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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5.11 | [세대횡단 문화읽기]
근대적 표현에 한발 다가 선 화가 조중태
글/이철량 (2004-02-10 11:25:59)
조중태는 인물에서 뿐만 아니라 산수나 화조 등에서도 예사롭지 않은 수준 높은 걸작품을 남겨놓고 있다. 우리가 옛 화가들에서 볼 수 있는 공통적인 특징은 화가가 어느 한 화목만을 그리기 않고 여러 가지를 모두 잘 그려야 하였다는 점이다. 예를들면 산수 뿐만 아니라 화조, 기명절지, 문인화 등 다방면에서 수련을 쌓아야 하였다. 그러니깐 산수를 주로 그렸다 하더라도 사군자와 화조화를 잘 그려내야 화가 대접을 받을 수 있었다. 이러한 관습은 물론 서예와 글씨가 원래 한 뿌리였다는 서화 동원론에서 비롯되며, 화가가 되기위해 글씨 연마를 게을리 할 수 없었거나 혹은 글씨를 먼저 터득하고 그림에 나아가는 관습이 오랫동안 배어있는 데서 이해될 수 있다. 더욱이 일반 직업적 화가나 그의 화풍보다도 선비 화가들의 문인화를 더 존중했던 사회 풍조 속에서는 훨씬 자연스럽게 이루어졌다. 조중태도 이러한 역사적 배경 속에서 그림에 접근해 갔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그가 부안 태생으로 정읍 농업 고등학교라는 근대적인 학습 과정을 걸어갔던 어린 시절을 감안하면 어떻게 그리고 언제부터 서화에 발을 들여놓았는지 궁금할 뿐이다. 그것도 각기 다른 소재들을 훌륭히 소화해 내는 역량은 그가 천부적 재능을 소유했던 화가였음을 알게 한다. 조중태가 전통적 방식의 산수와 인물에서 이미 상당한 수준에 도달했음은 “신선도”그림에서 확인된다. 신선을 소재로 한 그림들은 단원 김홍도가 그린 군선도(群仙圖)를 비롯하여 조선조 말기에 오면 많이 나타난다. 특히 조선조 후기에 들어온 남종화의 화격이나 정신에 잘 어울리는 신선도는 산수 속에서 흔히 등장하는 소재가 되었다 그리고 그 형식은 점경인물(點景人物)로 그려진다. 점경인물 산수화의 역사는 대단히 길다. 사실 산수화가 발생하여 본격적인 회화 형식을 갖추기 시작하면서 함께 등장했다고 볼 수도 있다. 조선조에서도 초기 안견이나 강희안 그리고 이상좌와 같은 대표적인 화가들에서 시작된다. 그러나 점경인물이 화가 자신의 모습을 담아내고 있는 평법한 선비의 모습이 아니라 신선이라는 점에서 시대적인 모습을 볼 수 있게 한다. 조중태의 신선도는 인물이나 산수의 기법이 모두 전형적인 19C 말이란 20C초의산수 인물의 표현을 담고 있다. 암석을 다듬어 만든 바둑판에 네 사람의 신선이 둘러앉아 바둑을 두는 평화스러운 모습이다. 인물들을 화면 한 중심에 원형으로 둘러앉아 있다. 그리고 인물의 원형을 둘러싸고 있는 또 하나의 원이 있다. 신선들이 편안하게 앉아 놀 수 있는 자리를 만들어 내기 위한 언덕이 인물 뒤로 둘러쳐져 있다. 그리고 이 자리는 그 주변보다 약간 높이 올라 서 있다. 또한 이 자리를 더욱 압축시켜 돋보이게끔 소나무 두 그루를 V자 모양으로 배치해 후면을 막고 있다. 그리고 이 자리를 감싸고 또 다른 산허리가 좌우로 배치되어 있다. 화면 한 중앙에 놓여진 흑백의 바둑알을 기점으로 마치 물결이 원을 이루며 퍼져나가는 형국으로 구성되어 있다. 더욱이 인물들의 시선이 바둑을 내려다보는 자세로 되어 있어 더욱 초점을 강하게 한다. 이러한 인물들과는 전혀 무관하게 그려진 동자들에서는 파격의 미를 느끼게 한다. 화면 중심에서 바둑을 향해 모아진 긴장된 시선이 밖으로 퍼지면서 전혀 다른 상황을 보여주는 동자에 오면 긴장이 확 풀어져 버린다. 이렇게 하여 다소 단조러워지기 쉬운 원형 구도가 원만하게 매듭을 맺는다. 인물을 그려내고 있는 먹선을 미인도와는 다른 부드러운 유사 선묘를 사용하고 있다. 적절한 변화를 주면서 속도를내고 있는 붓이 마치 물 흐르듯 자연스럽게 인물을 묘사해 내고 있다. 