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킵 네비게이션


분야별보기

트위터

페이스북

1995.10 | [서평]
현실 정치를 풍자한 만화 슬라이드 보기 김상택 만평『10센티 정치』를 보고
글/ 박홍규 (2004-02-10 10:53:07)
“저는 만화에 대해 아무 것도 모릅니다.” 김상택 만평집『10센티 정치』의 도비라 다음장에 나오는 저자의 말이다. 만화가가, 그것도 잘 나가는 중앙 일간지 만편 작가가, 더욱이 일간지 중에서도 유독 1면에 만평 공간이 배려되는 특혜(?)를 받고 있는 그가 만화에 대해서 모르다니? 작가의 겸손일까? 아니면 현실 정치와 세인들의 지나친 관심으로부터 자유스러워지고 싶은 계산에서 였을까? 혹은 자신의 창작 자세에 대한 의지 문제였을까? 김상택의 만평은 만화라기보다 연극같다. 특히『10센티 정치』는 하루하루의 현실 정치의 세계를 실감나게 찍은 슬라이드를 HFFL는 것처럼 연극적이다. 작가는 상영되는 무대 주위를 맴돌다 결정적인 순가에 후레쉬를 터트리는 사진사와 같다. 어두컴컴한 세트장에서, 순간 터지는 후레쉬에 잡히는 여러 군상들. 화들짝 놀라며 일순 정지 되는 세계, 그 긴장되고 우스꽝스러운 세계를 그는 포착한다. 무소불위의 권력가와 정치인, 재력가들이 무방비 상태로 그의 후레쉬 빛에 노출된다. 희화화된 케리커쳐로, 벌거벗거나 분장된 상태로, 속 마음을 고스란히 내비친 겸언쩍은 상태로, 자신의 심경을 극대화해 던지는 컨셉으로. 보이지 않는 관객을 이에 즐거워 한다. 웃음이 터진다. 그러나 김상택은 이 짧은 몇 초의 간극이 더 이상 길어지길 희망하지 않는다. 무대의 테마나 결론에 대해 감동하거나 박수 쳐 주길 원치 않는다. 또다시 침침하고 불안한 연극은 계속된다. 연극이 끝난 뒤 등장 인물은 항의한다. 왜 하필이면 그 순간에 후레쉬를 터트렸냐고 김상택은 우리 시사·만화사에 특이한 필법과 감각을 가진 작가다. 사방 10센티의작은 만평 공간의 2차원 세계를 독특한 질감과 화면 구성으로 3차원의 이미지로 구축시켜냈다. 가는 펜선으로 직전을 교차시켜 만든 배경에 원든감을 주고 등장 인물 또한 단선이 아닌 여러 가는 선을 겹쳐 슬로우 모션을 보듯 화면에 긴장감과 생도감을 부여한다. 등장 인물의 케리커쳐 또한 직설적이다. 튀어나온 넓은 이마와 큰 입술, 간격이 넓은 양미 간을 자랑하는 김영삼, 큰 콧구멍으로 상징되는 김대중, 앞니 두 개와 쳐진 두눈으로 상징되는 김종필, 주걱턱의 오만 불손한 실세 최형우, 눈이 뻥한 눈치꾼 김윤환, 팬티바람의 이기택 등 그의 손을 거친 인물들은 표정만 봐도 ‘내심을 알 수 있을 정도로’개성적이다. 그리고 우리의 지도층 인사들은 소낙비 내리는 듯한 진흙탕 속에서 뒹굴며 싸우고 험담하며 아구다툼을 벌인다. 이게 우리의 현실 정치판이라고 아침마다 김상택은 10센티의 공간에 실어 풍자와 웃음을 배달해 주고 있다. 김상택의 시선은 항상 관객 속에서 무대와 무대 뒤에 꽂혀 있다. 관객은 보이지 않는다. 또한 무대 위에 국민이 올라가는 것을 원치 않는다. 국민이 주연됨이 아직 멀었음을 암시하는 것일까? 김상택의 만평은 현실 정치의 흐름에 대한 보편적 인식은 획득하지만 역사적 통찰력가지 성급히 드러내지는 않는다. 현실에 대한 풍자와 해학이 주는 웃음이 행복한 체험이 단 몇초의 감흥으로 끝나지 않고 잊혀지지 않는 감동으로 다가오길 신문 만평에 기대하는 것은 물일까? 그의 무대에 일반인이 주연이 되어 ‘스포트 라이트’를 받는 세상은 언제일까? 