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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5.10 | [세대횡단 문화읽기]
할리우드 영화 속마음 훔쳐보기 김지석의 미국 영화 읽기 미국인이 뽑은 영화 <카사블랑카>
문화저널(2004-02-10 10:46:16)
할리우드 영화 이야기를 하면서 <카사블랑카>라는 작품을 선택한 여러 가지 이유 중의 하나는 1981년 1월 미국의 CBS방송에서 인기와 권위 있는 시사 프로그램인 ‘식스틴 미니츠(Sixteen minutes)'의 설문조사에 의해 미국인들에게 역사상 가장 위대하고 완벽한 영화로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나<벤허>를 제치고 뜻밖에도 <카사블랑카>가 압도적인 표 차이로 1위로 조사되었는데, 학자나 평론가들이 내린 결론은 이 영화가 미국 영화의 고전적 스타일의 전형들을 고스란히 담고 있고 미국인의 이데올로기나 정서 같은 것들을 모두 담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작품을 선정했는데 이 영화를 가지고 미국 영화에서 주로 드러나는 이데올로기나 정서 등의 부분들에 대해서 설명을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아메리칸 드림 - ‘약속받은 땅’의 신화 일반적으로 미국 영화를 보면 어떤 면에서는 정서가 우리하고도 조금은 비슷한 면이 있습니다. 우리 한국영화의 정서적 특징을 '익명성' 이라고 할 때, 해방 이후에 우리 나라에서 나왔던 영화들을 쭉 살펴보면 이상하게 한국 관객들이 영화 속에서 익명의 삶을 사는 등장 인물들을 굉장히 선호혼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미워도 다시 한 번>이 보여주는 숨어 사는 영성이 그렇고 <칠수와 만수>에서 등장하는 주인공은 이데올로기적인 문제로 숨어지내는 인물이지요. <서편제> 역시 그런 관점에서 해석이 가능합니다. 결국 그런 임눌들이 가지는 고독감, 외로움 등이 관객들이 정서에 아주 잘 맞아 들어갔다는 결론을 내릴 수 있습니다. 그런데 미국 영화를 보면 그런 경우가 상당 부분의 영화에 굉장히 많이 나옵니다. 여기서 우리는 왜 그러한 인물이 미국인들이 선호하는 유형의 인물인가 하는 의문을 갖게 됩니다. 이에 대한 답을 얻기 위해서는 아메리칸 드림을 먼저 이해해야 합니다. 흔히 아메리칸 드림이라고 하면 ‘호레이쇼 알저(Horatio Alger)의 신화’ - 아무 것도 없는 상태에서 맨손으로 시작해서 부와 성공을 이루는 인물들, 누구나가 사회적으로 성공할 수 있다는 꿈 - 를 생각하게 되지만 사실 아메리칸 드림이란 그보다 더 광범위하고 포괄적인 개념입니다. 크게 세 가지로 나누어 보면 ‘미국적 평등, 미국적 민주주의, 새롭게 약속 받은 땅’을 말하는데 특히 ‘새롭게 약속 받은 땅’ 이라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메이플라워호를 타고 유럽에서 아메리카 대륙으로 건너올 때 그들이 가진 최대의 꿈은 자기 땅을 가지고 농사를 짓거나 목축을 하거나 하는 소위 ‘전원의 꿈’이 가장 큰 꿈이었습니다. 그런데 그것은 아메리카대륙에 그들이 정착하는 과정을 거치면서 변하게 됩니다. 자기의 땅을 갖기 위해 유럽에서는 많은 사람들이 자꾸 건너와 이젠 동부에서 서부로 새로운 땅을 찾아 이주하게 되는데 서부에는 이미 많은 인디언들이 주인이었습니다. 