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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5.11 | [특집]
창조적 계승과 새로운 문화에의 대안 찾기 8년
문화저널(2004-02-10 11:39:49)
‘따뜻한 문화’는 지난 8년간 문화저널의 가장 중요한 캐치프레이즈가 되어 왔다. 따뜻한 문화란 도대체 무엇인가. 지금으로부터 8년 전 20쪽의 책 한 권이 사람들 손에 들려졌던 그 시절은 이름하여 ‘80년대’였다. ‘80년대는 대항 문화의 시대였다. 89년 호남사회연구회의 제2회 심포지엄에서 임옥상은 전북의 지역 문화에 대해 발표하면서 ’불평등과 착취, 핍박과 억압 등 바로 척결해야 할 현실에 직면한 문제가 대항 문화를 불렀다‘고 말했다. 그가 말한 대로 ’80년대 싸움의 필연성을 가진 선전과 선동의 문화, 급박한 전전의 전투가 불요불급했던 시대였다. 그러나 그 급박한 전선 속에서도 후방은 후방대로의 의미를 가지고 있었다. 그것은 대안의 문화였다. ‘어쨌든 생산도 해야 하고 가정도 꾸려야 하며 이웃과의 관계도 맺을 수 있어야’했다. 문화저널이 지향했던 따뜻한 문화는 바로 그 후방의 개념과 위치해 있었고 그것은 대안의 문화였다. 임옥상은 그것을 ‘삶이 소극적으로 자리한 곳’이라고 말했지만 대안 문화의 장이 결코 한가롭고 여유 있는 것만은 아니었다. 굳이 그림시의 진지전을 들먹이지 않더라도 자본의 논리, 힘의 논리는 여전히 우리 사회 전체를 강고하게 지배하고 있었고 그것은 지금도 그러하다. 문화저널의 기획 행사들은 바로 그 대안의 개념에 기초하고 있었다. 그들 스스로가 인지하고 있었든 그렇지 않았든 문화저널에 몸담고 있었던 사람들 개개인이 지향하는 문화적 감성은 호흡이 긴 대안의 관점을 채택하고 있었다. 그 대안의 개념은 폭넓게 적용되었다. 상업주의에 대한 본능적인 경계, 민족문화에 대한 진지한 관심과 탐색, 지역 문화의 발굴과 보존에 대한 깊은 의무감, 문화의 지역적 소외에 대한 극복 등등이 문화저널이 기획 사업들을 통해서 나름대로 표현되고 소개되었다. 그것은 길게 보아 지배 문화에 맞서 싸우는 대항 문화의 전선을 더욱 풍요롭게 하고 튼튼한 자양분을 길러 주는 작업이 되었고 지역적으로는 지역 문화의 완강한 보수적 질서를 깨트리고 새로운 문화에 대한 적응력을 길러 주는 작업이었다. 문화저널의 창간 이듬해인 1988년 12월 문화저널은 그 첫 번째 기획 공연을 올렸다. 이 지역 출신의 광대 김명곤이 그 주인공이었다. 김명곤은 이미 연극판과 마당놀이, 영화판 등에서 두루 재능을 인정받으며 한편으로는 박초월로부터 판소리를 사사받은 민족문화 진영의 대표적인 주자로 부상하고 있었다. 그는 스스로 비가비 광대를 자처하며 당시만 해도 생소하기 이를데 없는 창작 판소리를 들고 판소리의 고장 전주의 무대 섰다. 그의 소리가 갖는 예술성을 떠나 그에게 주어진 몫은 이제 판소리가 어떻게 나가야 하는가에 대한 물음과 대답이었다. 공연은 김명곤의 명성에 힘입어 성황을 이루었지만 그 외형적 성공에 못지 않게 중요한 것은 판소리 다섯 바탕에 익숙해 잇던 지역 소리판에 창작 판소리의 가능성을 보여준 것이었다. 