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5.11 | [세대횡단 문화읽기]
한국의 영화문화를 다시 읽는다
문화저널(2004-02-10 11:33:21)
한국 영화가 세계 영화계에서 서서히 두각을 나타내고 있는 요즈음, 다소 도발적인 질문을 한 번 해보자. ‘한국의 영화 문화 수준은 과연 어느 정도인가?’ 해외 유수의 국제 영화제에서 한국 영화가 좋은 평가를 받고 한국 영화 회고전이 세계 곳곳에서 열린다는 소식을 접하는 일반 시민들은 한국의 영화 문화 수준이 높아지고 있겠거니 하고 생각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관점을 조금만 돌려보자. 우리 스스로가 우리의 영화 문화수준을 평가하지 않고 해외에서 한국 영화가 좋은 평가를 받기 때문에 그 수준이 높아졌을 것이라고 단정짓는 것은 왜인가. 또는 군사 문화의 폐습 가운데 하나인 실적 주의에 함몰되어 상만 타면 모든 문제에 만족을 느끼는 것은 아닌가. 영화 문화를 상이라고 하는 잣대로만 평가한다는 것은 언제나 ‘엘리트 체육’의 한계를 벗어나지 못하는 한국 체육계의 현실을 보는 듯하다. 영화문화란 영화를 만드는 사람만의 것이 아닌, 일반 대중들이 함께 가꾸어 나가는 것이 아닌가. 이러한 문제들에 눈을 돌리면 우리의 영화 문화는 불행히도 아직 만족할 만한 수준에 와 있지 않은 듯하다.
다시 한 번 우리의 영화 문화의 문제점들을 냉정하게 생각해 보자.
영화 장르의 폐쇄성
상업 극영화가 장르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현실은 세계적으로 공통적인 현상이다. 일반적으로 영화는 곧 산업이고, 자본주는 어떤 방식으로든지 수익을 우선적으로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외국의 경우, 그렇다고 해서 극영화 이외의 장르, 즉 기록영화나 단편 영화가 우리네처럼 철저하게 무시당하고 있지는 않다. 기록 영화는 영화의 중요한 변별적 성격, 즉 ‘기록성’과 ‘영화의 사회적 기능’을 가장 온전하게 보존하고 있는 장르이다. 영화의 탄생 자체가 곧 기록 영화의 탄생이었고 수많은 영화인들이 믿고 있듯이 기록영화는 ‘영화의 심장’이다. 때문에 영화가 만들어지는 대부분의 나라에서는 기록 영화가 극영화만큼 대중적이지는 않더라도 극영화만큼, 혹은 극영화보다 더 중요한 장르로 다루어지고 있다. 영화사상 중요한 ‘작가’로 추앙받는 유명 감독 가운데 상당수가 기록영화를 먼저 만들었다는 사실은 차치하고라도, 우리가 흔히 무시해 버리기 쉬운 경제 후진국들, 그래서 문화적 수준도 우리보다 낮을 것이라는 막연한, 그리고 근거 없는 추측을 하는 나라들조차도 기록영화를 중요하게 다루는 경우가 많다. 이웃 일본의 경우 동북부 지역의 야마가타시에서 2년에 한 번씩 야마가타 국제 기록영화제를 개최한다. 올해로 4회째를 맞는 이 영화제의 본선에 오르는 작품들의 면면을 보면 소위 영화 문화 선진국이라는 서구는 물론, 중남미와 아시아권의 작품들도 다수를 차지하고 있다. 반면에 그동안 한국의 기록 영화가 본선에 오른 적 은 단 한 번도 없다. 아니, 작품을 출품한 적도 없다. 단지 비디오 다큐멘터리만이 비경쟁 부분인 ‘아시안프로그램’에 몇 편 소개되었을 뿐이다. 불행히도 우리에게는 제대로 된 기록 영화의 전통이 없었던 것이다. 기껏해야 뉴스 영화나 극장에서 ‘문화영화’라는 이름으로 상영되는 홍보영화 정도뿐이었다. 그러나 기록영화도 사실은 너무도 다양하고 폭넓은 하위 장르로 나뉘어진다. 우리의 영화가 소화해낸 기록 영화란 것이 고작 ‘문화영화’정도라는 것은 수치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때문에 기록 영화제에 참가한 외국의 평론가나 감독들이 왜 너희 나라에서는 작품을 출품하지 않느냐는 질문을 해 올 때는 대답할 말을 찾지 못해 당황한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그나마 필름으로 만든 제대로 된 기록 영화 올해에야 처음 만들어졌다는 사실은 다행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번영주 감독의<낮은목소리> 그리고 또 한편의 필름 기록영화『홈리스』(장기철연출.한국의 화교를 다룬 기록영화)가 현재 제작중에 있다. 기록 영화가 한 나라의 영화 문화를 살찌우는 자양분역학을 한다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극영화의 상업적 성격에 눌려 기록 영화의 싹을 키워보지도 못한 우리네 영화 문화풍토가 황량해 보인다는 것이 결코 과장된 표현만은 아닐 것이다. 단편 영화는 그나마 기록 영화보다는 나은 편이다. 