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5.10 | [문화저널]
박남준 시인의 편지
첼로, 가을 밤은 깊어서
박남준(2004-02-10 10:50:41)
가을이 깊어갑니다. 며칠 문득 집을 떠났었습니다. 떠나 있던 그 길에 동해의 푸른 바닷가에도 가보았습니다. 끝없는 흰 파도가 사태처럼 밀려오는 모래사장에 우두커니 서 있기도 했고요. 그러다가 『좀머씨 이야기』라는 소설에서처럼 주위를 살펴보고 누군가가 보는 이 없다면 저 파도, 바닷속으로 걸어들어가 그만 사라져 버리고 싶다는 생각이며, 북으로 북쪽으로 이어진 해안을 따라갈수록 흰 빨래처럼 정결하게 걸려있는 오징어 건조대를 보며 나의 삶도 저처럼 푸른 바닷물에 씻어 세상의 바람 끝에 걸어놓고 싶다는, 그럴수만 있다면 하는 생각도 해 보았습니다.
그 생각 끝에 들던 또 한 생각, 듣지 말아야 될 소리를 듣고 강가에 나가 귀를 씻었다는 어느 대자연에 노니는 은자의 말을 듣고 가축의 물을 먹이려 강으로 나갔던 또 다른 이가 그 강물을 먹이지 않고 되돌아갔다는 요순시대의 이야기가 떠올라서 씁쓸한 웃음이 일었습니다.
돌아오는 길, 집을 나서기 전에는 눈에 띄지 않았었는지 산자락에 접어들다 나는 아 - 하고 발걸음을 잠시 멈추었습니다. 여기저기 감나무들이 잎들을 벌써 수북히 떨구어내고 푸르던 감들을 노을빛으로 물들여가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그래 깊어가는구나. 겨울이 머지 않았구나.
마당 가득 감잎들이 쌓여있었습니다. 떨어진 지 며칠된 것들, 낙엽 밟는 소리, 그 위를 지나면 밤바다의 머리맡에 아련히 들려오던 파도 소리가 따라 왔습니다. 손에 들었던 싸리비를 그냥 내려놓고 말았습니다. 낙엽 사이를 헤집고 개미들, 집게벌레, 작은 날벌레들 겨울 준비로 분주 했습니다.
지난 밤엔 솜이불을 덮고 잤는데로 자는 동안 한두 번은 깨어 이불을 추스리며 몸을 구부렸습니다. 나무를 좀 했어요. 마른 삭정이를 한 단 했는데 한 사흘은 군불로 지필 수 있겠어요.
밤이 깊어가요. 문 밖 소쩍새 소리 오늘은 목이 트였는지. 어젯밤에는 잔뜩 몸이 잠긴 소쩍새 한 마리 안간힘으로도 울어지지 않아 가슴 미어지게 하던데, 그치지 않는 밤벌레 소리 누구를 위한 노래인지 밖은 꽤 차가울텐데 저 소리 추위에 몸 떠는 신음 소리 아닌지 하는 생각이 들어요.
쟈크 오펜바하의 첼로곡 <쟈크리느의 눈물>은 이런 가을 밤이었을까요. 툭툭 이따금 떨어져 내리는 감 소리에 쿵 하고 가슴에 파문이 일어요. 감잎들 우수수 져내리는가 보아요. 발자욱 소리처럼 누구 이밤 산길을 더듬어 찾아올 이 없는데, 옛사랑의 창가 저만큼 길 멈추고 되돌아가던 밤길, 별빛에 하얀 억새꽃들 숨죽여 눈물짓던 그 가을 발자욱 소리처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