그 김명곤은 올해 1월 7년만에 다시 문화저널에 초대되었다. 이번에는 문화저널의 시민문화강좌에 강사로 섰고 그의 가족이 함께 고향을 찾았다. 이미 판소리 영화<서편제>의 대성공응로 대중문화의 스타가 된 이후 모처럼 찾은 고향이었지만 그는 여전히 변치 않은 정열과 소리에 대한 깊은 애정으로 문화저널과 전주의 팬들에게 아낌없는 박수를 받았다. 89년 6월 문화저널은 특별한 손님을 맞았다. 『남부군』의 저자 이태 씨가 문화저널의 초청 강연에 참가한 것이다. 분단의 민족사적 비극과 통일의 염원을 담은 이태 씨의 강연은 많은 사람들의 주목을 받았다. 한 인간의 삶이 분단의 역사 속에서 어떻게 운명지워지고 그 상처가 얼마나 오래 지속되는 지를 그 강연은 보여주었다. 분단과 통일의 문제는 문화저널이 지향하는바 건강한 문화의 본뜻에 벗어나는 주제가 아니었다. 문화저널이 창간 2주년 기면 공연은 김덕수패 사물놀이의 무대였다. 아마도 문화저널 사상 가장 성공한 공연 중의 하나로 기록될만한 이 공연은 전북 학생회관으로 무대를 잡았다. 김덕수패의 전성기라 할만한 89년 12월의 일이었다. 김덕수와 함께한 이광수, 최종실, 강민석 등은 이 시대 마지막 유량 예인 집단의 후손들로 명성에 걸맞는 사물놀이의 진수를 보여주면서 폭발적인 호응을 받았다. 그로부터 세 달 후인 1990년 3월 문화저널의 특별 초대 공연이 전북대 합동 강당에서 열렸다. ‘노래를 찾는 사람들’ 80년대를 풍미한 민중 가요의 대표 주자였던 그들은 노래를 통해 누구보다도 많은 이야기들을 전달했다. 그들은 노래를 통해 한 시대의 폭압에 저항했고 군사 독재를 고발했으며 뿐만 아니라 꿈과 희망을 이야기했다. 그러나 본래 전북학생회관으로 예정되어 있었던 이 공연은 끝내 그곳에 노래를 올리지 못한 채 대학으로 들어가야만 했던 사연을 남겼다. 그해 가을 11월에는(삼포 가는 길)의 작곡가 김영동과 부산시립국악관현악단의 초청 연주가 창간 3주년 기념 공연으로 올려졌다. 그때의 공연 팸플릿에서 문화저널은 ‘김영동의 창조적 계승에 있어 탁월한 모범을 보이고 있다’고 썼고 그것은 문화저널의 중요한 지향성을 표현한 것이기도 했다. 문화저널의 또다른 미덕은 각 문화 장르에서 전북지역의 신진 기예를 발굴하고 그들에게 보다 많은 관심을 불러일으키고자 하는 것이었다. ‘91 전북 청년 작가 초대전은 문화저널이 최초로 마련한 전시회였다. 그 첫 번째 전시가 이름난 작가나 값비싼 작품들에 의존하지 않고 발굴과 소개의 의미를 갖는 청년 작가 초대전이었다는 것은 그 시사하는 바가 컸다. 당시 진호 발행인은 초대전에 부쳐 ’이러한 고집이 우리의 작업을 터덕이게 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몸부림하는 것은 상품의 논리에 항거하여 우리가 인간으로서의 모습을 유지할 수 있게 해주는 유일한 방안이기 때문이다.‘고 말했다. 이때의 청년 작가 초대전에 초대된 청년 작가들은 이제 전북 화단의 중견이 된 남성희, 여태명, 도병락, 최유경, 서일석, 조현동, 이문수, 홍선기, 이철규, 정미현, 김선태 등 이었고 추천 위원은 한국화의 강영봉, 유창희, 이철량 교수를 비롯해 서양화의 박민평, 유휴열, 임옥상등이었다. 