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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5.8 | [특집]
소작료 70% 하루 식량도 충당할 수 없었다. 일본인 지주 구마모토와 한국인 소작농
글/소순열 (2004-02-10 09:52:16)
40년전 일본에서의 해방기념 행사 1955년 11월 11일 재일본 한국 기독교 청년회는 조국 해방 10주년을 기념하여 사랑과 성실로 조선인에게 봉사한 일본인에 대한 감사소임을 가졌다. 초대된 일본인은 11명 이 집회에서 김소운 씨는 주빈으로 초대된 11명의 약력을 소개하였다. 그는 <정해한일사전>, <조선시집>, <조선민요집>등의 번역서와 많은 수필집을 내 일본에서 잘 알려진 문인이었다. 유독 내가 이 40년전의기사에 관심을 가진 것은 초대된 일본인 중 두 명이 포함되었다는 사실 때문이었다. 그중 한 사람은 김제에서 농장을 경영하며 고창 고등보통학교를 설립한 마스도미라는 이였고 다른 한 사람은 군산에서 농장을 경영하며 농민진료소를 설치아여 의료사업에 공헌했다는 구마모토였다. 이 두사람은 과연 어떠한 인물인가 언제 전북에 와서 어떠허게 지주가 되었을까 그리고 어떤 방법으로 토지경영을 했을까 이러한 의문들은 근대 농업사를 전공하고 있는 나를 흥분시켰다. 구마모토와의 만남 나는 먼저 발간된 각종 통계자료를 이용하여 일제 때 전북의 위치와 특징을 확인하는 노력을 시도하였다. 전북은소작지율이 75.6%(1920년)로 전체 조선에서 가장 높으며 일본인 지주가 가장 많고 그리고 농업기술인 고도로 발달하여 전체 조선을 주도해 갔던 지역이었다. 그러고 동시에 가난한 농민이 가장 많았던 지역이었다. 전북의 지역적 특성을 보면 소작지율이 높고 일본인 지주가 많은 서부평야지역(김제, 옥구, 익산, 부안 등)은 기술이 발달했지만 가난한 농민이 많은 편이었고 동부 산간지역(임실, 남원, 장수 등)은 이와 반대였다. 여기에 내가 관념적으로나마 내리고 있었던 결론은 일본인 지주가 전북의 농업기술을 발전시킨 주체(기술의 추진자)였던 동시에 농민을 빈궁하게 만든 주체(교율수작료수취)이기도 했다는 사실이었다. 이런 관념적이고 추상적인 나의 연구태도에 대해 류종완 교수는 현장의 농촌조사를 권유해 주셨다. 나는 전주에서 태어나 농촌에 대해서는 잘 몰랐고 더구나 역사적 조사나 자료수집 분석능력에 대해서 무지했기 때문에 알고 싶다는 의욕은 강하였지만 일종의 불안감을 떨칠 수 없었다. 1986년 여름 고창문화원 이기화 원장을 만나 마스도미에 대한 이야기을 들을 수 있는 기회를 얻었다. 이 원장에 의하면 마스도미는 독실한 기독교 신자로 고창 고등보통학교를 설립할 만한 인물이었다는 것이었다. 이 사실은 마스도미의 소작인이었던 곽성조 씨(당시72)의 이야기에서도 확인되었다. 전주에 돌아와 나는 더 이상 1차 자료를 통한 일본인 지주의 경영분석을 진전할 수 없다는 결론을 내리고 그동안 수집한 2차 자료에만 매달렸다. 이를 통해 두 사람은 1900년대 전북에 왔다는 것 그리고 두 사람이 절친한 친구였다는 사실을 확인했지만 더 이상의 일본인 지주연구는 답보상태에 빠졌들었다. 연구에는 우연이 작용하는 경우도 있다. 1991년 여름 일본 체류중 한국에 나온 기회에 당시 농대 고대식 학장을 만났고 자연스럽게 연구테마에 대한 이야기를 나눈던 중 고학장을 개정병원에 구마모토에 관한 자료가 있을지도 모른다며 개정병원의 이주완 약국장을 내게 소개시켜 주었다. 그분과의 만남으로 인해 나는 드디어 구마모토와의 연을 맺기 시작하였다. 