그러나, 단편 영화 역시 극영화 감독들이 반드시 한 번쯤은 거쳐야 하는 장르임에도 불구하고 우리네 단편 영화 문화는 그다지 체계적이지 못했다. 지난 70년대부터 각 대학 영화과 학생들이 만들던 작품들만이 근근이 단편 영화의 명맥을 유지해 왔던 것이다. 다행스럽게도 최근 들어 국내 굴지의 대기업이 단편 영화제를 신설하는 등 단편 영화의 중요성이 대중들에게 널리 알려지면서 단편 영화는 이제 아마추어 영화나 동호인 영화의 수준에서 벗어나고 있다. 단편 영화의 중요성은 최근의 한국영화를 이끄는 중요 감독들 대부분이 단편영화를 만들었다는 사실을 통해서도 알 수 있다(박광수, 장선우, 김의석, 장현수, 박종원 등.) 앞으로도 한국 영화의 미래는 지금 이 순간 단편 영화를 만들고 있는 젊은이들에 의해 결정될 것이며 따라서 지금부터라도 단편 영화에 대한 이해의 증진과 적극적인 그 지원이 검토되고 시행되어야 할 것이다. 연간 전 세계에서 만들어지는 영화는 수천 편에 달한다. 그래서 이 모든 영화를 접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일반 관객들이 접할 수 있는 영화는 너무 제한되어 있다. 기껏해야 10개국 정도에 불과하다 그것도 미국과 홍콩 영화가 80% 이상을 차지하고 있다. 물론 그 이유는 너무도 분명하다 외화를 수입하는 업자들이나 극장주들 모두가 흥행이 될 만한 영화를 고르다 보니 그러한 결과가 계속 반복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현실은 영화를 영리의 측면으로만 생각하는 소위 업자들의 영화관 때문이다. 그렇다면 과연 미국이나 홍콩 이외 지역의 영화는 정말 절대적으로 흥행이 되지 않는 것인가.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여타 지역의 영화에 대해 무조건적으로 배타적인 자세를 보인다는 것은 문제가 아닐 수 없다. 또한 영화를 문화적 측면으로 이해한다면 적자를 보지 않고도 세계 각국의 영화를 소개할 방법은 얼마든지 있다. 유럽이나 일본의 경우 500석 이하의 소극장은 대극장에서 소화해내지 못하는 세계 각국의우수한 영화들을 대중들에게 소개해 주는 문화예술공간으로 자리잡고 있다. 이들 소극장에서 소개되는 영화들은 무성영화에서 흑백영화, 혹은 명감독 회고전, 그리고 널리 소개되지 못한 미지의 영화들이다. 이러한 영화들은 수입가도 그다지 비싸지 않을뿐더러 큰 액수의 홍보 비용도 필요하지 않기 때문에 충분히 수지를 맞출 수가 있는 것이다. 다행스럽게도 최근에 서울의 대학로에 이러한 성격의 예술 영화전용관 ‘광장’이 생겨 섹{의 다양한 영화를 접할 수 있는 토대가 마련되었다.
그러나 그래도 문제는 남는다. 최근 영화에 관한 정보는 말 그대로 넘쳐흐른다. 신문, 잡지,TV에서 앞다투어 영화에 관한 정보를 쏟아내고 있는 것이다. 문제는 각종 매체에서 쏟아내는 이러한 영화 정보가 여전히 헐리우드나 홍콩영화 일변도라는 데에 있다. 어디 그뿐인가/ 영화에 관심이 있어 영화를 공부해 보겠다는 일반인들이나 영화 학도들이 보게 되는 영화사 책들도 미국이나 유럽 영화 일변도로 기술되어 잇다. 말하자면 각종 언론 매체나 교과서마저도 문화 제국주의의 함정에 빠져 독자들로 하여금 폐쇄적이고 왜곡된 영화관을 갖도록 강요하고 있는 것이다. 예를 한번 들어보자. 가끔씩 소개되는 유럽 영화에 대한 홍보의 초점은 언제나 ‘수준높은 예술영화 운운’하는 식이다. 이런 현상은 TV에서 방송되는 유럽 영화에 대한 홍보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이를테면 고전 걸작을 엄선해서 방송한다는 교육방송의 ‘세계의 명화’시간에도 대부분 유럽의 영화들만이 소개되고 있다. 때문에 일반 관객들은 지극히 단선적인 이분법적 영화관을 지니게 된다. 이를테면 할리우드, 홍콩 영화는 곧 오락 영화이며 유럽영화는 예술 영화라는 식의 고정관념에 젖게 되는 것이다. 문제는 여기서 끝나는 것이 아니다. 그렇다면 나머지 지역의 영화들이 설자리는 어디인다. 예를 들어 극장에서 볼 수도 없고 영화 전문지나 TV의 영화 정보 프로그램에서도 거의 소개되지도 않는, 홍콩이나 중국 이외의 아시아 영화들은 언제까지 관객들에게 미지의 영화로 남아 있어야 하는가. 우리보다 경제적 수준이 떨어지므로 영화 수주도 당연히 떨어질 것이라는 막연한 추측만으로 무시되곤 하는 아시아 영화에는 사실 보석과도 같은 작품들이 널려있다. 우리는 우리의 편견과 무지 때문에 뛰어난 우리 이웃의 영화들을 지금 이 순간에도 흘려버리고 있는 것이다. 다양한 세계의 영화를 접할 수 있는 여건을 마련해 준다는 것은 영화수용문화의 제일 조건이라 할 수 있다. 그런 점에서 우리 영화 문화는 아직 낙제점을 면치 못하고 있는 것이다.