91년 문화저널은 당시 로서의 거의 처음으로 ‘동학농민혁명 백주년을 준비하자’는 발의를 통해 동학 농민혁명 백주년에 대한 대중적 관심을 환기시켰다. 박제된 채 역사의 뒤안에 숨죽이고 있던 100여년 전 갑오년의 역사를 다시 찾아 나서고 새롭게 그의미를 되새겨야 한다는 주장이었다. 그같은 문화저널의 주장은 시민 문화 강좌로 이어졌다. 한여름의 뜨거운 열기를 뒤로하면서 적지 않은 수의 사람들이 ‘갑오 동학혁명의 현재적 의미’라는 주제로 모여들었다. 박찬승(목포대), 우윤(역사문제연구소), 신순철(원광대), 문순태(전남일보), 이윤갑(계명대), 송기숙(전남대), 이이화(역사문제연구소)등이 강사로 참여했고 ‘백주년 기념 사업을 어떻게 준비할 것인가’라는 실천적인 과제를 놓고 정도상, 임옥상, 이진영 등이 참여한 종합 토론이 벌어졌다. 그리고 이 기간의 시민문화강좌는 곧 92년 창립한 동학농민혁명 기념사업회의 모태가 되어 값진 기록으로 남아 있다. 91년 겨울 전북학생회관에서 열린 창간 4주년 기념 공연 ‘호암좌우도굿의 만남’은 탄탄한 지역성에 기반한 것으로 관심을 모았다. 문화저널이 제2대 발행인으로 윤덕향 교수를 영입하고 얼마 후였다. 이미 70년대와 80년대를 통틀어 가장 저항적인 이미지로 남아 있던 풍물굿이 젊은 층의 강렬한 민족 의식과 만나 완전히 무대화된 놀이 양식으로 되살아나면서 곳곳에 묻혀 있던 우리 가락들이 차례로 복원되거나 전수되는 시기였다. 호남의 놀이판을 이끌던 두 본류가 하나의 무대에서 만나 서로 주거니 받거니를 거듭하면서 열린 이 한판은 이지역 대중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겨졌다. 이날 호남좌도굿의 우두머링엿던 임실 필봉의 전설적인 상쇠 양순용 선생은 바로 두달 전 아직도 한창의 나이에 아깝게 세상를 떠나 많은 사람들을 안타깝게 했다. 92년에 이르러 문화저널은 또 하나의 작업을 시작했다. ‘전라도의 춤 전라도의 가락’이 바로 그것이었다. ‘춤문화의 건강성을 회복하고 전통춤의 올바른 이해’를 위해 시작된 이 프로그램은 각각 깊은 초야에 묻혀 살아온 전통춤의 명인들을 무대로 모시고 그 춤과 가락을 기록하자는 것이었다. ‘전라도의 춤 전라도의 가락’이야말로 가장 문화저널다운 사업이었다. 92년 봄에 열린 첫 번째 공연 이후 ‘전라도의 춤 전라도의 가락’은 올해까지 4년째 계속되고 잇다. 그 첫 번째 무대에 오른 춤은 나금추의 ‘상쇠춤’ 김이월의 ‘한량춤’, 김용순의 ‘소고춤’, 장녹운의 ‘살풀이’그리고 고창 농악의 설장고와 소고춤이었다. 그해에 문화저널은 다시 동학농민혁명을 기념하는 두 번째 시민 문화 강좌를 열었다. 그러나 이때는 동학농민혁명기념사업회가 창립되었고 동학농민혁명 백주년을 준비하는 작업은 한결 힘이 불어 있었다. 그리고 그해 가을 92년간 창간 5주년 기념 공연을 통해서 문화저널은 저농 문화의 재창조 작업에 대한 진지한 고민에 함께 했다. 