이주완 약국장의 이야기로는 이미 구마모토 농장의 막대한 자료는 해방 후 불쏘시개, 벽지, 화장지 등으로 없어졌고 다만 구마모토를 연구한 일본인이 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일본으로 되돌아가서 오오데본학원대학 졸업생인 나가자와 씨를 수소문하여 어렵게 구마모토 농장 자료를 구할 수 있었다. 30여 점 만 페이지 이상이나 되는 엄청난 자료였다. 이를 통해 나난 구마모토라는 사람을 비로소 파악할 수 있게 된 것이었다. 지주왕국 구마모토는 1880년 8월 1일생으로 나가사티 이기섬(쓰시마섬 근처)출신이다. 시모노세케의 몬지상업학교를 졸업하고 게이오대학에 입학한 후 같은 섬 출신의 마스나가(일본의 전력왕)의 여동생 구니꼬와 만나 결혼하려고 하였지만 학생신분이라는 이유로 반대에 부딪치자 졸업 직전 구니꼬와 함께 고등학교 동기인 마스도미의 집에 모을 의탁하였다. 마스도미는 구마모토의 재정적 후원자가 된다는 조건으로 마스나가의 허락을 얻어내 두사람의 결혼을 성사시켰다. 마침내 구마모토는 1902년 김제에 있는 마스도미의 농장 지배인으로 조선에 진출하게 되었으며 1903년 자신의 농장을 경영할 수 있는 기반을 다지게 되었다. 그리고 마이니찌 신문사 사장 등이 제공한 자금으로 토지부로서 본격적인 토지 매수에 나섰다. 당시 지가는 일본의 30분의 1에 불고했으며 구마모토가 매입한 토지는 약 2.000정보나 되었다. 당시 일본인은 현금을 주고 토지를 사거나 토지 저당을 잡아 조선 농민에게 돈을 빌려준 다음 농민이 기한 내에 갚지 못하면 토지를 취득하는 상황이었더. 일본인에게 토지를 판 사람은 농민들로부터 양반이나 왕족까지 다양하였다. 한 예로 가이라는 일본인의 저서전에 의하면 경성의 왕족 이준용, 총리대신 이완용도 자신의 소유지를 매각하였다는 기록이 나온다. 구마모토의 토지집적의 예는 그야말로 특이했다. 1907년 120정보에 불과했던 그의 토지는 1910년 구마모토가 대리로 산 토지까지 인수하여 일약 2.500정보 1936년에는 3,200정보다 되었다. 대부분 일본인 지주의 경우 일본 내지주이거나 귀족, 상인, 금융업자, 기업가들이었지만 구마모토는 무일푼으로 와 벼락 지주가 되었던 것이다. 일본 마이니찌 신문(1934년 11월 23일)은 구마모토에 대해 ‘전북 도내에 개정·지경·화호리의 3대 농장을 가져 일왕국을 형성하였다“라고 쓰고 있다. 전북 최대의 개인지주 1936년 전북에서 1,000정보 이상의 지주는 모두 14인(일본인 13인 조선인 1인)이었는데 이 가운데 상인인 가이의 후지농장, 대장촌의 호소가와 농장, 이시가화현 농사회사 다기비료로 유명한 다기농장, 백인기의 화성농장, 미쓰비시 계열이 소유한 동산촌의 동산농장 등이 그것이었다. 구마모토 농장은 3,000정보로서 최대 개인주였으며 소작지는 1부 5개 군 26개 면에 걸쳐 있었다. 1본장, 3지장, 1분장을 두고 개정본장, 지경지장, 대야지장은 금강과 만경강 사이에 있는 옥구,김제, 익산의 1,300정보 화화지장은 동진강 하류에 있는 부안 정읍의 1,600정보 전주분장은 완주군 상관며의 90정보를 각각 관리하였다. 구마모토 농장의 관리조직은 경리부, 사업부, 진료부로 구성되어 있었다. 경리부는 회계업무 사업부는 농사지도와 소작인 관리 등을 진료부는 소작인의 무료 진료를 담당하였다. 1935년 4월에 설립된 구마모토 자혜진료소가 바로 진료부에 해당된다. 진료소 개소 이래 해방까지 10년 5개월 동안 진료를 받은 소작인 수는 약 21만명 연인원 80여만 명에 달했다. 결론적으로 20,000명의 소작인 가족이 1인당 연간 4회 정도의 진료를 받은 셈이다. 1955년 재일 한국기독교 청년회는 바로 이 진료사업에 대한 감사의 뜻으로 구마모토을 초대한 것이다. 소작인관리 1936년 지주자료에 의하면 구마모토 농장은 2,687명의 소작농민에게 토지를 빌려주고 있었다. 