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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5.9 | [문화와사람]
작고한 명인 양순용,김봉열의 생애 그들뒤에도 신명난 가락은 남았다
글/편집부 (2004-02-10 10:30:23)
언제까지나 가까운곳에 있어 늘 그 신명난 가락으로 우리 어지럽혀진 마음을 다스려 주었던 명인들이 하나 둘 스러져 가고 있다. 우리가 우리 것을 채 알아보지 못하고 버려할 할 것들로 밀어내고 있을 때 그들은 세월의 무게를 믿으며 묵묵하게 한 자리를 지켜 왔던 것이다. 어찌 그들의 삶이 고단하지 않았겠는가. 모두가 떠나가고 소리와 춤과 가락을 버렸을 때 그분들이 지켜내온 소리와 춤과 가락은 이땅의 어제와 오늘을 이어주는 어쩌면 유일한 그것일지도 모른다. 흙과 세월에 묻혀 살아온 숨어사는 명인들의 삶은 그래서 더욱 소중하고 가치있다. 그분들의 삶이 비록 풍요롭지 않았고 스스로 예술가연 한 적도 없지만 그 투박하고 텁텁한 삶은 결코 빛을 잃지 않았다. 지난 8월 한 달 우린느 두 분의 명인을 잃었다. 임실군 강진면 필봉마을의 옹골찬 상쇠 양순용 선생과 진앙군 성수면 도통리 중평마을의 노상쇠 김봉열 할아버지가 그 분들이다. 양순용선생은 문화저널이 91년에 마련한 ‘호남 좌우도 풍물굿의 만남’을 통해서, 김봉열 할아버지는 93년 ‘전라도의 춤 전라도의 가락’을 통해서 문화저널과 인연을 맺었었다. 필봉굿의 상쇠 양순용 선생 꽹과리의 명인 양순용 선생. 이제 쉰일곱의 한창 일할 나이에 지난 8월 11일 급환으로 아깝게 세상을 뜬 그는 임실 필봉농악의 적자로 그 마을의 신화적인 상쇠 박학삼과 송주호의 뒤를 이어 필봉농악에 세상에 알리고 그를 통해 호남좌도굿의 법통을 이어온 필봉굿의 상쇠였다. 필봉굿은 전라도 동쪽 지역에서 발원한 호남좌도 풍물의 대표적인 굿으로 이미 백제시대부터 조선조에 이르기까지 면면한 역사를 지니고 있다고 전해진다. 조선조에에 이르러 태조 이성계가 조선을 창업하면서 조선 군악의 기초가 되기도 한 넘치는 힘과 역동적인 가락을 특증으로 하고 있다. 특히 필봉굿은 다른 지역에서는 볼 수 없는 영산 가락 짝드름을 많이 쓰고 호남우도굿에서 볼 수 있는 구성진 멋과 영남 농악의 씩씩함을 고루 지녔다고 말해진다. 양순용 선생은 국가중요무형문화제 제11호 기능보유자로 어린 시절 자연스럽게 쇠를 잡기 시작하여 열어섯되면 해부터 정식으로 상모르 쓰고 쇠를 잡기 시작했다. 타고난 끼와 자연스레 몸을 익은 가락으로‘가락을 당기고 밀며’ 쇠가락을 잡으면 동네사람들은 그를 ‘농악 신동’으로 부르기에 주저하지 않았다. 스물네 살 임실 필봉굿의 상쇠로 앉은 그는 그때부터 호남좌도 가락을 보존하고 보급하는 일에 적극적으로 나섰다. 농악단 한팀 만들기에도 빠듯한 작은 마을인 필봉굿이 그 오랜 세월 동안 이름을 간직하고 문화재로 지정받기까지엔 그의 고집이 가장 큰 바탕이 되었다. 