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5.9 | [문화저널]
백제기행 제44회
이른 다섯 칸 진남관에 여물어 가는 동백
글/김태호 문화저널 기자
(2004-02-10 10:11:12)
해방 50주년의 1955년 8.15 광복절을 3일 앞둔 12일 오후. 버스는 중천의 태양도 아랑곳하지 않고 서둘러 여행길에 올랐다. 오후 2시 반, 파아란 하늘과 흰구름 두어 둥싯, 머리가 벗어지게 뜨겁고 무더운 날이다. 휴가철과 맛물린 더위 탓일까. 지난 지리산 기행 때만큼 많은 참가자는 아니다. 장마철에도 장마다운 빗줄기를 구경하지 못한 남부 지방의 메마르고 무더운 여름, 주말과 휴일에 애써 다리 품을 팔며 우리의 유적지를 돌아는 수고를 아끼고 싶은 게 한편의 솔직한 마음인지도 모른다. 어쨌든 버스의 몇몇 빈자리엔 넉넉한 바람 몇 칸 실은 기분으로 자리 걱정 없이 길을 떠나게 되었다. 낯익은 얼굴들도 많다. 가끔 굽이잇글로 도는 버스 안에서도 사람마다 인사를하고, 벌교의 개펄에서부터 여수 항일함까지 간략한 일정 안내를 한다. 오늘은 벌교 포구를 들른 뒤 조계산 자락의 송광사 가까이에 있는 송광여관에서 묵으며 여수문화 원장의 강연과 해금 연주를 듣는다. 그리고 내일, 충민사와 진남관, 항일암 등 임진왜란을 전후로 구국의 혼을 일깨웠던 현장들을 돌아볼 예정이다.
버스는 남원을 지나 곡성으로 꺾어져 섬진강 서쪽의 남도 자락을 달리고 있다. 백두, 한라와 함께 삼신산의 하나인 지리산의 산세가 남해 바다에 이르기까지 뻗고 있는 까닭에 벌교의 너른 포구를 향해가는 이 길은, 서편제라 하던가, 판소리 가락만큼이나 굽이지는 길이 많다. 오랜 세월을 지나오면서 온갖 삶의 애환이 범벅이 되어 이루어졌을 그 길, 굽잇길들을 우리는 아스팥트나 콘크리트를 깔아 방정맞게도 쨉싸게 달려간다. 잠시 쏟아 붓는 소나기가 도로를 시원스레 적셔주고 도로변 개울에서 물놀이를 하는 아이들의 등과 목덜미가 흙탕물처럼 알맞게 그을려 있다. 주변의 논두랑 안에 빽빽한 벼는, 아이를 배태한 여인네의 모습일까, 치기넘치게 푸르기만 한 빛깔이 아닌 사뭇 푸르름이 다른 건강한 빛을 던져 주고 있다.
그렇게 세 시간을 넘게 달려 오후 5시쯤. 버스는 벌교에 들어섰다. 소설<태백산맥>의 주 무대가 된 벌교. 분단의 전쟁이 휴전으로 가름되던 때, 지리산 피아골에서 토벌대의 포위대 대원 4명과 함께 후회 없는 삶의 장렬한 최후를 맞고 다시 토벌대의 손에 의해 벌교역 앞에 목이 걸린 염상진, 그리고 적일 수 밖에 없었던 형의 목을 경찰로부터 되찾던 동생 염상구의 모습 그리고 분단된 조국의 모습처럼 길거리에 내 걸린 자시의 주검 앞에서 어쩌지 못하고 울부짖던 어머니 호산댁,... 버스는 그 벌교역을 스쳐지나 순천만을 안고 있는 작은 어촌의 개펄에 도착했다. 검은 개펄이 하얀 시멘트 길에 맞닿아 끝도 없이 펼쳐져 있고 시멘트 길 위엔 바다에서 건져 올렸던 해초와 건어물들이 너나 없이 배를 뒤집은 채 볕을 쪼이고 있다. 아직바닷물이 들어오지 않은 개펄에선 네모진 고무지우개 만한 검은 칠게들이 군무를 추듯 소란스럽게 낯선 방문객들을 맞이했고 검은 진흙뻘 위를 뛰는 새끼손가락 만한 망둥이는 처음 상견례 하는 내 앞에서도 우스운 몸짓으로 뛰기를 주저하지 않다. 