작가들보다 훨씬 대담하고 다양성이 있다. 농묵과 담묵의 어우러짐이 윤기있는 그림으로 소화되고 있다. 담묵의 운용과 편필(붓을 살짝 옆으로 뉘어 사용)의 효과에서 조선후기 남종화의 영향을 읽게 하는 부분이 있다. 아마도 이지역 문인화가들 중에서 남종화적 분위기를 가장 잘 연출하고 있는 듯이 보인다. 그런데 그의 남종화적 분위기와는 색다른 암석표현은 매우 이례적이라고 보여진다. 이를테면 암석의 표현은 17C에 많이 나타났던 절파풍의 표현양식을 따르고 있다는 점이다. 이러한 예가 이광열이 일정한 방식을 따르지 않고 제반양식을 다양하게 소화해 자기화시키고 있음을 볼 수 있는 예이다. 이광열이 화가로서의 뛰어난 기량과 학문을 깊이 익힌 선비의 고매한 인품을 보여주는 예는 사군자 외에도 여기에서 보는 것과 같은 여타의 그림에서도 잘 나타난다. 이 화조도는 여러쪽으로 된 병풍 중의 일부인데 담백한 중간먹으로 푸근히 가라앉은 온화한 느낌을 자아낸다. 그리고 담묵에 잘 어울릴 수 있는 따뜻한 색조는 그의 뛰어난 사실력과 어울려 높은 지의 문인화의 진수를 보여준다. 대단히 문기(文氣)짙은 대표적인 작품이라 아니 할 수 없다. 이외에도 그의 작품들 중에도 예전에 거의 다루어지지 않았던 기명절지를 소재로 한 그림이 남아있다. 기명절지는 조선시대 후기 중국의 화보들이 들어오면서 일부 사대부 화가들 속에서 유행했다. 특히 구한말 이후 정치적 혼란기에 선비들의 현실도피로 인한 문인화의 유행과 함께 많이 그려졌었다. 그러나 여기에서는 특별히 작가적 특성이나 표현의 독창성이 별로 나타나지 않았던 아쉬움이 남았다. 어떻든 기명절지는 서양의 정물화에 해당하는 독특한 장르였다고 할 수 있다. 이렇듯 이광열은 적어도 문인화의 범주 속에서 이야기 될 수 있는 다양한 양식을 소화해내고 있다고 볼 수 있다. 그에 대한 업적은 그림에서 뿐만아니라 한묵회를 조직하여 서예에서 많은 제자를 기르고 활동했던 데서 더욱 높이 평가된다. 이광열은 전북이 낳은 대표적 서화가였다고 할 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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