광범위하게 경지가 산재된 이상 소작인들은 49명의직원과 67명의 마름을 통하여 관리되고 있었다. 마름은 지주와 소작인 사이에 개재하여 소작인의 선정부터 소작료 결정, 징수, 감면까지 책임을 지는 지주의 에이전토였다. 구마모토 농장은 직원이라는 새로운 관리인을 채용하고 중간착취자로 악명이 높았던 마름을 직원의 보좌역으로 격을 낮추었다. 구마모토 농장경영의 비결은 바로 이 중간관리인에게 있었다. 이들은 경도제대 구주제대 등 명문대 출신이었으며 조선인 직원은 이리 농림학교 정읍농림학교 출신이 많았다. 해방 수 국민학교 출신이면서 기가 된 것을 생각한다면 엘리트 중의 엘리트인 셈이다. 농장직원들은 농장에 실험포를 설치하여 연구를 하고 100정보를 표준으로 퇴비와 심경다비에 의한 지려증진 개량품종의 보급 농사 개량 등 일본식 집약농법을 소작인들에게 지도 감독하였다. 이들 농사기술 전문가에 의한 농업기술개발은 총독부 농정 당국보다 10년 정도 앞섰다고 자부할 정도였다. 이들 전문 농사기술자를 이용하는 방법도 무척 특이했다. 매년 증산증진회를 열어 우수 직원에 대해서는 보너스를 주고 어떤 경우에는 성과급으로 토지를 주는경우도 있었다. 실제로 전북도청에서 스카웃한 가네고라는 사람은 50정보 지주가 된 경우였다. 구마모토 농장은 이러한 농사전물 기술자를 채용하여 3,000정보 내외의 소작농민을 주도면밀하게 관리하는 지주-직원-마름-소작농민이라는 소작인 관리기구를 두고 이를 통해 지배해 왔던 것이다. 그러면 이러한 지주의 중층적 소작인 지배기구하에 현실의 지주소작관계는 어떠한 것이었을까 그 문제의 열쇠를 쥐고 있는 것이 바로 소작계약증서이다. 소작인들은 매년 2월에 5명의 연대보증인이 날인하여 지주계약을 하고 그 내용은 품종의 지정 땅갈이 깊이 소작미의 포장 규격 등에서부터 생산분배에 이르기까지 모든 사항을 규정해 놓았다. 이를 위반할 시에는 자연 소작계약이 해제된다. 이러한 소작계약증서와 더불어 소작료는 최고 예상수확량을 기준으로 정하여 소작예약을 한다. 계약소작료는 그 범위 내에서는 그 해의 최대한의 목표 달설양이며 이것이 달성되면 다시 수확량을 올리고 만일 부득이한 경우 감면을 행한다 그 감면은 소작인에게는 마치 지주의 은총처럼 느껴지게 하는것이었고 이것은 아주 교활한 지배방식이었다. 소작료는 풍흉에 관계없이 11얼 30일까지 완납해야 하며 만일 기일이 되어도 완납하지 못한 경우는 소작지를 몰수하나다. 만일 기일이 되어도 완납하지 못한 경우는 소작지를 몰수한다. 만일 기일이 되어도 소작료 미납분이 있는 경우엔 연 20%의 이자를 가산하여 연체료를 납입하도록 되어 있다. 구마모토의 최대 관심을 어떻게 하면 소작료를 많이 확보할 수 있는 가에 있었지만 한편으로는 소작미의 품질이 나쁘면 시장에 팔지 못하므로 미질이 좋은 양질미를 어떻게 많이 확보하는가에 부심할 수 밖에 없었다. 그런 시도로 나온 방법이 소작미 품평회에 개최였다. 이에 관한 일본인 농장의 기록 사례를 조선 농회보에서 살펴보면 “매년 3,4월이 되면 소작미의 품질, 건조, 형상 색깔등을 심사하여 소작인이 출뭄한 미를 1등부터 4증까지 등급을 매겨 우승자에게는 1등 탈곡기 2등 대두박 3증 삽 4등 호미를 각각 수여하고 소작인 단체에게는 우승기를 수여한다. 품평회 수 향응에 서는 소작인으 우열에 따라 좌석배치를 하여 우승자에게는 우월심을 열등자에게는 분투심을 고취시킨다 는 것이었다. 즉 소작인간의 경쟁임을 이용하여 양질미을 확보하는 전근대적인 대인보상방식을 채용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 소작미 품평회는 바로 소작인 품평회였다. 소작쟁의 거대지주의 지배하에 있었던 소작농민은 이 당시 어떠한 생활을 하고 있었을까 전체 조선의 평균 소작료 수준은 수확량의 50%였지만 구마모토 농장의 경우는 경찰부장이 작성한 보고서에서도 나타나 있듯이 60-70%의 고율이었다. 