전통음악에 대한 새로운 작업이 젊고 재능 있는 연주자들에 의해서 시도되고 있을 때 문화저널은 국악연주단 ‘슬기둥’을 초청했다. ‘슬기둥은 오늘을 사는 사람들의 마음을 안다’고 했고 역시 그들은 놀라운 기량으로 전통 문화에대한 자부심으로 가득한 이 지역이 대중들에게 새로운 문화적 체험을 선사했다. 93년 문화저널은 창간이후 가장 바쁜 나날을 보냈다. 6월 두 번째로 마련된 ‘전라도의 춤 전라도의 가락’을 시작으로 이시대 최고의 판화가 이철수의 <산벚나무 꽃피었는데>가 열흘 동안 계속되면서 놀라운 호응을 얻었고 역시 한여름에는 <동학농민혁명 백주년의 역사적 의미>라는 주제의 시민 문화 강좌가 다시 세 번째로 열렸다. 박명규(서울대) 최현식(정읍문화원장)등 이 강사로 참여했고 장효문의 창작 판소리<전봉준>이 선을 보인 것도 이때였다. 그리고 그해 가을에는 ‘노래를 찾는 사람들’과 함께 노래 운동의 새로운 지평을 열었던 ‘노래마을’이 문화저널의 초청으로 전주를 찾았다. 그들은 이전 노래운동패의 강하고 투쟁적인 이미지에서 벗어나 이 땅의 자연과 사람과 통일을 노래하는 한결 변화되고 예술적으로 강화된 노래 운동의 면모를 보여주었다. 94년은 동학농민혁명 백주년의 해였다. 연초부터 동학농민혁명 백주년을 기념하는 행사와 사업들이 전국 각지에서 열렸고 그 본향인 전북은 일년 내내 기념 사업이 끊이지 않았다. 94년 문화저널은 우리 것과 역사에 대한 관심을 보다 구체적이고 대중적으로 표현해 내기 시작했다. 두 번의 공연과 두 편이 시민문화강좌가 94년 내내 이어졌다. 94년 봄의 정기 공연 ‘전라도의 춤 전라도의 가락-셋’은 예전에 비해 그 밀도가 크게 떨어지기 했지만 여전히 소중한 발굴 무대로서의 위상을 지키고 있었다. 94년 9월에는 문화저널이 기획한 두 편이 본격 시민문화강좌가 막을 올렸다. 판소리 강좌가 한국 미술사 강좌가 그것이었다 9월 13일 최동현 교수의 판소리 강좌를 시작으로 장장 6개월 동안 이어진 시민문화강좌는 성공적이었지만 만만치 않은 과제도 동시에 남겼다. 특히 9월 16일 유홍준 교수의 개강으로 문을 연 한국미술사 강좌는 개강 첫날 우진문화공간이 생긴 이래로 가장 많은 청중들이 몰려 들어 그의 유명세를 실감케 했다. 공개 강의로 열린이날 강좌에서 유홍준 교수는 문화를 사랑하는 사람들이 가져야 할 자세와 한국 미술사에 대한 관심이 무엇으로부터 시작해야 할 것인가에 대해서 오랫동안 이야기했다. 그 강의를 듣고 한 참가자는 맑은 샘물로 세수한 듯한 느낌이라고 말해 주어 다시 우리를 감동시켰다. 미술사 강좌는 이후 윤덕향(전북대) 이태호(전남대) 윤용이(원광대)등 쟁쟁한 강사진으로 이어졌고 천득염(전남대) 이호관(국립전주박물관장) 이철량(전북대) 이영육(전주대) 등의 특강으로 손색없는 미술사 강의를 이끌어 갔다. 판소리 강좌는 비록 폭발적인 성원을 얻지는 못했지만 판소리 연구에 온생애를 바치다시피 한 최동현 군산대 교수가 주강사로 나섰고 유영대(우석대) 최상화(전북대) 정희천(전북대) 임진택(연극연출가) 김경주(우석대) 심인택(우석대) 유장영(전북도립국악원) 백대웅(중앙대) 천이두(원광대) 김명곤(영화배우)등 쉽사리 접할 수 없었던 한국을 대표하는 국악 전문가들의 특강으로 이어져 알찬 수확을 거두었다. 특히 한국 음악의 현대화 작업을 선두에서 이끌어 가는 백대웅 교수의 강의는 지역 국악인들에게 대단히 감명 깊은 강의로 남았다. 94년 12월 문화저널은 7주년 기념 공연을 예술회관 무대에 올렸다. ‘어울림이 소리맞이’가 그것이었다. 