열린 영화 문화를 위하여
한국 영화가 세계무대에 진출하여 호평을 받는 것은 분명 반가운 일이다. 그러나, 그것도 그뿐, 한국 영화는 여전히 서구에서 무시되고 있다. 맥밀란 영화감독사전, 작품사전에는 단 한명의 한국 감독도 그리고 단 한 편의 한국 영화도 소개되어 있지 않다. 또한 숱하게 많은 영화사 책에도 한국 영화에 대해 기술한 책은 찾기 힘들다. 그런데도 우리의 영화 학도들은 서구인들의 관점에서 쓰여진 영화 사전이나 영화사 책들을 경전처럼 읽고 또 읽고 있다. 사정이 이러할진대 한국 영화가 국제영화제에서 상 몇 개 탔다고 해서 한국 영화문화의 수준이 갑자기 높아진 것인 양 착각하는 것은 문제가 아닐 수 없다. 따라서 이제는 우리 영화문화의 폐쇄성을 극복하고 주체성을 확립해야 할 필요가 있다. 폐쇄적인 영화문화의 극복은 다양한 영화 장르의 개발과 다양한 지역의 영화들의 수용을 통해 이룰 수 있다. 이러한 다양한 영화의 수용은 관객은 물론 영화 학도들에게 영화에 대한 시야를 무한정으로 넓혀 줄 것이다. 이런 열린 시각은 젊은 영화인들을 건전하게 키우는 충분한 밑거름이 도리 것이고, 또한 그들에게 끊임없이 창조적 모티브를 제공할 것이다. 그리고 ‘광장’과 같은 예술영화전용관이 늘고 TV의 영화프로그램이 서구 이외의 지역에 눈을 돌린다면 한국 영화문화의 폐쇄성의 극복은 더욱 가속화 될 것이다.
아울러 한국 영화문화의 주체성의 확립은 국제영화제 개최를 통해 그 토대를 닦을 수 있다. 사실 국민 소득만불시대를 눈앞에 두고 있는 나라에서 국제영화제 하나 갖고 있지 못하다는 현실은 수치스럽고 또 수치스러운 일이다. 소득 수준 이천불 미만의 나라 주에도 국제영화제를 개최하는 나라가 여럿 있다는 사실 앞에서는 더 이상 할 말을 잃을 정도이다. 국제영화제를 갖는다는 것은 대중들에게 일반 극장에서는 보기 힘든 세계 각국의 걸작들을 소개한다는 측면 외에도 외국의 우수 영화를 ‘발굴’한다는 의미도 있다. 늘 우리 영화가 외국의 국제영화제에 나가 수상했다는 사실에 기뻐할 것이 아니라 이제는 우리가 외국의 우수 영화를 발굴하여 평가해 주자는 것이다. 그래서, 서구인의 관점이 아닌, 보다 열린 시각으로 영화사를 재 기술하고 편견을 없애자는 것이다. 즉, 우리는 국제영화제를 통해 우리의 지위마을 향상시키는 것이 아닌, 보다 열린 다문화시대의 영화문화발전에 일익을 담당하자는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우리 영화문화의 주체성을 건전하게 확립하는 일일 것이다.
갈길은 멀어보이지만 시작은 언제나 희망을 현실로 바꿀 수 있는 가능성을 잉태한다. 때문에 개선되기 힘들 것처럼 보이는 우리 영화 문화의 폐쇄성을 극복하려는 시도는, 문제점을 개달은 지금 바로 시작되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