뿐만 아니라 그가 전통 남종 산수롸를 잘 소화하고 있었음이 인물을 감싸고 잇는 풍경에서 보여준다. 두그루의 소나무는 상당히 사실감을 드러내고 있다. 기둥의 등걸 묘사와 가지에붙어 잇는 솔잎의 표현이 우리 소나무가 갖고 있는 특징을 훌륭히 보여주고 있다. 반면에 언덕 위에 서있는 작은 떡갈 나무와 도토리 나무 등은 다소 양식화된 모습으로 나타났다. 산 언덕과 암석의 묘사는 전형적인 나종화풍의필치를 보여주는 예에 속한다. 소나무의 사실적 감각을 제외하면 매우 관념적인 전형을 보인다. 이는 네 사람의 신선이나 술안주를 준비하고 있는 두 동자의 모습이 완전히 중국식 복장으로 나타나고 있는 데서 더욱 관념성을 높인다. 소나무와 언덕, 암석을 그려나가는 필치가 한국적 남종화의 모습을 보이고 있고 담채가 화사하고 넉넉하게 처리되어 마치 수채화의 색채 기분을 느끼게 한다. 어떻든 이 작품은 근대 초기에 형성된 한국적 남종화의 표현을 담고 있는 인물 중심의 산수화이다. 미인도와 함께 이 신선도의 인물을 보면 조중태는 인물화에 남다른 기량을 갖고 있는 작가로 지목된다. 다양한 표현 방법을 구사했고 인물 묘사에 출중했던 작가였다. 그리고 그가 훌륭한 작가였음은 통속적으로 빠지기 쉬운 신선도나 미인도 등과 같은 소재의 작품에서 높은 수준의 격조를 유지하고 있다는데서 증명된다. 그리고 그가 얼마나 회화의 격조를 쌓아 올렸는지는 화조도에서 더욱 증명하고 있다. 까마귀를 그린 듯이 보이는 세 마리의 새가 버드나무 가지에 앉아 잇는 이 작품은 한국 화조화의 진면을 보는 듯하다. 동양의 그림에서 옛 사람들은 그 작품의 수준과 우열의 등급을 작품의 격조에서 찾아냈다. 작품의 필치의 세련됨이나 색조의 아름다움도 중요하지만 그 보다는 그 작품이 풍기는 내적 품격을 더욱 중요시 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화격은 모두 그 작가의 인품에서 비롯된다는 신앙이 있었다. 그래서 산수나 인물화보다도 문인화를 더욱 훌륭한 그림으로 생각했었고 문인화를 잘 그려낼 수 있었던 양반 사대부들의 격조있는 그림을 높이 쳤다. 연못가에 늘어진 버드 나무 가지와 교차하며 올라 간 한 줄기의 복사꽃 가지가 엇갈리며 짜여진 화면 구성은 대단히 자연스럽고 편안하다. 봄날에 물이 오른 버드나무와 복사꽃 가지의 촉촉한 물기와 부드러운 유연성은 조중태의 역량을 최대한 살려내고 있는 부분이다. 우리 나라의 화조화가 중국의 화조화하고 다른 점은 부드럽고 담백하며 소박한 아름다움에 있다. 조중태는 작품에서 이러한 특성을 충분히 살려내고 있다. 나뭇가지와 새의 위치 설정이 대단히 치밀하게 계획되어진 구성의 방식을 취하고 있는데 기실은 그러한 의도된 화면을 느낄 수 없을 만큼 자연스럽게 소화해 내고 있다. 작품의 세련미와 격조를 훌륭하게 보여주는 걸작임에 틀림없다. 조중태의 다양한 작품들이 모두 휼륭한 수준을 유지하고 있는 점으로 미루어 그는 본격적을 그림 수업을 하였을 것으로 믿어지는 인물이다. 그러나 그의 화력이 거의 알려져 있지 않아 확인할 수 없다. 그리고 그의 미인도와 같은 화풍을 이 지역에서 어떻게 공부하였을까 하는 의문이 많다. 지금까지 알려진 지극히 단편적인 자료로서는 그가 정읍 농업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전주로 나와 그림에 몰두하였다는 점외에 그의 스승으로 일컬어지는 박호병과의 관계도 알려져 있지 않다. 그는 호를 오산(梧山)과 우당(又當)이라고 썻다. 그리고 우당이라는 호는 그의 스승 추당 박호병으로부터 비롯되어진 것이 아닌가 추측된다. 조중태는 분명 전통적 기법을 충실히 소화해내고 새로운 근대적 표현에도 한발 다가갔던 화가였다. 만일 조중태가 어떻게 이러한 근대적 화풍에 다가설 수 있었는지를 확인할 수 있다면 전북 지역의 근대 화단의 한 부분이 확인될 수 있을 것으로 믿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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