이 과정에서 이들은 수 많은 토착 인디언들의 땅을 차지해 나가는데 그에 비례하는 많은 인디언들의 죽음이 이 사람들의 잠재의식 속에 공포나 악몽으로 자리잡게 되는 것이지요. 그런데 그 죄가 거기에서 끝나지 않고 또 하나의 죄를 짓게 되는데, 인디언들로부터 차지한 넓은 땅이 목화산업 등과 같이 많은 일손을 필요로 하게 되자 흑인들을 노예로 잡아오게 되는 것입니다. 이로 인해 이들은 흑인의 백인에 대한 보복을 두려워하는 또 하나의 공포·악몽을 안게 됩니다. 그래서 흑인과의 화해를 이야기하는 문학 작품들도 많은데 <허클 베리핀의 모험>이 가장 대표적입니다. 또한 20세기초부터 본격적으로 미국에서도 산업화가 이루어지면서 점차 튼 도시가 생겨나고 많은 사람들이 일자리를 얻기 위해 도시로 몰려가게 되는데, 언제나 갇혀있는 듯한 느낌을 주는 폐쇄된 공간의 도시 생활에서 폐소공포증이라는 새로운 악몽이 생겨납니다. 이와 맞물려 누구나 성공할 수 있다라는 호레이쇼 알저의 신화는 성공을 위해서는 무슨 짓이든지 해도 된다는 가치관의 변질을 낳게 되고, 그 와중에서 많은 부작용들이 생겨나게 되는 것이지요. 이로인해 그들이 애초에 가지고 있던 청교도적 윤리나 가치관, 전원에 대한 꿈 이런 것들이 전부 하나 둘씩 무너져 내리고 악몽으로 변해 가게 됩니다. 오피셜 히어로 궁극적으로 보면 이 ‘전원의 꿈’은 ‘개인주의’와 아주 밀접한 관계가 있고 개인주의는 또 인민주의와 굉장히 밀접한 관계가 있습니다. 미국의 정치적 흐름을 크게 연방주의와 인민주의의 두 가지로 나눌 수 있습니다. 건국 후 처음엔 인민주의가 보편적인 정치적 흐름이었는데 이것이 중앙 정부가 강력한 통제를 가지면서 연방주의로 변하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연방주의는 중앙 중심의 정당정치를 주로 하기 때문에 대기업들과 결탁이 될 가능성이 많고 그러다 보니 소위 말하는 정경 유착이 많아지고 그래서 개인의 권리나 복지가 제한을 받는 경우가 많아집니다. 반면 인민주의는 중앙에서부터 내려오는 권력의 통제를 배격하고 정당정치를 싫어하는 것입니다. 어떤 집단을 이루어도 소규모 집단을 선호하게 되고 개인주의 성향을 띠게 됩니다. 이런 과정에서 산업화가 본격화되면서 인민주의가 사라지게 되고 오늘날의 연방주의가 자리를 잡게 되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많은 미국인들이 지금은 사라져 버린 전원의 꿈에 대한 향수를 가지는 것처럼 인민주의에 대한 향수도 가지고 있고 현재는 껍질만 남은 개인주의에 대한 향수도 굉장히 많이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많은 작품에서 개인주의를 경향을 보이는 주인공들을 선호하게 되는 것이지요. <카사블랑카>의 릭이라는 주인공을 관객들이 선호하는 이유의 근원을 따라 올라가다보면 거기까지 가는 것입니다. 연방주의와 인민주의를 대표하는 집단의 리더로서의 역할을 하는 사람과 집단에 소속되기를 거부하고 혼자서 살아가는 것을 좋아하는 유형의 인물들이 미국 영화 속에서 많이 대립하기도 하고 같이 등장하기도 하는데 이와 같은 미국 영화 속에서의 남자 주인공의 유형을 크게 아웃-로 히어로(outlaw hero 체제 밖의 영웅)와 오피셜 히어로(official hero 체제 안의영웅)로 꼽을 수 있습니다. 연방주의나 어떤 집단의 선호하는 영웅, 즉 어떤 무리들을 이끌고 적과 대항하는 데 앞장서서 적을 물리치고 마침내는 승리를 쟁취하는 리더가 오피셜 히어로이고, 지나가다 우연히 위험에 빠진 집단을 발견하게 되고 그 위험에 빠진 집단의 어떤 매력적인 여인에 끌려 그 집단을 구해 주고는 어디론가 홀연히 떠나 버리는 유형의 인물이 아웃-로 히어로의 아주 전향적인 예입니다. 