전주를 찾은 여섯 명의 어울림 연주자들은 탁월한 기량으로 관객들을 맞았고 우리 음악이 저렇게 나갈 수 있구나 하는 가능성을 전주의 귀명창들 앞에 선보였다. 슬기둥과 함께 국악 현대화의 싸두마차라 불릴 만한 어울림의 공연은 시종 차분한 가운데서도 관객들의 가슴을 울리는 절정의 연주와 노래로 94년 문화저널의 겨울을 빛내 주엇다. 95년에 들어서면서 문화저널은 특별한 기획 프로그램을 준비했다. 어쩌면 마지막 남아 았는지도 모를 고집센 전통 옹기장이 한 사람이 문화저널의 네트워크에 걸린 것이다. 순내사람 이현배, 만 나이 마흔을 넘기지 않은 범상치 않은 이력을 지닌 이 젊은 옹기 쟁이는 매력적이었다. 그는 애써 자신의 생각과 사는 것을 입밖에 꺼내 말하기 않았지만 그의 말하는 것과 사는 것이 모두 따뜻하게 느껴졌다. 광명단을 발라 그저 반짝거리기만 하는 신식옹기같은 우리들의 가벼움이 새삼 부끄러워졌고, 그래서 문화저널은 그의 작품(?)들을 전시하겠다고 나섰다. 열흘간 우진문화공간에서 열린 그의 전시는 많은 사람들을 감동시켰다. 사람들은 호흡을 생각하는 것 같았다. 전시는 성황리에 끝났고 전시가 끝나는 날 문화저널은 또 한사람의 문화저널 식구를 얻었다. 그해 4월 문화저널은 다시 도전적인 시민문화강좌를 마련했다. 세계 영화 100년의 기념비적인 해에 때맞추어 한국 영화는 제2의 부흥기를 맞이하고 있었고 그 어느 때보다도 영화 산업에 대한 관심이 높아져가는 시기였다. 문화저널이 착안한 것은 ‘영화의 건강성’이었다. 어떤 영화를 볼 것인가, 또 좋은 영화란 무엇인가 극장만 있고 영화의 활력과 토론에 관한 한 불모지에 가까운 이곳 전주에서 영화 전문 강좌를 만들기란 결코 쉽지 않은 작업이었다. 무엇보다도 이렇다할 영화 전문가가 전주에 없었고 영화 이론의 바탕을 이루는 영화 관련 학과도 도내에는 전무한 상황이었다. 결국 3개월간의 기획 프로그램을 들고 서울의 충무로를 찾아 영화전문가들을 만나 가면서 프로그램을 완성되었다. 12개이 주제를 6명의 강사가 나누어 맡았다. 4월 14일의 개강은 영화<장미빛 인생>의 김홍준 감독 그는 대단한 달변과 진지함으로 우리를 놀라게 했고 그의 강의는 예전보다 훨씬 젊어진 청중들과 활기 넘치는 토론으로 진행되었다. 그가 바라본 80년 대와 그가 그린 80년대의 영화가 가지 메시지는 여화사 강좌 전체의 성격을 규정했다. 그의 강의는 영화만큼이나 좋았고 그는 ‘전주는 살아 있구나’하는 느낌을 받았노라고 말했다. 6월까지 이어진 영화사 강좌는 그야말로 전세계적인 영화를 두루 섭렵하는 흔치않은 기회였다. 프랑스과 이탈이아 러시아와 미국, 중국과 한국이 여화가 대형 TV모니터를 통해 보여졌고 페미니즘 특강이 곁들여졌다. 이효인(영화 평론가) 이정하(영화 평론가) 김지석(부산 예술대) 김정용(영호 평론가) 김소영(한국 영상원)등 현재 영화 비평을 통해 우뚝선 전문가들이 문화저널이 프로그램을 위해 전주를 찾았고 관객들과 직접 만났다. 그러나 영화사 강좌는 적어도 흥행(?)에 있어서만큼은 참패를 기록했다. 프로그램의 질을 떠나서 아직은 전주라는 문화공간에 영화가 비집고 들어갈 틈은 좀체 크게 열리지 않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었고 한편으로는 전주가 갖는 문화적 보수성의 결과였다. 95년 6월 ‘전라도의 춤 전라도의 가락’이 네 번째로 무대에 올려졌다. 