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5.10 | [문화시평]
판깨기의 연극 미학
창작극회의 <AD 313> 공연을 중심으로
글/김길수
(2004-02-10 10:41:52)
황금 휴일, 무대 공간 마저 잠식하며 쭈구리기를 마다않는 전주 관객들! 초 만원인 창작 소극장의 열기는 달콤한 스파게티로 이미 인식 능력과 감각 능력이 마비된 오늘의 감상 패턴, 이에 대한 탄식과 우려를 일시에 회석시켜 놓는다. 역사를 관통하고 시공을 초월하는 상상의 에너지가 좁은 무대 공간에서 창출되고 있음은 연극만의 고유한 매력이 아니고 또 무엇인가!
연극판은 공연 초입부터 레슬링 판으로 변용된다. 고구려 주류왕과 낙랑태수가 전쟁을 벌인다. 이들의 전쟁은 웅장한 스펙터클을 방불케 하는 대 집전이 결코 아니다. 상반신을 드러낸 두 레슬러들이 외침과 욕설을 내뱉으며 거칠게 싸우며 나뒹군다. 격렬한 부딪침, 살기어린 눈빛, 속도감 넘치는 음악, 창작극회의 연극 <AD 313>(박재서 작, 조민철 연출) 공연은 초입부터 권력가들의 파워 게임을 질펀하게 풍자한다.
왕들의 이미지가 철저히 격하된다. 각종 쌍스런 욕설이 이들의 입에서 터져 나온다. 이들의 몸에 걸친 목욕탕 싸우나 복장, 아무렇게나 내뱉는 무책임한 듯 한 언어와 행위, 지치면 뒤로 나자빠지고 기분 나쁘면 이들은 또 다시 한 판을 벌인다. 마음 꼴리는 대로 그리고 스트레스만 쌓이면 이들은 저급한 육체적 가학 행위를 벌인다. 심심하면 동물적인 자위 행위를 주문하고 왕비와의 이불 유희를 즐긴다. 용두질은 다반사이다. 섹스, 쾌락, 똥사기, 싸우기, 욕지거리하기, 이런 이들의 저급한 삶, 형이하학적 판놀음의 일환이라 할 수 있는 만남이 고구려 왕과 낙랑태수의 만남일 뿐이다.
고구려 군부의 억눌려 왔던 힘을 풀어 헤치지 못해 안달이다. 호동은 그를 부추기는 일부 군부와 결탁한다. 낙랑을 쳐부수려 하고 이를 통해 이들을 왕자와의 만남, 이는 호동은 야욕을 챙기려는 호동의 요구를 마지 못해 받아들인다. 이들이 정사 장면이 춤으로 재연된다. 거칠고 조야한 성행위가 상징적인 육체 언어로 실현되다. 한 번의 기괴한 만남은 뒤이어 뜨거운 연인의 만남으로 이어진다. 이들의 애매한 정사 폼은 아름다운 유희와 짐승들의 교미 이미지 사이를 오고간다. 인간의 인간다운 만남이 거부되고 마치 어린애들의 빠끔살이 유희가 이들의 육체 언어를 지배한다.
낙랑공주는 호동의 청에 따라 자명고를 찢는다. 낙랑은 패망한다. 그러나 지켜져야 할 공주와 호동과의 약조는 일시에 파괴된다. 공주는 전리품으로 전락한다. 사랑은 와홰되고 그 쓰디쓴 절망과 배신의 그림자가 맴돈다. 그 결과는 처참한 근친 살해이다. 낙랑 태수, 딸이 군부의 전리품이 되고 유희와 쾌락의 대상이 되는 것을 원치 않는다. 아버지가 딸을 살해할 수 밖에 없는 절망의비극, 이 비극은 호동과 고구려 주류왕의 비극으로 이어진다. 고구려 왕, 그 스스로 선왕을 살해하고 왕권을 차지하지 않았던가! 이제 호동이 자신을 해하려 할지 모른다는 불안, 여기에 왕비가 그 불안을 부추긴다, 호동의 반대파, 호동을 제거하라고 상소가 빗발친다. 호동, 전쟁을 승리로 이끌었지만 잡혀서 문초를 당한다. 호동을 죽이고자 하는 왕비 일당의 살인 유희가 한판의 춤으로 벌어진다. 그들에겐 그 춤은 한없이 즐겁다. 그러나 그 순간 순간이 호동에겐 피를 말리는 순간이다. 죽음이 서서히 다가오는 숨막히는 순간이다. 이 긴장의 순간, 숨막히는 순가, 그러면서 유희의 순간이 관객의 감성과 이성을 강타한다.