해마다 정월 대보름이면 굿판을 열어 좌도 풍물의 진수를 널리 알리고 우리 굿 가락의 흥과 신명을 풀어냈다. 그의 젊은 시절은 열정과 힘으로 넘쳐났지만 고단한 삶이기도 했다. 더 이상 동네 사람들의 호응을 모아내지 못한데다 살림마저 망가지자 그는 남원 보절로 생활터전을 옮겼다. 그러나 그런 그에게 굿판은 생명이었고 늘 그와 함께 있었다. 임실 핑봉농악을 되살리고 보급하는 일이라면 그는 만사를 제치고 필봉을 찾았고 굿을 배우겠다고 찾아오는 젊은이들을 물리치는 법이 없었다. 때마침 70년대 후반부터 서서히 불어닥친 전통문화에 대한 관심과 함께 많은 젊은이들이 그를 찾았다. 해마다 그에게 직접 풍물을 전수받아 지금전국 각지에 흩어져 화롱하는 사람들의 수는 매년 3,000여명을 넘었다. 그것은 곧 호남좌도굿의 법통을 다시 세우는 일이기도 했고 크게 보아서는 사려져 가는 전통을되살리는 일이었따. 그는 그를 찾아드는 젊은 일꾼들에게 ‘굿은 푸지게 쳐야’ 한다고 가르쳤고 그것은 단지 기량으로 치는 굿이 아니라 땅과 삶 속에서 울려나는 소리에 대한 깊은 애착이기도 했다. ‘푸지게’치는 그의 굿은 그가 평생 한 번도 삽과 괭이와 지게르 손에서 놓아본 적이 없는 농사꾼의 삶 속에서 배어났다. 농사일의 신명을알고 그 신명을 굿으로 풀어냈던 그의 가락은 많은 사람들에게 가공되지 않은 감동과 정신을 일깨웠고 그런 그에게 그런 제자들은 ‘이 시대의 농사꾼’이라는 마지막 헌사를 바쳤다. 달인의 경지에 이르렀다는 그의 부포놀음은 풍물굿을 휘어 잡으며 훨훨날아 사람들은 그의 굿을 보며 덩달아 신명속에 빠져 들었다. 그의 부포놀음이나 잔재주를 걸러낸 뼛속 깊이 박히는 그의 정제된 쇠가락은 독창적인 예기였다. 맑고 깊이 있다 쇠가락 소리를 늘상 몸에 얹고 다녔던 그는 이제 짧은 생애를 마쳤다. 편안하고 푸짐한 그의 가락을 이제는 들을 수 없다. 그러나 그의 굿은 여전히 끝나지 않았다. ‘스승님의 못다한 굿을 잇겠다’라는 패기 넘치는 제자들이 전국각지에 흩어져 그 가락을 잇고 잇는, 그의 아들들도 그의 뒤를 이어 그가 못다한 일들응ㄹ 해내리라는 기대는 안타까움속에서도 희망을 준다. 갑자기 왼쪽 가슴을 통증을 호소하며 병원에 입원한지 4일 만에 끝내 죽음과 맞서다 신기의 쇠를 놓고 세상을 떠난 그는 이제 그의 고향마을 필봉농악 전수관이 바라다 보이는 곳에서 지금도 그 푸진 쇠가락으로 이시대의 상쇠가 되고 있을지 모른다. 좌도풍물 상쇠 진안 중평마을 김봉렬 필봉굿의 상쇠 양순용 선생이 세상을 떠난지 이레가지나고 또 한사람의 상쇠가 세상을 떠났다는 부음이 전해졌다. 중평굿의 노솽쇠 김봉열 할아버지가 여든해의 고단한 삶을 마치고 세상을 떠난 것이다. 진안군 성수면 도통리 중평마을의 김봉열 할아버지는 그의 아버지 할아버지가 그랬던 것처럼 여든 해 세월을 꼬박 이땅을 일구고 새벽 기침소리 묻으며 살아온 본토박이다. 