이 당시 식민지 전북농업을 전체 농산물 생산액의 60%이상이 미작들 하는 소작농가가 대부분이었다. 1935년 통계에서는 전부의 24만 농가중 1만 2천 농가가 자작을 하고 있었으므로 열 농가 중 아홉 농가 이상은 소작농가였다. 일본인 지주에게 속한 소작농가능 열 농가중 세 농가로 김제 옥구 익산과 같은 지역은 다섯 농가 이상이 일본인 지주에게 속한 소작농가였다. 1927년 2월 23일 동아일보에는 김제에 신임군수가 부임함에 따라 17명의 면장이 모여 군청 회의실에서 면장회의를 가졌다는 기사가 나와있다. 여기에서 죽산면장은 “관내 총 경지면적은 약 2,400정보에 달하고 있지만 일보인 소유가 80%이며 조신인 소유는 20%에 불과합니다. 농가호수는 1,000호 이지만 자작농은 4호에 불과하며 대부분이 소작농가로 실로 비찬하기 이를데 없습니다. 특히 작년은 소작료가 고율이어서 초근목피 상태에 있는 농가가 허다합니다‘라는 관내 보고를 남겨 당시 농민들의 참담한 상태를 직접 확인해 주고 있다. 1937년 구마모토 농장의 소작농민이 김세군수 경찰서장에게 보낸 진정서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담겨져 있다 “소작인들 구마모토 농장의 소작지를 1년간 소작하였던 것은 가족의 생활응 유지하기 위한 방책이었다. 수확물의 70%를 소작료로 납부하고 그 나머지를 가지고 지주에게 빌린 비료대금을 갚을 수 있을지 판단할 수 없다. 이것으로는 전 가족의 하루 식량도 충당할 수 없다” 이 당시 김제 부량면 소작농민이 작성한 1필지당 수지는 69원의 적자를 나타내고 있다. 집의 간장까지 뺏어 갔다는 촌로의 말대로 농미의 생활은 그야말로 참담하기 이를데 없는 것이었다. 이러한 참담한 현실이 1933년과 1934년 1935년 1937년의 네 차례에 걸쳐 소작쟁의를 일으키는 원인이 되었다. 그러나 소작쟁의는 완전승리, 완전패배도 없는 것이었다. 구마모토는 쟁의 과정에서 관헌과 유착하여 소작농민을 탄압하거나 회유 설득하여 끝내 자신의 목적을 관철시켰다. 개발과 수탈 그 현재적 의의 구마모토 농장은 유능한 농사관리자 엄격한 노작 계약규정 경쟁을 이용한 전근대적 대인보상 방식에 의해서 양질미를 수확하여 70%이상을 소작료로 거두어들였다. 군산미곡감사소의 품질인증을 받아 1년에 약 800마 가마(60㎏/한 가마)를 동경에 있는 자신의 창고로 보냈던 것이다. 일제가 간행한 자료를 보면 전북에서 생산한 쌀의 40%내지 60%을 일본으로 실어 날랐으며 28년에는 무려 84%까지 가져간 적도 있었다. 생산량이 두 배로 증가했지만 일본으로 실어 나른 쌀은 4배로 증가하였다. 소작농민이 1년 동안 소비한 쌀을 0.70석에서 0.44석으로 줄어들었다. 농민들은 부족한 식량을 잡곡으로도 보충하지 못하여 나물 풀뿌리 남껍질을 먹는 경우가 허다했다. 농민들의 빈곤한 생활은 고향을 떠나게 하는 역사적 배경이 도었다 부안군 동진면 하장리 180호 농가 중 1938년 한해 동안 13호가 정든 고향을 떠낫다. 당시 농민들이 구마모토에게 감사한 마음을 가지고 있었을까? 무료진료사업은 일종의 온정 주의에서 나온 것이다. 무엇을 가지고 농민의 감사하다는 마음을 평가할 수 있을까 그 당시 소작농민은 구마모토의 무료진료사업에 감사하다고만 느끼지 않았음은 당연하다 더욱이 소작농으로 전락하거나 산으로 들어가 빈민으로 되든가 그렇지 않으며 조국을 떠나 일본으로 건너 가거나 만주로 이주한 농민들의 고향을 등지는 마음은 얼마나 처량했을까 이제 쌀은 과잉생산시대를 맞고 있다. 일제 때의 강제적 보급을 그대로 재현한 70년대의 통일벼 보급에 의한 증산정책의 효과인 것이다. 