호동은 마침내 죽은 성왕의 유령이 휘드르는 칼에 의해 죽임을 당한다. 이미 시공의 한계가 파괴되어 있고 현실과 상상의 경계가 무너진 마당인지라 이런 비현실적 행위는 약간은 껄끄럽지만 그런 대로 통용된다. 죽은 선왕, 감춘 얼굴의 흰 신사복, 블랙 라이트에 의한 또 다른 초 현실적 이미지, 초 현실 이미지가 현실의이미지를 지배하고 간섭한다. 이는 연극이기에 가능하리라. 호동의 죽음은 분명 비극이다. 그의 죽음, 칼을 휘둘러 아들을 죽여야 하는 왕 주류의 딜레마, 살려달라는 호동의 간절한 호소, 이는 관객을 사로잡기에 부족함이 없다. 주저함, 딜레마가 극에 달할 때 선왕이 나타나 칼을 휘두른다. 호동 힘없이 쓰러진다. 핀 조명, 죽은 시신, 이 때 관객의 청각 신경을 강타하는 노래가 흘러 나온다.
이 음악은 이 연극의 주제 음악인지도 모른다. 잠깐 살펴보자. “두껍아 두껍아 / 눈 불거진 두껍아 에야디야 쳐 죽일 놈들 원래 여긴 우리집 바다 건너 느집가라 / 에야 디야 쳐 죽일 놈 / 부모 형제 처자식 / 못 먹어도 오순도순 에야디야 쳐 죽일 놈들 / 헐벗어도 오순도순 / 진흙탕 길 시궁창 / 에야디야 쳐 죽일 놈들 똥파리 구더기 / 보리고개 포도청 / 에야디야 쳐 죽일놈들... 지극적인 분위기, 죽음의 비장함, 냉소와 야유성 노래 가사, 내용과 형식의 불일지, 이는 판깨기의 미학이다. 이는 부조리 연극의 엑기스이다.
기존 기득권을 누리기 위해 벌였던 왕들의 작태, 이에 저항하려는 군부의 또 다른 딧걸, 허구를 또 다른 허구로 대항하려는 형태, 극작가 박재서의 눈은 이를 과거 역사적 사건을 빌어 고발하려 한다. 고발의 포인트는 역사물을 단순히 반영, 비판하는 선에 머무르지 않는다. 형식과 내용의 불일치, 주는 것과 받는 것의 불일치, 언어와 행위의 불일치, 이 연극 양식들이 오늘의 현대판 부조리를 연상케 한다는 점에서 이 공연은 판깨기 미학의 오랜 파장을 드리운다.
이 연극의 주요 재료들인 욕설과 외침, 단순한 부딪침, 메아리 없는 또 다른 행동과 그 응전, 이는 오늘의 신세대 언어 문법이자 부조리 연극 문법과 그 궤적을 같이 한다.
호동과 낙랑의 춤, 이들이 소꿉놀이 유희, 볼거리도 있으면서 그것의 비유적 의미가 삶의 경박함과 패러독스를 회화시켜 나갔는가에 대해선 더 욕심을 부려야 할 판이다. 두 왕들이 핀 조명으로 서로 내통하고 밀약을 추진하는 헤프닝, 양극성을 일깨우는 대립된 무대 구성, 이는 교과서 적인 무대 구성이다. 싸움판, 화해의 공간, 사냥터, 정사공간, 밀약과 내통, 음모가 벌어지는 공간, 이런 다양함을 텅빈 무대 공간의 설정으로만 완벽하게 실현시켰다고 말하기는 힘들다. 다양성, 비유성, 상징성, 이는 좁은 무대 공간이 관객의 상상력을 이끌어내기 위한 기본 무기이다. 혼신의힘을 다한 정진권, 임형택의 격투이미지, 이는 박수를 받을 만 하다. 인간 신체 유희 무궁무진함을 감안하다면 그리고 다양한 볼거리와 비유적 에너지가 마지막 판깨기의 과정에서 도출되었다는 금상첨화이리라!
공주의 북춤과 북소리, 온 백성들의 가슴과 영혼을 화끈거리게 하며 뜨거운 우국충정을 불러 일으키며 줄 소리 미학과 춤사위 미학을 요구한다면 이는 지나칠까? 여기서 감상층은 그녀의 북춤 사위에 완전 녹아웃 되어야 한다. 호동왕자와 공주의 산골 유희 장면! 확실한 볼거리, 가장 순결하고 가장 원초적이며 가장 인간다운 이미지로서의 이들이 춤판을 구성할 수도 있지 않을까? <꽃신>이라는 창작극회의 저력을 감안한다면 이런 주문은 당연하다. 또 하나의 껍질을 벗을때가 바로 지금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