그 진행에 있어서 비교적 전문적인 분업 구조가 이루어졌고 출연자들은 예전보다는 조금 더 공연 무대에 적응되었다 약간의 무대 연출이 이루어졌고 이것은 공연은 질을 향상시켰다. 발랄한 대학생들의 소고무와 60평생을 한스럽게 살아오면서 몸에 베인 살풀이로 스스로 울었던 애절함이 한 무대에서 어울렸고 그것은 완성도 높은 예술성으로 승화되었다. 문화저널은 8년이 역사 동안 13차례의 공연과 네 차례의 전시, 네차례의 시민 문화강좌 그리고 한 차례의 강연회가 지나갔다. 적어도 흥행에 성공했다거나 폭발적인 대중적 성황을 이루었던 공연이나 강좌는 그리 흔치 않았다. 그러나 문화저널이 일구어 낸 공연과 강좌. 전시 등은 그상업적 성패를 떠나 온전히 문화저널의 정신과 신념으로 남았고 지역 문화의 튼실한 자양분이 되었다 그 작지만 소중한 성과들은 어려운 조건에서도 문화저널의 작업을 높이 평가하고 기꺼이 참여해준 공연 자들과 강사들과 작가들과 함께 나누어야 할 몫이다. 물론 그 문화적 안목을 지키고 문화저널과 호흡을 같이 한 독자들은 지금도 문화저널이 가야할 길을 지키는 가장 강력한 힘이자 채찍이기도 하다 땅과 역사와 노래와 공동체 문호를 향한 걸음 글/원도연 1988년 5월 15일 서른 한 명의 사람들이 낡고 털털거리는 전세 버스에 올라 여행을 떠났다. ‘녹두새를 찾아서!’라고 그 여행을 다녀와서 소설가 이병천은 썼다. 백제 기행의 시작이었다. 우연치고는 알 수 없는 인연이었다. 백제 기행의 첫 번째 목적지가 동학 전적지였다니, 그리고 그 여행의 마지막 행선지였던 백산 성지에 이르러 그들은 정말로 녹두새를 보고 만 것이었다. 백제 기행이 남다를 수밖에 없는 첫 번째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그 백제 기행을 떠나면서 문화저널은 이렇게 붙였다. “우리는 이 땅에 살아간다는 것을 큰 희망으로 여긴다 끝없이 펼쳐진 논과 들, 산과 바다에 우리가 꿈꾸어 온 역사와 노래가 살아 숨쉬고 있으며 이땅을 함께 딛고 서 있는 공동체임을 뿌듯하게 자각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실시하는 백제 기행은 지나간 시대의 유적지를 찾아 해매는 한가로운 여행이 아니다. 우리가 딛고 서 있는 이 땅 한반도를 절실하게 둘러보아 그것을 바탕으로 우리가 생각하고 느끼는 바를 우리 시대와 우리 삶에 환원시키고자 하는 눈물겨운 바램에서이다.” 땅과 역사와 노래와 공동체, 그리고 절실함과 시대와 삶 눈물겨운 바램, 이러 모든 것들은 백제 기행의 화두가 되었고 문화저널의 모토가 되었다. 그래서 이병천은 제1회 백제기행의 감상문에서 “그래서 우리는 케케묵는 기왓장에만 연연하지는 않을 것이다. 우리는 고부, 태인 땅에서 오늘 경운기를 끌고 가는 사람을 만나기도 해야 할 것이며....”라고 선언했다. 백제 기행이 남다를 수밖에 없는 두 번째 이유가 이것이다. 그리고 두 달 후에 백제 기행은 지리산으로 떠났다. 이번에는 ‘지리산을 잡으러’ 간다고 편집위원 김은정은 썼다. 지리산을 찾아간 그들이 잡은 것은 만들어진 역사가 아니라 일어진 역사로서의 지리산이었다. 