미국 영화를 보면 이런 두 유형의 인물을 굉장히 많이 발결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 두 유형의 인물이 등장하는 영화에는 반드시 이 둘 사이에 여자 하나가 있어서 삼각 관계가 이루어지고 결국은 아웃-로 히어로가 양보하고 여자는 항상 오피셜 히어로와 결혼을 하고 살게 됩니다. 언제나 개인주의자인 아웃-로 히어로에게는 고독이 따라 다니는 그래서 멀리 떠나가면서 낭만적인 음악이 흘러나오는 그런 류의 영화가 굉장히 많다는 것입니다. 미국 영화를 보면 이런 것처럼 오피셜 히어로와 아웃-로 히어로의 대립과 갈등 등의 이야기들 그리고 여자와의 로맨스가 굉장히 많이 나오는데 <카스블랑카>라는 영화가 여러 가지 측면에서 가장 미국적인 작품이고 미국이 대표할 만한 작품이다라고 하는 이유는 설명드린 것 외에도 몇 가지 더 있습니다. <카스블랑카>와 미국의 이데올로기 미국 사회를 다양한 인종이 모여 하나의 가치관과 이상을 같이 공유하는 사회라 하여 멜팅포트(melting fot, 용광로)라 하는데 이 <카스블랑카>는 헝가리 출신의 감독과 스웨덴 출신의 배우 잉글리트 버그만, 그리고 노르웨이, 러시아, 프랑스, 오스트리아, 독일 등의 온갖 국가의 출신 제작진들이 모여 만들어져 이 작품이야말로 멜팅포트의 전형이다라고 할 수 있습니다. 또 하난의 정치적인 문제인데, 미국은 20세기 초 2차 세계대전을 전후해서 불간섭주의(고립주의)의 고수와 포기에 대한 갈등이 일어나는데 그 시점에 나온 작품이 바로 <카스블랑카>입니다. 미국인들이 우상으로 생각하는 인물 유형을 릭인데 릭은 원해 자신으 의도와는 관계없이 독일과 유럽의 전쟁에 끼여들게 되는 것이죠. 그래서 이 작품은 말하자면 미국의 정책적 전환점이 되는 작품이라는 이야기를 합니다. 다음으로 형식적인 면에서 이 작품은 미국의 고전적 스타일의 전형을 담고 있다는 점입니다. 고전적 스타일의 핵심은 미장센(mise-en-scene 무대 위에서의 배치)과 편집 두 가지로 설명할 수 있습니다. 미장센이란 카메라 앞에 무엇을 어떻게 놓을 것인가. 소품 하나라도 나름대로 살아있는 연기를 하고 있다고 생각하면 그것이 곧 미장센이 되는 것입니다. 고전적 스타일의 미장센은, 주인공은 언제나 중앙에 나와야 한다는 중앙화(centering)라는 의미와 함께 세트, 소품, 조명, 움직임등의 것들이 다 배려가 돼 하나의 완벽한 의미체를 만들어 낸다는 것입니다. 또 하나, 영화를 흔히 편집의 예술이라고 합니다. 장면과 장면을 어떻게 연결하느냐 하는 것으로 새로운 의미를 만들어 내는데, 편집에서 지켜져야 할 중요한 핵심은 연속성(continuity)인데 장면 장면들의 연결에서 지켜지는 움직임의 연속성으로 행동의 일치나 시선의 일치 등을 말할 수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미장센의 중앙화나 편집에서의 연속성이라는 개념의 궁극적인 목적은 동일화(identification)에 있다는 것입니다. 영화를 보는 관객으로 하여금 ‘내가 마치 영화 속의 주인공이 된 듯한 느낌’을 갖게 하기 위해 그와 같은 기법들을 사용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 외에도 장면의 구도나 한 화면에 보여지는 인물들의 배치등의 많은 고전적 기법들은 미국 영화의 이데올로기와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이용된다는 것입니다. 