버스는 다시 방향을 북으로 돌려 조계산을 향해 전보다 눈에 띄게 짧아진 여름날 남은 해를 달리고 있다. 조계산 자락에는 우리 나라 3보(三寶)사찰 가운데 국사(國師)를 많이 배출했다 해서 승보(僧寶)사찰이라 불리는 송광사가 자리잡고 있다. 여관에 여장을 풀고 조금은 허기진 배를 채우고 하늘을 올려다봤을 땐 이미 어둠이 사방을 덮고 있었다. 여관의 넓은 방에 두 명의 해금 연주자와 장고 반주자를 앞으로 모두가 둘러앉았다. 서양의 바이올린이나 첼로와 같은 칠현악기인 해금 특유의 여성스런 울림으로 연주된남도와 경기 지역의 해금 산조는 활의 움직임에 따라 대나무 통에 이어진 두 줄을 울려 때론 경쾌하다가도 서구화에 찌든 몽매한 나의 가슴을 잔잔히 울리며 꾸짖기에 충분했다. 어느 사이에 우리의 소리와 몸짓에 귓가 설고 눈이 설었던가, 우리의 모습을 거울로 비춰 볼 겨를도 없이, 우리 가진것의 보배로움을 자랑삼을 여유도 없이 그럴싸하게 남을 본떠 예쁘게 보기 좋게 화장하기에만 몰두하지 않았나 고개가 수그러진다. 며칠 전 지리산 동북 자락을 내려오는 길에 발길을 멈춰야 했던 일이 떠오른다. 지리산두지터 넓은 바위에 앉아 한여자와 또 한 소녀, 그 울림이 어찌나 크고 애절하던지, 나는 멀리 떨어진 좁은 등산로에서 한동안 움직일 수 없었다.
해금 연주가 끝나고 문정인 여수문화원장의 여순반란사건과 여수의 역사에 대한 강연이 시작되었다. 여순 반란사건은 해방과 미군정통치 그리고 48년 8월 분단정부수립으로 이어지는 시점에서 일어난 제주 4.3항쟁과 이어져있는 사건이다. 미군정 통치 아래 군 경찰 서북(반공)청년단이 제주도를 점령하다시피하여 행세하는 것을 제주도민이 4월 3일 항의하자 ‘빨갱이’로 몰아 학살하기 시작한 것이 제주도 4.3항쟁인데 10월19일 여순지역에 있던 국군 14연대는 그 제주도 항쟁의 진압명령을 항명으로 맞서 ‘반란’을 일으킨 것이다. 이런 ‘여순반란사건’은 당시 미군 작전권 아래있던 진압군에 의해 ‘반란군’이 이미 빠져나간 여수에서 6천여 양민의 학살이 자행되었고 학살된 양민은 17세 이후 40세 미만의 학생과 지식인이 대부분이었다고 한다 ‘빨갱이’라고 몰면 다 되던 시절이라던가. 이후에 들어선 군사정권에 의해 덧칠하고 감춰진 채 짧지 않은 세월이 흘렀다. 아직도 그때의 무고한 양민의 죽음이 오명을 씻지 못한 채 역사는 바로 기록되지 못하고 있다. 해방과 미군정, 분단정부수립, 그리고 전쟁과 대치... 해방과 국권의 혼란 속에 민족과 통일국가에 반하는 세력에 대한 단호한 단죄없이 지나온 역사가 낳은 불행이 아닐 수 없다. 여수는 그렇게 많은 인물을 잃고 오늘에 이르고 있다. 그래서일까, 여수에는 지역문화나 역사, 학문을 깊이 있게 연구할 수 있는 종합대학 하나가 없다. 여수 중심부엔 한국화약이 라는 큰 ‘화약고’가 있단다. 많은 문화 유산과 수려한 자연경관을 갖고 있는 미항(美港) ‘여수(麗水)’ 라는 이름의 ‘물(水)’을생각할 때 웃지 못할 생각거리를 던져 준다. 바른 소리로 왕조 시대부터 많은 문인과 적지 않은 무인이 귀양보내졌던 남도. 그래서 깊이 있는 학풍을 형성하고 문학과 풍류와 멋이 기질이 있던 호남 이순신 장군은 이런 호남을 나라의 근간이라 말하고 호남이 없이는 나라가 서지 못한다고 했다 한다.