농학이라는 학문도 엄청나게 발전하였다. 그러나 예나 지금이나 변하지 않는 것은 농민의 자발적인 기술개발 노력을 무시하는 지배층의 태도이다. 이제야 거의 1세기 동안 파묻혀 있던 농민의 기술은 자력으로 직파재배나 유기농법으로 서서히 부활하고 있다. 세 번이 징병, 세 번의 귀향 임실군 강진면 정규열 할아버지 글/원도연 우리에게 해방 50년의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는 것은 아직은 그다지 어렵지 않다. 여전히 우리는 해방이 남겨다준 절반의 나라에 살고 있고 아직까지도 부모 세대들의 자서전 한 권쯤은 아련한 기억속에 간직되어 있다. 책 한 권으로도 모자랄 이야기들이 도처에 있고 그래서 때로는 그 절절한 사연들이 되려 식상하기조차 한 것이다. 그래 그 식상한 이야기들은 다시 한번 들어보자 그것이 이번 특집의 두 가지 테마 중의 하나였다. 그러나 역시 그 이야기들을 찾아 길을 떠나기도 전에 벌써 복병이 나타났다 ‘참말로 쎄고 쎈 것’이 그 사연들이었다. 30년을 넘게 같이 살아온 부모님들로부터 늘 만나던 동네 할아버지도 누구누구의 아버지도 모두가 한 보따리 씩 이야기를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더 윤기나는 이야기가 필요했다. 이럴때일수록 몇차례 걸러진 인용자료가 아닌 1차 자료에 충실해야 하는 법이다. ‘일정때’와 38선과 이승만 박사와 ‘인공때’를 고루 겪어낸 해방 50년의 현대사 백과사전을 찾아 자! 떠나자 그러나 해방 50년의 고비고비마다 기막힌 사연을 간직하고 있다는 할아버지를 찾아 고부땅 어딘가에 도착하자마자 우리는 비보를 들어야 했다. 그 할아버지는 이미 세상을 떴고 마을 모정에는 그 신화 아닌 신화에 물릴대로 물린 근대화 세대들만 남아 있었다. 그렇구나! 이제 그 해방 50년의 백과사전들이 한 분 두 분 세상을 떠나고 있었구나 마음이 급해졌다. 내 마음이 급해지는 것은 원고를 날짜 안에 마쳐야 한다는 조바심 때문만은 아니었다. 왠지 허전해지고 있는 것이다. ‘언젠가는’우리 부모님과 그 고향의 역사를 기록해야겠다고 기특하게 맘 먹고 있는데 그 ‘언젠가는’이 감히 내 허락도 없이 지나가고 있는 것이었다. 윤기나는 이야기들이 이제는 ‘쌔고 쌘 것’이 아니었다. 그렇게 이야기 찾기는 시작되었고 회문산을 찾아 가던 길목, 백련산 아래 강진 깊은 골짜기에서 고추 따던 할아버지 한 분을 만났다. 임실군 강진면 방현리 대대로 그 땅에서 농사짓고 살던 정규열 할아버지의 집에도 일정 때부터 가혹한 회오리는 몰아닥쳤다. 1926년 병인생 19살 나이에 당시 정신대를 피하기 위해 결혼을 택한 8살난 부인과 결혼 이듬해 일제로부터 당연한 징병과 귀향 50년 한국전쟁이 터지자마자 마을을 접수한 빨치산 들로부터 아버지와 형제들을 살리기 위해 인민의용군에 자원, 같은 해 음력 8월 14일 낙동강에서부터 걸어서 귀향, 다시 51년 국방군에 징병 제주도에서 훈련받다 병에 걸려 8개월 만에 의가사제대후 귀향 “내가 군대란 군대는 다 댕겨왔어” 전주를 떠나 운암을 타고 돌아서 임실군에서도 가장 오지라는 강진면 그 면소재지에 이르기 직전의 방현리, 본래 윗동네 세재마을까지를 포함해서 약 40여 호 350여 명이 모여 살았으나 지금은 대부분 마을을 떠나고 20여 호에 80여 명만이 남아 살고 있다. 동네 바로 뒷산인 백련산은 호랑이를 직접 보았다는 사람이 있을 정도로 산이 깊고 험하며 그럴듯한 전설 하나와 애절한 사랑이야기 하나쯤 간직하고 있을 법한 폭포를 뒤로 해서 동네는 터를 잡고 있다. 보기와는 달리 논들이 군데군데 재법있고 대부분은 논농사를 주로 했지만 지금은 고추 담배 등등의 밭 농사가 더 알차게 된다 동네는 쓸데없이 정갈해서 예부터 주막이 없었고 지금도 알사탕 파는 구멍가게 하나가 없다. 