88년 여름 지리산에서 그들은 비를 만났고 그 빗속에서 백제기행은 지리산의 고난을 느꼈다고 했다. 어찌 쏟아지는 한여름 빗속에서 민족사의 고난을 온전히 느꼈을까만 지리산을 둘러싼 땅과 역사에 대한 백제기행의 관심은 진지했고 통일의 비원으로 여행길을 마감했다. 동학 전적지와 지리산으로 시작된 백제 기행은 어김없이 격월의 원칙을 지키면서 전라도땅 곳곳을 돌아다녔다. 백제 기행이 처음 말했던 한가로운 여행길이 아닌 땅의 역사를 찾고 문화유산을 살아숨쉬게 하는 생명력 넘치는 기행길이었다. 그렇게 해서 사람들 사이에 입에서 입으로 전해진 백제 기행은 이제 문화저널보다도 더 유명한 프로그램이 되었다. 백제 기행이 나서는 길에는 어김없이 기행이 주제가 붙었고 그 주제들은 대개 역사와 삶과 문호와 풍물에 관한 것들이었다. 그리고 그 주제들에 걸맞는 명성과 식견을 지닌 전문적인 강사들이 빠짐없이 초대되었다. 전문적인 강사가 들려주는 역사와 문화에 대한 이야기들은 하루쯤 넉넉하게 여행하면서 술한잔 하고 바람쐬고자 나선 참가자들에게 처음에는 당혹스러움으로 다가서지만 곧 그들은 백제 기행을 온몸으로 이해하게 된다. 그것은 백제 기행의 매력이었고 마술이었다. 동학 전적지의 최현식, 지리산이 장호 교수 등으로 시작된 백제 기행의 강사진은 매번 뜻하지 않은 수확을 가져다 주었고 기행길을 더욱 풍성하게 만들어 주었다. 그렇게 찾아진 땅들이 군산 미곡 창고와 섬진강과 회문산, 남원과 구례의 판소리 기해, 부안과 금산의 백제 부흥 운동, 고창과 부안의 도요지, 익산의 먹거리 문화 등등이었다. 전라도 땅 곳곳에 숨겨져 쉽게 찾지 못했던 역사와 문화의 현장들이 속속 백제기행읠 발걸음에 담겨졌다. 누구도 거들떠 돌아보지 않았던 땅들이 백제 기행의 발길이 닿으면서 사람들의 가슴속에 문화로 새겨졌다. 이름난 곳들은 그댈 숨겨져 있는 사연을 찾아서 또다른 의미를 담았고 때로는 아무것도 없는 너른 들판에서 선조들의 숨결을 고스란히 느끼면서 때로는 아무것도 없는 길과 길을 달리면서도 그 길속에 묻혀진 역사와 옛사람의 고난을 찾아낸 고결한 정신사이 기행이었다. 남원 만복사와 순창과 정읍을 돌면서 아무렇게나 서 있는 길가의 장승과 바위들을 바라보면서 민족의 해학을 생각하고 여인네들의 비원이 서린 성신앙을 이야기했으며 순창이 고추장을 맛보면서 선비 정신을 떠올렸다. 진안 죽도의 강가에 서서 정여립의 반란을 이야기했고 그 속에서 호남의 편견과 지역 차별의 역사를 따져 물었다. 3년여 계속되었던 백제 기행이 제17회를 맞이하면서 백제 기행은 처음으로 전라북도 땅을 벗어나 남도를 향했다. 광주와 전남 보성의 판소리 서편제를 찾아서 길을 떠난 것이다. 이미 한 차례 동편제 기행이 있은 후였고 아직은 서편제니 동편제니 하는 이야기들이 낯설은 때였다. 어떤 의미에서 백제 기행은 기행문화의 선주 주자인 셈이었다. 남도 기행으로 길을 넓히면서 백제 기행은 이제 더욱 풍부한 주제들을 찾아 나섰다. 단풍철의 한가운데 무준 적상산을 찾기도 했고 운주사의 천불천탑과 조선시대의 민화가 주제가 되기도 했으며 법성 포구의 전설과 백제의 미소를 찾아 나서는 기행도 많은 사람들의 관심을 모았다. 