올해 나이 일흔여덟 살인 그는 선조 대대로부터 지켜온 탯자리에서 평생 일구어온 땅만 바라보며 세월을 읽어온 ‘농투성이’지만 예부터 물림해온 중평부락의 <중평굿> 상쇠노릇을 쉰 해가 넘도록 해온, ‘쇠&#51385;이 봉렬 양반’으로 더 널리 알려져 있었다. 우리 가락을 연구하거나 배우겠다고 나선 사람들 사이에서는 이미 모르는 이가 없을 정도로 그는 자타가 인정하는 좌도 풍물 쇠가락의 명인이었다. 그는 어렸을 적부터 우리가락에 남다른 관심을 보였다. 아버지의 기질을 물려받아 양철때기만으로도 제벚가락을 흉내내며 재능을 보이던 그를 보고 동네 어른들은 ‘벨일도 다 있다’면서 아예 동네 아이들에게 굿을 가르칠 양으로 진안 백운면 주천에 산다는 이름난 상쇠 김인철을 마을로 데려왔다. 그의 유일한 스승 김인철로부터 꼭 이레를 배우고 그 봉렬양반은 중평굿을 이어갈 제목으로 키워졌다. 김인철로부터 본격적으로 쇠를 배운 그의 호남좌도 가락은 윗놀이의 기교가 뛰어나고 밑놀이인 굿가락에 잔가락이 적어 담백하고 빠른 특징을 지니고 있었다. 그가 풀어내는 가락은 모두 서른 세 가락으로 노적굿-질굿-술굿으로 이어졌고 여기에는 그의 여든 해의 만고풍상이 서린 삶이 고스란히 배어있었다. 타고난 재능과 쇠가락에 스스로 미쳤던 그는 스물대여섯살부터 중평굿 상쇠를 맡은 이후 한 번도 그 자리르 뺏기지 않고 마을의 굿을 지키며 좌도굿의 원형을 꿋꿋하게 지켜며 살아왔따. 대부분의 풍물패들이 그랬던 것처럼 전국 각지를 돌아 다니면서 풍물을 쳐 벌어 먹고 사는풀물잽이들을 뜬쇠라고 하고, 마을에 눌러 앉아 살면서 마을굿만을 쳐온 풍물잽이를 두렁쇠라 하는데 김봉렬 할아버지는 두렁쇠 중에서도 상 두렁쇠인 셈이다. 같은 대의 치배들이 먼저가고 그가 애써 가르친 솜씨 좋은 잽이들까지 죽은 뒤 중평굿은 그를 찾아오는 사람들을 가를칠 때야 판을 벌일 수 있었지만 그는 그마저도 썩 신명나 하지 않았다. 세월은 변해가고 사람들이 동네를 떠나가 굿판을 잊어 가면서 동네굿은 사라져 갔고 이때 그는 일생에 가장 큰 좌절을 겪어야만 했다. 그가 이제 굿도 끝났다고 생각했을 때 다시 세상이 변해가기 시작했다. 입에서 입으로 전해진 그의 중평굿을 배우고자 ‘여름이고 시한이고’ 대학생들이 찾아들기 시작했고, 그는 다시 튼튼한 재목들을 가르치는 일에 신며을 다할 수 있었다. 쇠를 잡으면 언제난 어린아이가 되어 활짝 웃던 그의 쇠가락은 이제 다시 청할 수 없다. 쇠를 잡으면 어린아이처럼 빠져들어 ‘지가락에 지가 미친’ 그는 평생을 그토록 살아있는 신명난 굿판으로 이어갔다. 속된 마음에 때묻히지 않고 좌도 가락을 고스란히 이어온 ‘좌도 풍물 상쇠 김봉렬 할아버지’는 이제 쇠를 놓고 노환으로 세상을 떠났다. 우리는 이제 그의 가락을 들을 수 없지만 평생 동안 한번도 고향따을 떠나지 않았던 중평마을의 두렁쇠는 그가 그토록 애닯아 했던 먼저간 치배들과 함께 영원한 판굿을 벌이고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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