미국 영화의 여성과 인종에 대한 세계관 헐리우드 영화에서 보여지는 가부장적인 이데올로기와 가족이나 여성의 위치를 살펴보면, 일반적으로 미국 영화 속에 등장하는 가족들의 이미지라고 하는 것은 사회 부조리나 모순들이 엄폐되어지는 공간으로 많이 보여집니다. 그래서 직장에 나가면 굉장히 고생을 하지만 집에서는 성실하고 따뜻한 아버지의 이미지를 가진 영화들이 참 많습니다. 이러한 구조 내에서 드러나는 여성의 이미지라고 하는 것은, 우리나라도 별 차이는 없지만 특히 할리우드 영화의 경우에 있어서는 여성을 매우 비하시키는 반여성적입니다. <카스블랑카>에서 엘자가 굉장히 신비롭고 낭만적으로 보여지는 것도 쉽게 말해서 누구의 시선을 충족시켜주는가 하면 남자의 시선을 충족시켜 주는 것입니다. 대개 미국 영화에서 등장하는 여성의 이미지를 분석해볼 때, 가장 긍정적인 이미지라고 볼 수 있는 어머니의 이미지인데 그것도 세상 모순을 혼자 다 떠안고 있는 듯한 이미지입니다. 그리고 가장 많이 등장하는 것이 남자를 파멸로 이끄는 요부의 이미지이고 독립적인 여성을 별로 없습니다. 독립적인 여성도 가끔 등장하는데 그 여성이 온갖 노력하면서 사회 속에서 성공을 한 궁극적 목표가 어디에 있는가 하는 것을 영화 끝에 가서 보게되면 굉장히 허탈해집니다. 여주인공이 힘겹게 성공을 해서 얻는 것은 ‘나는 그 남자와 결혼할 거야’식이 됩니다. 결국 자기가 사랑하는 남자를 얻기 위해서 그렇게 열심히 했다는 결론 밖에 없는 것이지요, 심리학 용서 가운데 ‘훔쳐보기’라는 게 있습니다. 대부분 남자가 여자를 훔쳐 본다는 것인데, 영화도 마찬가지로 남자의 훔쳐보기 심리를 충족시켜주기 위한 여러 가지 기법들이 영화 속에 쓰이는 것입니다. 훔쳐보기의 전제 조건은 내가 드러나지 않는 것인데 영화를 상영하는 극장의 어두운 구조 자체도 훔쳐보기 적합한 조건을 가추고 있다는 것이고, 또 시선을 남자의 눈에 맞추게 됩니다. 카메라 기법 가운데 시선과 카메라의 위치가 동일한 것을 아이-레벨이라고 하는데 남녀 주인공이 같이 등장하게 되면 대개의 경우에 여자의 모습은 약간 높은 곳에서 잡고 있습니다. 반면 남자의 모습을 잡을 때는 낮은 곳에서 잡느냐면 그것이 아니고 바로 아이-레벨로 잡는다는 것입니다. 곧 관객들로 하여금 남자의 시선에 동일하게 만들어 버린다는 것이고 그래서 언제나 여성은 누군가에 의해서 보여지다는 것입니다. 이런 것외에도 남성이 여성에 대해 가지고 있는 신비감 등의 관념적인 것을 만족시켜주기 위한 기법들이 많이 사용되고 있고 그 외에도 약간 변태적으로 영화 곳곳에 레즈비언적 장면의 삽입해 훔쳐보기 심리를 충족시켜주고 있습니다. 이런 것처럼 할리우드 영화에서는 여성이 이미지가 부정적으로 보여지거나 신비롭게 보여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인종차별이 문제는 굉장히 심각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인종 차별과 다른 나라에 대한 왜곡된 묘사는 각 인종들에 대한 이미지를 고착화시키는 결과를 낳게 되었는데 문제는 할리우드 영화가 전 세계로 나가 상영되면서 그 왜곡된 이미지가 보편화 된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할리우드 영화 속에서 나타나는 아랍인들의 이미지는 딱 두 가지, 남자는 강도 아니면 도둑이고 여자는 배꼽춤 추는 여자, 이 이상이 없습니다. 