구례에 가서 비로서 민중 불상을 만나기도 했으며 바다 건너 보길도를 찾아 고산의 풍류를 다시 돌아보기도 했다. 1박2일의 프로그램에서는 거의 빠짐없이 올려진 소형 공연도 백제 기행이 특색이었다. 수려한 산하와 벗삼아 들어보는 소리 한바탕이 있었고 해금과 아쟁, 대금 등의 국악 공연은 언제나 사람들을 감동시켰다. 적어도 백제 기행에 참여했던 공연 자들은 그들의 기량으로서가 아니라 마음과 정성으로 사람들에게 연주를 들려주었다. 산속 깊은 곳에서는 바람 속에 울고 있는 나뭇잎들이 그들과 공연했고 강가에서는 흐르는 강물리 그들과 공연했다. 백제기행에 참가한 기행이 구성원들은 매번 새로운 얼굴로 채워진다. 주최측의 참가자들을 빼고 거의 모든 백제 기행에 참가했던 사람들도 있었다. 신아문예사의 황의순 여사는 언제나 백제 기행의 한자리를 차지하고 그 넉넉함으로 새로운 참가자들을 맞는다. 그래서 황의순 여사는 이제 백제 기행의 주최측 못지 않게 이 기행이 역사를 꿰뚫고 있다. 여사가 기억하는 백제 기행이 가장 커다란 추억은 회문산이라고 했다. 아마도 제5회째가 되는 ‘회문산이 삶과 섬진강의 문학’이 그 추억 어린 기행인 듯 한다. 지금도 많은 사람들이 기억하는 희문산 기행은 빨치산 출신의 한 노병이 이끌었다 그는 길도 아니 산길을 오르며 자신의 기억 속에 살아 있는 역사를 사람들에게 되살려 놓았다. 회문산을 간단하게 여기고 산길에 올랐던 사람들은 하루 종일 산 속에서 헤매고 무릎이 깨져 가면서 회문산이 역사를 몸으로 체험했다. 아침나절에 올랐던 산길이 해가 지고 어둠이 깔렸을 때야 끝이 났고 그 사이에 참가자들이 먹은 것이라고는 빵 한조각뿐이었다. 그렇게 고통스러웠던 회문산이지만 지금도 백제 기행 가운데 가장 고생스러우면서도 가장 즐거웠던 여행으로 기억되고 있다. 그리고 그 기행을 안내했던 빨치산 할아버지는 몇 년 전 세상을 떠나 회문산을 기억하는 이들의 가슴을 아프게 했다. 땅과 역사와 문화를 찾아 나서던 백제 기행은 95년 해방 50주년을 맞으면서 특별한 기획으로 길을 나섰다. 해방과 분단의 의미를 되새기면서 조국땅 곳곳을 돌아보자는 것이었다. 백제 기행이 드디어 비행기를 타고 바다를 건너 2박 3일 동안 제주도를 돌아본 것이 그 시작이었다. 제주 4·3항쟁을 기억하면서 제주도를 박제된 관광명소가 아닌 삶과 역사가 숨쉬는 땅으로 돌아본 것이었다. 동광리의 큰넓궤에서 백제 기행이 푸른 “우리의 소원”은 제2회 백제 기행지 지리산에서 불렀던 “백두여 한라여 우리는 만나야 한다”에 이어져 있다. 95년이 기획 기행은 6월의 지리산과 8월 여수 순천을 거쳐 10얼 대구를 다녀왔고 이제 휴전선으로 계속된다. 맨 처음 백제 기행이 떠났던 길은 동학 전적지였지만 그 가고자 하는 기행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우리가 일상적으로 스쳐 지나왔던 땅과 역사를 ‘다시 보기’또는 ‘새롭게 보기’의 작업은 아직도 여전한 과제로 남겨져 있다. 올해가 가고 95년에 백제 기행은 다시 그 기나긴 여정을 즐겁게 다시 시작할 것이다 다녀온 곳보다 우리가 가야 할 곳이 훨씬 많으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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