『10센티 정치』는 어느대학원생의 지적처럼 김영삼 문민 정부의 아픈 곳을 꼬집는 준엄한 역사서 였다는 사실을 인정함에도 불구하고 국민과 정치판의 별개인 것처럼 보이는, 국민이란 관객이 현실정치의 아수라판을 보면서 열받고 즐거워 하면서도 정치적 허무주의의 단면을 보는 아쉬움을 안겨준다. 또한 아쉬움만큼 김상택의 민첩한 순발력과 평형 감각, 그리고 무한한 만화적 상상력으로 확장되는 영역에 거는 기대 또한 어찌 크지 않을 수 있으리! 사실, 매일 배달되는 민감한 정치, 사회 문제를 직접 맛보게 하는 당일의 만평이 아니, 4년치의 만평을 묶어 놓은 책으로 볼 때는 신문 만평이 가지는 짜릿한 감흥을 감소시켜 팽팽한 긴장감이 희석되는 느낌이지만 김상택의 작품 세계를 꿰뚫어 볼 수 있는 새로운 기회를 제공해 준다. 우리 모습을 확인하기 위한 길잡이 김하기의 『마침내 철책 끝에 서다』 글/김판용 인간과 시간의 주종 관계를 사람들은 세월과 역사로 분리한다. 시간 속에 인간이 잠들면 세월이요, 인간이 시간을 주도하면 역사인 것이다. 그리고 역사의 구체적 실체는 문화다. 저 평면「문심조룡」은 문화의 문(文)을 汶또는 紋이라고 풀이하고 있다. 물 위의 돌팔매처럼 사람이 밝고 간 공간과 시간의 흔적을 말한다. 문화는 예술품이나 후대의 감상을 전제로 이루어지지는 않는다. 삶의 절실함에서 오는 사상(寫像)들이다. 그래서 분단은 역사이며 그와 얽힌 민족의 삶의 실체는 문화라는 절실함을 획득하는 것이다. 문화유산을 찾는 발길이 요즈음 들어 잦아지고 있다. 답사를 돕는 안내서들과 이를 뒷받침하는 사회 여건에 합궁 양상이다. 그러나 복고성(復古性)에 치우쳐 있다는 인상을 지울 수가 없다. 그 현장을 오늘을 살아가는 사람들과 연결시키는 대화의 장으로서 파악하는 보다 천착된 작업이 나와야 한다. 이런 현실의 토대와 더불어 답사 안내서의 필자는 그 대상(지역)을 다룰 만한 식견과 바른 관점을 제시할 수 있는 사람이여야 한다는 점도 중요시 된다. 이런 전제에서 분단기행 산문지『마침내 철책 끝에 서다』를 쓴 김하기는 남북으로 갈린 우리 민족의 피어린 현장을 균형감 있게 서술할 수 있는 적임자라는 생각으로 책을 펴든다. 젋은 나이게 김하기 만큼 분단의 아픔을 겪은 사람도 드물 것이다. 5·18과 더불어 받고 고초와 강제 징집, 그리고 탈영과 부림 사건 등에 연루된 수년 간의 옥살이 등 범상치 않은 그이 이력에는 분단이라는 밑그림이 항상 숨어 있다. 그가 말한 눈복이 많다는 이야기는 결국 고초가 남달랐다는 은유에 다름 아니다. 이 기행은 서쪽 최북단의 섬 백령도에서부터 시작된다. 군인들에게 티켓을 팔기 위해 떠나는 다방 아가씨와 인당수에 서린 심청의 전설을 연결시켜 결국은 ‘분단의 현실을 소경이 눈을 뜨듯 벗어나고 싶다는 간절한 바람같은 것은 아무나 품어낼 수 있는 상상은 아니다. 그리고 북녘의 장산곶을 바라보며 연상하는 몽금포 타령, 발목 지뢰가 묻혀 있는 철조망을 뚫고 굴을 따는 아낙네들의 억척스런 삶 속에 이미 분단은 없다고 말한다. 김포의 북단 조강나루의 죽은 물길과 애기봉까지 이어지는, 북한의 땅굴을 발견해내고야 말겠다는 무수한 시추공들을 보면서 느끼는 심회 또한 착잡하다. 그래서 임진강과 한강이 만나는 교하(交河)를 지나, 아무도 돌보지 않는 군사분계선상의 무덤들을 벌초하는 일부터 통일을 시작하자는 소박한 제안도 해본다. 이제 지구상에서 마지막 남은 분단국가의 모순을 그대로 둘러 썼던 사람답게, 미국인들이 긋고 구축한 3·8선과 휴전선에 대해 그네들이 ‘동양의 디즈니랜드’라고 감탄하며 관광 상품화하는 현실에 분노한다. 또 민통선 안의지명을 미국 이름으로 바꿔 놓은 저의에 대해서도 눈길을 늦추지 않는다. 