한국인은 어떨까요, 기대를 하지 않는 게 좋겠지요, 정말 중요한 문제는 미국내에서도 그렇지만 일반적으로 유색인종이 인종차별을 받고 있구나 하면서도 그 유색인종 가운데 아랍인들처럼 우리 한국사람이 포함되고 있다는 사실을 까맣게 잊고 있는 것입니다. 할리우드 영화에서 한국사람이 왜곡되게 묘사될 때, 그것을 고쳐라 라고 외칠 줄 알았지 다른 지역 사람들에 대해서 자기 자신이 곡해하고 있다라는 사실을 잊어버리고 있다는 것입니다. 할리우드의 이데올로기 미국 영화가 일반적으로 보여주는 이데올리기라고하는 것은 ‘미국적인 것’이라고 만 생각할 수 도 있습니다. 그렇지만 대개의 경우 그것으로 끝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미국 영화에서 흔히 ‘합의의 이데올로기를 도출한다’라는 이야기를 하는데, 미국의 지배 이데올로기 즉 자본주의 이데올로기 이외의 이데올로기가 영화 속에서 묘사가 될 때에는 겉으로는 화합을 해야 되다는 식으로 말하지만 궁극적으로 그것은 타도의 대상이고 제거의 대상이다라는 것을 끊임없이 관객들에게 심어준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서부영화에서 인디안들에 대한 묘사들이 언제나 잔인하고 잔혹하게 묘사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는 것이지요, 가끔은 인디안을 긍정적으로 그리고 있는 경우가 전혀 없는 것은 아니지만 비율로 따져서 0.001%도 않된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언제나 자본주의 이데올로기나 미국의 지배 이데올로기를 옹호하기 때문에 영화가 전 세계의 외화 시장의 80~90%를 장악하고 있다는 사실을 감안한다면 그것이 미치는 여파가 얼마나 큰 것인가 하는 것은 더 이상 말할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왜 미국 영화가 해외에서 직배를 하기 위해서 각 국가들과 협상을 할 때 영화산업계 사람들보다 국무성이 앞에 나서서 시장 개방을 하라고 하는가를 알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영화라고 하는 것은 산업이기도 하지만 하나의 문화인데 어떻게 문화라는 것을 마음대로 열어라 말아라 할 수 있느냐 하는 것이지요. 그것은 영화가 한 나라에 들어가서 파급되는 효과가 너무나 엄청나다는 것을 알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할리우드 영활 보 f때도 때에 따라서는 겉으로 보여지는 휴머니즘과 같은 것 이면에 감추어진 그 숨겨진 이데올로기를 잘 읽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포레스트 검프>라는 영화를 볼 때, 많은 분들은 감동을 받고 좋은 영화라고 생각하게 되는데 사실 이 작품은 철저히 보수적인 시각에 의해서 만들어졌습니다. 60년대의 학생운동이나 청년문화에 대해서 너무나 배타적인 시각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 작품은 60년대의 청년문화를 완전히 무시하고 있는 것이지요, 그렇지 않은데 말입니다. 다시말해 할리우드 영화가 내세우는 정의, 선 등의 밑에 깔려 잠재되어 있는 그 자본주의의 지배 이데올로기에 대해서 늘 깨어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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