대대로 땅을 일구고 살던 세재마을은 한군전쟁 때 빨치산에 점령당했다가 국군이 밀고 내려오면서 마을 전체가 불타고 없어져 버리면서 그때부터 사람 한 명 살지 않는 패허가 되는 운명을 맞이하기도 했다. 오늘의 주인고 정규열 할아버지는 이제 기억이 희미해져 가지만 아직도 총기가 있어 보였고 이야기에 조리가 있어 젊어서는 꽤나 영리하게 살아온 듯싶었다. 할아버지의 집을 시작으로 아래로 그이의 둘째 형 집이 있고 그 아래에는 그 아버지가 살았다는 집이 나란히 서 있다. 그 아버님은 8년 전에 큰 형님은 10년 정에 돌아가셨고 지금은 둘째 형 정명열 할아버지와 정규열 할아버지 두 형제가 나란히 살고 있다. 일제 때 논농사를 열두 마지기나 짓고 살았던 말하자면 ‘유지 소리’듣고 살던 집이었으나 인공은 그 집안과 동네의 운명을 완전히 바꾸어 놓았다. 첫 번째 징영, 그리고 귀향- ‘묻지마라 갑자생’ 그는 이곳 마을에서 20일 떨어진 갈림분교에서 국민학교 2학년 과정ㅇㄹ 마치고 갈담초등학교 정규과 정에 들어가야 했으나 당시 그이의 둘째 형이 학교 교장에게 곶감을 바쳤다가 되려 미움을 사 시험에 합격하고도 학교에 들어가지 못한 채 그의 학교생활은 끝나고 말았다. 이 골짜기에도 일제는 예외없이 가혹해서 그이의 집안에서도 큰형님은 징용에 끌려왔고 그이는 징병 대상자였다. 삼형제의 막내였던 그는 자형을 대신해 징용에 나가고자 했지만 그는 이미 징병대상자였다. 명색이 보리농사 짓는다고 해야 보리밥 한끼 배불리 먹을 수 없었고 나물 죽먹으며 연명했던 그야말로 먹고 사는 것이 ‘우습지도 안했던’시절이었다. 농사깨나 짓는다고 해봐야 나오는 대로 공출당해야 했다. 태평양 전쟁이 막바지에 이르면서 마침내 이 마을에도 징병과 징요의 회오리가 몰아닥쳤다. 방현마을에는 일곱 명의 징용대상자오 두 명의 징병대상자가 있었다. 정규열 할아버지의 큰 형님은 43년 징용에 끌려가 북해도의 탄광으로 끌려가고 정규열 할아버지는 징용 3기 대상자였다. 43년 징용이 시작되었던 당시 갑자생이었던 나이 스무살의 청춘들이 바로 유명한 ‘묻지마라 갑자생’의 주인공들로 징병 1기에 해당되었고 그 위로는 징용에 끌려가게 된다. 징용이나 징병에 끌려가는 사람들은 마치 죄인인 듯 꽁꽁 묶여 차에 실어졌고 기약할 수 없는 길을 떠났다. 큰형님 창열씨도 낯설고 물설은 일본땅 북해도로 그렇게 끌려갔고 그리고 얼마후 규열씨는 일주일에 한번씩 1년여에 걸쳐 이웃 갈림국민학교에 가서 군사 훈련을 받았다. 마침내 45년 운명의 시간이 다가왔고 어느날 들이닥친 일본군인들에 끌려 부산을 향했다. 그때 그는 이미 산 사람이 아니었다고 생각했고 모두가 그렇게 믿었다 그러나 일본군들 앞에서 그는 눈물마저 보일 수 없었다. 그의 첫 번째 징병이었다. 그와 불행한 조선청년들을 태운 트럭이 밤을 도와 부산을 향하고 있을 때 어디뜸에선가 갑자기 한떼이 청년들이 나타나 깃발을 들고 차를 세웠다. 차가 멈췄고 길을 가로막은 창년들은 다짜고짜 일행을 인솔하던 일본군들을 두들겨 패기 시작했다. 해방이다! 해방이다! 8월 15일 해방은 그렇게 다가왔다. 그 자리에서 그는 다시 온길을 되돌아 고향땅에 돌아왔다. 해방되던 해 12월 그의 큰형님이 돌아오면서 집안을 모양새를 갖췄다. 해방은 제자리로의 회복을 의미했다. 그러나 그것을 결코 제자리로의 회복은 아니었다. 두 번째 징병 그리고 귀향 - 반동의 가족 그의 두 번째 징병을 첫 번째보다 훨씬 더 극적이었다. 해방이 되고 일시 평온했던 마을는 다시 시끄러워지기 시작했다. 내놓고 활동하지는 않았지만 동네 청년들이 그 ‘공산당 조직’에 들어 있었고 뭔가 모르게 불안하고 편치 않은 시간들이 흐르고 있었다. 