그가 밝은 몇 개 통일촌 사람들의 삶의 모습 또한 그냥 지나쳐서는 안될 것들이다. 분단의 혜택을 누리고 있는 곳, 그래서 금강산 가는 철도가 다시 이어져서는 안된다고 강변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분단의 고통 때문에 조금이라도 고향 가까운 곳에서 살면서, 하루 빨리 통일이 와야 한다고 비원에 싸여 술을 벗하는 사람들도 있다. 정책적으로 조성된 마을에 땅을 일구면 진짜 땅 주인이 나타나다 빼앗아 갔다는 푸념들은 결국 자본주의 나라 어디에나 있는 전형이다. 새삼 말할 것도 없는 우리 일상의 분단 철조망이라면, 민통선 안에도 자본의 논리를 공기처럼 스며 들어 있다. 이 기행은 6개월의 그리 길지 않은 기간이지만 6·25이후 분단(휴전) 한반도의 가장 첨예하고, 가장 평화롭고, 가장 절망적인 시간이었다. 북한이 핵문제와 ‘서울 불바다’ 발언이래, 카터의 외교에 의한 남북 정상회담이라는 가슴 설레는 전기를 마련했고, 그리고 김 주석의 서세와 그 후에 일어나는 조문론에 대한 뜨거운 공안 정국이 그렇다 그래서 이글의 후반부로 가면 더 극명희 분단의 현실을 조망할 수가 있었다고나 할까? 또 하나 눈여겨 봐야 할 것들은 분단 기행을 현실의 문제만으로도 국한 시키지 않고, 철책선, 민통선, 지뢰밭 등에 의해 묻혀버린 문화유산에 대한 관심이다. 분단이라는 상황이 현대 우리 민족에게만 고통을 주는 것이 아니라, 조상들의 땀과 피의 결과물들까지 도외시되고, 유실되어 가는 과정이다. 불상이 머리를 과녁 삼아 사격을 해대는 상황 속에 놓인 위태한 모습들을 보여준다. 이 책 속에 나타난 분단의 혜택(?)은 없을까? 있다면, 두타연에서 팔뚝만한 열목어가 폭포를 뛰어 오르는 모습이나, 수입천에서 피어난 복주머니꽃 그리고 금강초롱 등의 훼손되지 않은 자연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개발의 바람이나 토지의 이윤 추구와는 거리가 먼, 투자할 가치가 없는 땅이어서 일부 동식물들이 지켜질 수 있었음은 혜택 아닌 혜택일 것 같다. 이 기행이 종착지는 남한 내의 이북 땅인 건봉령이다. 동해바다와 금강산이 바라다 보이는 건봉령의 종착은 백령도의 거센 물살에서 시작된 휴전선 625리의 대단원이다. 그는 이 책의 말미에 누구도 이처럼 철저한 답사를 해내지 못할 것이라고 장담하고 있다. 단순한 풍담은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더구나 김하기가 간 길이라면... 필자도 올 봄에 중부전선을 다녀왔다. 이 책의 원고가 신문에 연재되던 시기였는데, 새벽 한탄강에 이루러 물안개에 싸이고, 고석정에서 간단한 절차를 거친 다음 한 사람당 1,300원씩 입장료를 내고 민통선 안을 들어갔다. 분단이 상품화된 현장이었다. 월정리 전망대와 이 책의 저자가 남북 정상회담의 장소로 제시했던 월정역, 그 녹슨 기관차를 보았다. 그 뚝변에 은방울 꽃들이 지금도 마음 속에 대롱거린다. 그리고 폐허가 된 철원의 노동당사나 철원역사 그리고 신기루처럼 지도상에 떠 있는 쇠둘레(철원)에 대한 단상들도 지울 수가 없다. 분단 시대의 우리는 어디에 서있는가를 깨닫기 위해서는 꼭 그 현장을 눈으로 확인해야 한다는 생각이다. 이 책은 그 길라잡이가 될 것이다. 김하기의 말처럼 누구도 해낼 수 없는 꼼꼼한 발걸음과 남북 어디에도 치우치지 않는 균형 감각은 대상을 명확히 보여주는 틀을 제공할 것이다. 끝으로 이 책의 일독을 권한다.
목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