강연이 끝난 자리엔 쩍쩍 썰어 놓은 수박과 과일 등 먹거리를 놓고 서로 권하고 얘기를 나누며 목청 트인 노래를 청하면서 늦은 밤을 맞았다. 내일 새벽에는 송광사 새벽 예불을 보리라 생각하며 선뜻 잠자리를 찾지 못하고 무더운 여름밤 하늘을 찾아 계곡에 나가 보았다. 물은 그리 많지 않았지만 계곡을 따라 늘어선 큰 정자나무를 사이로 둥근 달이 물에 비치고 있었다. 물을 따라 흐를 법도 한데 달은 그저 한 자리에 떠있다. 어제나 오늘이 보름일텐데 팔월 보름 추석도 얼마 남지 않았구나 하는 생각이든다. 두보는 이쯤해서 시를 한수 지어 읇고 술 말이나 청했을텐데...
술 몇 잔에 밤을 꼴딱 새고 새벽 4시가 가까워 올 무렵, 길인지 어둠인지 분간을 못하면서 송광사 허위허위 올랐다. 누군가 수려한 산수를 낀 명당에는 사찰이 있기 마련이라고 한 적이 있다. 사방이 보이지 않은 어둠 속에서도 대웅전 뜰안의 평온함과 아늑함이 느껴진다. 나무와 흙을 구워 만들고 공간의 여백과 자연과의 조화를 중시한 우리의 건축 양식이 주는 인간 존중의 배려 때문일까, 콘크리트와 아스팥트 위에 먹이를 쫓는 째든 속세를 벗어나 부처님의 뜰위르 거닌 까닭일까? 불을 환하게 밝힌 법당 안의 예불을 드리는 스님들과 머리를 조아린 불자들의 모습이 숙연한 마음으로 옷깃을 여미게 한다. 하얀 달맞이꽃 위로 달은 이미 기울고 산 저편 하늘이 점차 밝아 오고 있다. 새벽 끄트머리에 잠시 청한 잠을 털고 일어났을 땐 이미 날이 환하게 밝아 있었고 몸은 사뿐 가벼웠다.
오전 10시. 버스는 여수 시립 현암 도서관 가까이에 있는 충민사(忠愍飼)에 도착했다. 오늘 답사의 안내도 어제 강여능ㄹ 하신 문정인 여수문화원장님이 해주신다. 충렬사나 현충사에 앞서 일찍이 선조의 명에 의해 충무공의 영정을 모시고 있는 충민사는 오늘에 이르러 충무공 사액 제1호 사당다운면모를 빼앗긴 채 잠자듯 조용히 아침 참배객들을 맞이했다. 동입서출(東入西出)이라 했던가. 사당의 중문은 해의 뜨고 기우는 이치에 따라 오른쪽 문으로 들어갔다 왼쪽문으로 나오는 법이라 한다. 그런데 어찌된 일인가? 영정을 모신 사당의 문은 어설픈 자물쇠 하나가 보란 듯 잠겨 있었다. 오랜 지역차별 정책의 결과일까. 관리인이 그 누구인지 찾아 볼 수도 없었다. 세계화라는 국시에 걸맞게 장군께서도 퇴락한 방을 걸어 잠그고 세계속에서 배낭 여행이라도 떠나신 것일까? 모두들 세계화속에 여념이 없는 잘난 후손들 덕에 굳게 걸린 사당 안에서 얼마나 갑갑해 하실까?아니, 반쪽짜리 국가에 애통한 몰골을 보다못해 문을 걸어 잠그고 바깥 출입을 아니하시는 지도 모를일이다. 안타깝게도 여엉을 보지 못하고 발길을 돌려야 했다. 세계화는 국시 아래 홀대받는 ‘우리의 것’들이 아닌가. 사당의 뜰 한편에 서 있는 네 그루의 늙은소나무에선 여름을 보채는 매미의 울음소리만 녹음처럼 무성했다. 여수는 아랫길과 윗길로 길이 나눠져 있다고 한 옛친구의 말이 떠오른다. 그래서인지 오르고 내리는 길이 많은 것 같다. 진남관까지는 멀지 않았다. 바로 눈앞에 여수 앞 바다와 장군섬이 돌산도로 이어지는 돌산대교와 함께 펼쳐있는 진남관은 임진왜란 당시 전라 좌수영에 속하는 진해루라는 이름으로 불린 군사 건물로 이순신 장군의 수하의 장수들과 작전회의를 하던 장소라 한다. 목조 건물로는 우리나라 최대의 규모라는 말이 걸맞게 일체의 벽이나 창이 없이 이루어진 75칸의 탁트인 팔작지붕 건물로 기둥만 무려 68개를 세워 하늘을 이고 있는 지붕을 떠받들고 있다. 