그 와중에 이 박사는 토지개혁을 했고 일정 때 치안대장을 했던 그의 아버지는 요행히 무사했으며 공무원 생활을 했던 둘째형은 계속 공무워을 하고 있었다. 그러나 평화는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전쟁이 났다는 소식이 들려오자 마을 청년들 몇몇이 완장을 차고 돌아 다니기 시작했다. 당시 강진면, 청웅면, 덕치면 3개 면을 총괄하던 빨치산 대장이 바로 이 마을 출신이었다. 전쟁이 나자마자 그의 집에 그들이 들이닥쳤다. 일정 때 치안대장을 했던 반동을 응징한다는 것이었다. 집안의 재산이 송두리째 몰수당하고 집에서 키우던 소 12마리는 ‘분배’되었다. 그래도 그의 아버지와 형제들의 목숨이 위태로왔다. 부모형제의 목숨을 살리기 위해서 다시 막내였던 그가 역할을 맡아야 했다. 빨치산 대장을 찾아가 의용군에 자원하고서야 그의 가족들은 생명을 보장받을 수 있었다. 그것이 그의 두 번째 징병이었다. 낮에는 산속에 숨어 자거나 교육을 받고 밤에는 어딘지 모를 곳으로 걸으면서 임실에서 남원을 거쳐 그가 도착한 곳은 낙동강이었다. 낙동강은 사방에서 불기둥이 치솟고 사람들은 ‘겁도 안나게’죽어갔다. 그와 그의 동료 의용군들에게는 총 한자루 쥐어지지 않았다. 그저 대기하고 있다가 전선의 맨 앞에 뛰어들어 맨손으로 활로를 열고 총을 뺏고 싸워야(?)하는 것이 의용군의 임무였다. 그곳에서 그는 북쪽 사람들을 만났다. 16살 소년부터 45살의 장년까지 그들이라고 다 그런 것이 아니었다. 그러던 어느날 그러니까 낙동강 전투가 거의 끝나가고 인민군의 패퇴가 확실해질 무렵 그의 의용군대오 드디어 진국명령을 받았다. 나지막한 야산에 올라가 숲속에 숨어 있을 때 갑자기 미군공급기가 하늘 위로 떠올랐고 “폭격이다! 피해라!”는 소리가 들여왔다. 그가 숨어있다가 뛰쳐나온 직후 바로 그 자리에 무자비한 폭격이 쏟아졌다. ‘재수없는 사람들’은 다들 죽고 살아남은 몇몇 사람들은 제각각 뿔뿔히 흩어졌다. 그의 의용군대가 해체되는 순간이었다. 그리고 그길로 그는 다시 고향을 향해 무작정 걸었다. 그러나 아직까지도 그는 살아있는 목숨은 아니었다. 곳곳에서 애매하게 사람들이 죽어가가고 있었다. 국군이든 인민군이들이건 조금이라도 수상한 사람들은 모두 억울하게 죽어갔고 그 자리에 무덤도 없이 묻혀졌다. 그렇게 해서 죽은 사람들도 수도 없었다. 낮에는 숨엇 자고 밤에는 길을 걸러 부안변상에 이르렀을 즈음 그는 다시 한번 생과 사의 기로를 만난다. 북으로 패퇴중인 인민군들과 맞부닥친 것이다. 인민군 대좌 1명과 중좌 1명 그리고 인민군 사병 2명이었다. 그들은 그에게 이런저런 말을 묻더니 말에 조리가 있으니 ‘이놈 말하는 것이 고이 촌에서 지낸 놈이 아니다 경찰관이라도 살아 먹은 놈이지 고이 살아온 놈이 아니니 죽이고 가자’고 했다 그래서 ‘아니 그런법이 어딨냐 정치운동을 할려면 사람을 조사라도 해보고 죽이더니 살리더니 해야 할 것 아니냐’고 대들었다 그렇게 4시간을 실갱이 하다가 마침내 대좌가 수풀속으로 데러가서 죽이라고 명령했다. 그러나 죽을 일만 남아있는 그가 다시 대들었다. “이왕 죽일거면 여기서 죽여라 여기서 죽이나 수풀속에 가서 죽이나 마찬가진데 뭣 났다고 이리저리 끌고다니냐 이제 맘대로 해라”고 버텼다. 실제로 그때 심정이 그랬다고 했다 그 광경을 보고 있던 대좌가 다시 ‘그럼 죽이지 말고 데리고 가자’고 결정을 내렸고 그는 다시 한번 그렇게 살아났다. 그리고 나서 인민군 사병에게 호밀을 한 주먹 얻어먹으면서 듣고 보니 그들 인민군들이 바로 그 전날까지 그런 식으로 죽인 사람만 여덟 명이었고 실은 그러다가 그들이 지니고 있던 총들이 모두 격침이 부러져 이제는 권총 한 자루만 달랑 남아 있었다고 했다 그러니 인민군대좌 입장에서 그를 죽이다 마지막 남은 권총마저 격침이 부러지면 ‘용행을 헐 것이 없은께’ 그를 하는 수 없이 살려 주었다는 것이었다. 