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5.10 | [문화칼럼]
약무호남 시무국가
글/문정인
(2004-02-10 10:48:29)
근간에 아서 호남인들은 물론이고 외지에서까지 호남에 간하여 물어오는 사람이 많다. 그 요지는 호남이란 명칭은 호수의 남쪽에 위치하고 있는 뜻인데 어느 호수를 기준으로 했느냐, 호남 좌도·우도는 어느곳을 분기점으로 나눈 것이냐, 왜 지도상으로 오른쪽을 좌도라 하고 왼쪽을 우도라고 하는가이다.
약무호남 시무국가(若無湖南 是無國家)라고 해서 만약에 호남이 없으며 이는곧 국가가 없습니다 라고 하는 말은 호남인들이 만든 말인가 그렇지 않으면 어느 역사 기록 속에 정사로 기록되어 잇는 말인가 등등 많은 궁금증을 물어온다. 필자도 전라도 태생으로 살아왔지만 누구에게서도 이런 궁금증에 대한 설명을 듣지 못했다.
호남이라는 명칭은 우리나라의 지명을 정할 때 중국의 지명을 그대로 인용하여 썼다니 호수와는 관계가 없는 것이나 호남 좌도·우도는 금강의 하류행선을 따라 정한 것으로 알고 있다. 좌우 명칭은 뒤바뀜은 임금님께서 설명하기 쉽게 하기 위하여 반대쪽을 바라다보고 있는 임금님의 좌편은 좌도 우편은 우도로 했다고 한다. 그래서 전라좌도수군절도영(절라 좌수영)도 우측에 잇지만 좌도로 부르고 해남은 좌측에 잇지만 전라 우수영으로 역사 속에 기록되어 있다.
약무호남 시무국가라는 글귀는 임진왜란 다음 해인 계사년(1953) 7월 16일에 충무공 이순신 장군이 지평(持平) 현덕승(玄德承)에게 보낸 서한문중의 한 구절이니 사연은 이러하다.
지금으로부터 404년 전인 임진년(1592년) 4월 13일 일본 왜군 15만명이 가또기요 마사와 고니시유끼나가의 지휘 아래 부산항에 쳐들어 오니 3일만에 부산이, 7일 만에 경상도가 19일만에 한양에 함락되어 버렸다. 선조 임금은 서둘러 함경도 땅 의주로 몽진을 가버렸고 온전하게 남은 땅은 호남 땅 뿐이었다. 경상수사 원균으로부터 몇 번이나 구원 요청을 받았지만 조정은 6일 후에야 전라좌도 수군절도영의 이순신 수사에게 출동 유서를 내렸다.(4월26일) 충무공은 5월 1일에 현 진남관 자리에 있던 진해루에서 작전회의를 열었다. 경상도 구원요청이 계속해서 오는데 어떻게 하면 되겠느냐고 물었다. 장수들이 말하기를 군사는 자기가 지녀야 할 지역이 있는 법인데 어설피 구하러 출동하였다가 이 지역마저 빼앗겨 버리면 어떻게 되겠느냐는 것이다. 그런데 약관의 정운 장군이 “나라를 구하는데 경상도 전라도가 어디에 있겠소. 나아가 싸우다가 이기면 다행이고 지더라도 사나이로서, 국록을 먹는자로서 하늘에 부끄러움이 없지 않소”라고 하였다. 가만히 눈을 감고 계시던 이순신 장군이 “내 처음부터 출동을 결심한 바나 너희들의 심증을 떠보기 위하여 회의를 가졌었노라”고 하였다고 전해진다.
5월 4일 새벽에 출동하게 되고 그날을 기리기 위하여 진남제 전야제 행사가 해마다 열리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하여 전라 좌수영 단독의 수군은 5월 7일 옥포 해전을 시작으로 함포, 적진포, 당포, 사천등의 해전을 승리로 이끌었다.
6월 4일 조선 수군 연합 함대를 편성하여 당항포, 율포, 한산도, 안골포 해전을 승리로 이끄니 이순신에게 본직인 전라 좌수사겸 경상, 충청, 전라 3도 수군 통제사의 첩지가 내리게 되고 여수는 통제영이 되었다. 이순신 장군은 출동시 마다 여수 통제영에서 보급품과 군사를 실어 나르는 불편을 없애기 위하여 산산도에게다가 출장소격인 진을 치고 그 내막을 지평 현덕승에게 보냈다. 서한 중에 실려 있는 것이 바로 ‘호남은 국가의 기둥이라 호남을 지키기 위하여 한 발짝 앞인 한산도에 진을 쳤습니다.’라는 대목이다
호신국가지보장 약무호암 시무국가 시이작일 진진간한산도(湖新國家之保障 若無湖南 是無國家 是以昨日 進陳干閑山島)(충무공전서 P388)
이 얼마나 호남인의 가슴을 뜨겁게 하는 말인가?
중앙 정부가 분산되어 있는 가운데 호남인은 이 충무공을 앞세우고 거북선 판옥선을 뭇고 병기를 제작하고 군량미를 자급자족 하면서 6년 9개월 전쟁을 승리로 이끌었다. 그래서 역사는 후일에 호남을 일컬어 충절의 고장, 의리의 고장, 애향, 문향이라는 최대의 찬사를 하여준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