건물 옆쪽으로 돌아가 바라보면 늘어선 기둥들의 위용과 들보의 굵은 곡선들 속에서 무한한 힘과 자애로움이 함께 풍겨져 오는 것을 느낄 수 있다. 우리 고유의 건축양식은 정면에서보다 측면에서 볼 때 그 예술적 아름다움이 더하다고 하는 말을 실감할 수 있었다. 진마관 뜰 왼편에는 장군이 세웠다고 일곱 구의 석인(石人)가운데 모두 유실되고 비바람에 윤곽이 씻겨 나간 한 구의 석인 만이 남아있다. 문을 나와서야 문 양쪽 옆에 서 있는 동백나무를 보았는데 몸을 드러낸 채 검붉게 여물고 있었다. 지남관에서 나와 10분 정도 골목의 언덕길에 걸어 오르자 통제사이공대첩비와 타루비가 있는 비각을 만날 수 있었고 역시 바다가 바라다보인다. 이순신 장군이 죽은 뒤, 장종들이 그의 유적을 밟을 적마다 눈물을 흘린 일을 생각하며 장군을 잊지 않기 위해 많은 장종들이 세웠다는 타루비(墮淚碑)는 비록 그 규모는 작고 석질 또한 거칠지만 인간적인 따스함을 흠뻑 느끼게 하기에 부족하지 않았다. 타루비와 나란히 서 있는 통제사이공수군 대첩비는 광해군 때 황해도 병사 유형원이 황해도의 돌을 바다로 옮겨와 세웠다고 하는데 타주비에 비해 그 규모가 비각의 지붕을 찌를 듯 높고 석질 또한 뛰어나다. 오성부원군 백사 이항복의 글로 노량해전의 내용을 담고 있다. 한 줄기 바람이 뜨거운 태양 밑을 스치고 지나간다. 이순신 장군과 장병들의 혼이 깃든 자리를 물러나와 장군섬이 보이는 여수항에 내려섰다. 얼마 전 태풍이 지난 뒤 유조선의 좌초로 오염이 심각하다는 기름 유출의 피해가 다행이 이곳엔 미치지 않은 듯 바다는 푸르기만하다. 부쩍 기승을 부리는 늦 더위에 입맛을 잃은 까닭인지 걸게 차린 음식이 힙겹다. 돌산대교를 지나 돌산도 남쪽 끝에 있는 향일함으로 가는 길엔 하나같이 고만고만한 작은 포구와 해수욕장이 굽이굽이마다 내려다보이고 더위를 씻는 아이들의 모습이 물위에 뜬 나뭇잎처럼 작고 한가로워 보인다. 원효대사가 수도했다는 관음전이 있는 향일함은 임진왜란때 승군의 전초기지 역할을 했다고 한다. 남해의 푸른 바다와 끝없이 하늘이 맞닿아 남긴 한 줄기 수평선이 바라보이는 향일암의 관음전 난간에 서서, 바로 아래에 놓인 두 평 남짓한 바위 위에서 맞는 새벽의 해오름을 떠올려본다. 바다를 차고 오르는 태양에 매일 아침 눈을 씻고 살 수 있다면 하는 부러움을 던져두고 향일암을 내려와 여수를 뒤로하고 전주를 향했다. 해방과 분단정부 수립, 그리고 분단과 대치, 아직도 반쪽인 광복, 반쪽인 조국을 안타까워하지 않을 수 없었다. 오늘 우리는 대대적인 ‘광복50주년 기념행사’의 보기 좋은 잔칫떡을 맞추기에 여념이 없지 않은가.
돌아오는 길 버스 안에서 오동도의 동백꽃에 얽힌 이야기가 떠오른다.
옛날, 오동도엔 귀양온 한 쌍의 부부가 살고 있었단다. 어느 날 남편이 고기잡이를 나간 사이에 도둑이 들어 아내의 몸까지 앗으려 하였는데 아내는 달아나다 벼랑에서 떨어져 죽고 말았다. 고기잡이에서 돌아온 남편이 물위에 떠오른 아내의 시신을 거두어 섬 정상에 묻었다. 그뒤 아내의 무덤에서는 눈보라 속에서도 붉은 꽃이 피어났는데 그 꽃이 바로 동백꽃이고, 그 꽃이 온 섬에 번져 붉은 동백 숲을 이루게 되었다.
진남관에 여물어가는 동백은 머지 않아 해오름만큼이나 붉은 꽃을 피울 것이다. 그날을 그려본다. 진정한 조국의 광복을 이루는 통일의 그날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