그렇게 해서 동행한(?) 길이 이북까지라고 했다. 그러나 그때 인민군 사병이 계속 따라오다가 적당히 기회를 봐서 도망치라고 귀띔해 주었다. ‘그래도 되느냐’고 몇 번을 되묻자 사병은 저 대좌만 피해서 도망을 가면 자신들은 그냥 모른체 할 것이라고 했다. 그러나 쉽게 도망칠 기회가 주어지지는 않았고 결국 그는 임진강까지 따라갔다. 이제 이 강만 넘으면 이북땅인 것이다. 인민군들은 며칠새 그에게 마음을 놓고 있었고 강을 건너기 직전 각자 밥을 얻어 먹으러 인가로 숨어들었다. 그도 혼자가 되었다. 마지막 기회가 온 셈이었다. 그렇게 그의 탈출은 성공했고 그길로 그는 고향에 돌아왔다. 그의 두 번째 귀향이었다. 세 번째 징병 그리고 귀향 - 제주도에서 고향에 돌아오니 집안은 이미 완전히 기울어 있었다. 인공을 겪으면서 가진 재산은 다 빼앗겻고 심지어 집에서 기르던 가축 한 마리 남아있지 않았다. 동네는 빨치산들이 거의 사라지고 그의 부모형제들은 약속대로 살아 남아 있었다. 그가 의용군에 끌려 갔다온 몸도 변변히 추스르지 못하고 있을 때 국군에서 징집영장이 날아왔다. 질긴 인연이었다. ‘기가 막히는’ 청춘이었다. 힘겹게 살아 돌아온 그는 이 핑계 저 핑계로 여섯 차례의 부름을 번번히 미루었다. 그러나 운명의 일곱 번째 그는 마침내 국군에 입대해야 했다. 이제 다시 죽음의 길로 가고 있었다. 이승만 박사가 제주도에 훈련소를 설치하고 신병을 모집하던 시절이었다. 그는 제주도 훈련소의 1기 훈련병이었다. 어디로 가는지도 모른 채 고향을 떠나 내려보니 군산이었다. 다시 그곳에서 며칠을 머무르다 배에 타라고 해서 배를 타고 내리라고 해서 내려보니 여기가 제주도라는 것이었다. 훈련소 시절은 고달팠다. 그 언제인들 고달프지 않았던 적이 있었으랴만 배고픈 것은 그만두고 마실 물마저도 변변치 않았다. 3개월의 훈련이 끝나갈 무렵 그는 제주도의 풍토병은 괴로웠지만 그 풍토병으로 그는 살아날 수 있었다. 정신이 혼미하고 모을 가눌 수 없었던 그는 3개월의 제주도 생활을 마치고 보충병원을 거쳐 부산 삼육군병원의 중환자로 입원해 있었다. 밤새 수백 명의 부상자 들이 실려 들어오고 그에게도 죽음은 남의 일이 아니었다. 전쟁이 아닌 병으로 ‘죽네 사네’하던 와중에 그는 다시 행운을 만난다. 바로 그 병실의 책임자였던 중위가 전주사람이었다. 그가 워낙 딱해 보였던지 그 중위가 앞장서서 그를 제대시켰다. 그것이 그의 마지막 징병과 귀향이었다. 우리 삶의 기록 지나간 삶의 이야기들이 우리에게 언제 어떤 에너지가 되어왔는가 우리 삶의 에너지가 되지 못했던 그 역사는 자연스럽게 묻어지고 우리는 그렇게 바쁘게 근대화 시대를 달려왔다. 해방 50년이 왜 이제와서 새삼스러운가? 아직도 생생하게 진행중인 분단의 역사 속에서 우리는 소리높여 통일과 민족을 말해왔지만 정작 그 속에 살아 왔던 우리 삶의 기록에 대해서는 어떤 애정과 관심으로 다가섰던가 그 시절의 이야기만 들으면 우리는 그 세대에 도발해오지 않았던가 ‘그만! 이제그만!’이라고 그렇게 그만두어졌던 이야기들이 이제는 정리되어져야 한다. 우리가 한 시대와 역사를 이해하는 방식은 어쩌면 거창한 구호나 거대한 역사 속에 있지 않을 수 도 있다. 동학농민혁명 100년이 기록들이 불살라지고 증인들이 죽어간 것을 안타까워 했듯이 해방 50년의 역사도 우리 속에서 다시 불살라지고 있는 것을 아닌가 아주 가까운 곳에 있다. 바로 그 지점으로부터 우리의 역사인식은 새롭게 시작될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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