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5.12 | [문화시평]
문화시평
우리가 원하는 우리의 음악
임동창의 초청 작품 연주회
글/심인택 <문화저널>편집위원 우석대 교수 국악과
(2004-02-10 12:03:28)
지난 11월 4일 전북예술회관에서 열린 전북 문화 저널 창간 8주년 기념 연주회를 보면서 난는 많은 것을 생각하게 되었다. 임동창과 더불어 함께 연주에 참가한 사람들의 열연도 인상적이었지만, 무엇보다도 임동창의 삶의 모습이 그대로 무대 위로 펼쳐지고 있는 그 상황에서, 진정한 이시대의 무당을 만났다는 생각에 빠질 수 밖에 없었다.
우리의 음악 생활은 종적인 음악관보다는 횡적인 음악 상황에 빠져 있다. 그래서 음악도 국악이나 양악이라는 용어를 사용하고 있고 한편으로는 양악이 우리 음악인양 오도된 채 그 그늘에서 벗어나고자하는 의식 조차도 찾기 힘든 사회이다.
이런 상황에서 임동창의 음악은 우리 음악의 새로운 지평을 열어주는 계기가 되고 있다. 임동창은 아마도 음악적인 천재적 재능과 창의력을 지닌 사람으로 평가할 수 있다. 그의 음악에 대한 발견은 부모에 의한 강제적인 음악 수업이 아닌 자기가 자기를 발견한 천부적인 과정에서 생겨난 것이다.
임동창은 중학교 시절 우연한 기회에 음악 선생님으로부터 음악적 제질을 인정 받은 후 피아노 수업을 통하여 음악을 접하게 되었다. 얼마 후 임동창은 피아노를 통하여 서양 음악을 깊이 있게 공부하면서 한편으로는 음악을 통하여 자기를 찾는 일에 전념하게 되었다. 급기야 그는 머리를 깍고 산에 들어가 중 아닌 중으로 자신의 인생에 중요한 전환점을 찾게 된다. 군 제대 후 경희대 음악과에 작곡 전공으로 입학한 후 임동창은 그야말로 작곡과 피아노를 통하여 우리 음악의 실체를 만나고자 한다. 10여년 전 김덕수패 사물놀이를 만나면서 임동창은 사물놀이를 공부하기 위하여 각고의 훈련과 채보를 하고 사물놀이의 가락을 자유 자재로 피아노 건반을 올리게 된다. 이로써 그동안 선율 중심의 건박악기였던 피아노는 음정이 있는 유율타악기로 변화했고, 여기서 임동창의 음악 세계를 펼칠 수 있는 무대가 마련된 것이다.
사실 우리 음악의 강점은 연주자가 악기의 기능을 확실히 파악하여 연주자 나름대로의 음악 세계를 악기로 다를 수 있다는 점에 있고 바로 거기서 연주자가 인간문화재요 명인으로서대접을 받는 것인데, 그동안 우리나라에서는 서양에서 수입된 악기를 가지고 이렇게 자유자재로 연주와 창작을 할 수 있는 사람이 나오지 않았다. 그런 점에서 본다면 임동창은 피아노의 인간문화재인 셈이다. 사실 서양에서도 마찬가지로 피아노 연주자 하면 피아노를 가지고 자기의 음악세계를 펼칠 수 있는 사람을 말하는 것인데 아무래도 우리는 피아노라는 악기 자체가 우리의 문화 풍토에서 발생 발전된 악기가 아니기에 짐금까지도 남의 음악을 쫓아가야 하는 그런 상황이다. 임동창의 피아노를 중심으로 하는 음악은 우리나라보다도 구라파 등 외국에 더 알려져 있다는 사실에 우리는 주목하여야 한다. 그가 연주하는 음악은 우리 음악이기에 외국에서도 더욱 빛나는 것이다.
이날 연주 중 ‘여우야 여우야 뭐하니’는 우리가 어렸을 때 놀이 동요로서 아주 쉽게 불렀던 노래이다. 지금도 어린이가 이런 노래를 부르며 놀 수 있는 터가 아주 없어진 것은 아니지만 사실 이노래는 무한한 창의력을준다. 그러기에 임동창은 이 노래의 주선율을 가지고 근 한시간 정도를 연주할 수 있다고 하는데 이날 약 20분 정도를 연주하였다. 아무튼 대단한 일이다. 이‘대단하다’는 말은 임동창이 이 연주를 시작하면서 그의 얼굴과 마음이 바로 도심의 나래를 끊임없이 펼쳐내는 그의 음악 세계로 몰입해 가고 있는 장면이 그렇다는 것이다.
‘조시민의 전래동요 모음곡’은 8곡을 엮어서 계속이어 지는데 이는 그야말로 어른이 부르는 동요로 어쩌면 어린이보다도 어른들이 즐길 수 있는 노래로 만든 것이다. 어른이 어린 시절을 회상하면서 도심의 세계 또 과거의 시간으로 들어갈 수 있는 좋은 노래로, 노래 중 한 옥타브위를 아주 가늘게 노래하는 모습에서 우리의 동요가 갖는 시간의 여백을 충분히 느끼게 해 주었다.
‘달아 달아 밝은 달아’ 는 피아노와 사물놀이가 함께 연주되는 음악이다. 아주 단조로운 선율에 요즘만들어진 사물놀이의 복잡하고 미묘한 가락의 강약을 피아노와 함께 참으로 기가 막히게 연출해 내고 있다. 여기에서 피아노를 선율악기로 보기보다는 타악기로 보는 것이 감상에 도움이 된다. 같은 악기라 하더라도 각 민족에 따로 서로 다르게 볼 수도 있다. 아마 우리 나라에서 서양음악만 하는 피아노 연주자는 이런 상황을 이해하기가 어렵겠지만 우리 나라 입장에서 보면 악기 분류상 얼마든지 가능하다. 그 예로 편종이나 편경이 유율타악기로 분류되고 있다는 것을 들수 있겠다.
‘아쟁과 피아노가 함께 하는 이야기’는 기존의 산조가락 등을 엮어 피아노와 함께 연주한느데 때로는 아쟁의 가락을 받기도 하고 때로는 장고와 같이 장단 반주의 역할을 하고있다.피아노는 대부분이 화성에 의한 반주의 역할로 알고 있는데 바로 이부분이 우리가 미쳐 깨우치지 못한 부분이라 할 수 있다. 우리는 악기의 기능을 눈에 보이는 것만을 선택하기가 쉽다. 그러나 피아노라는 악기의 기능을 다각도로 활용한다면 과거의 우리 음악과도 충분히 교감을 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좋은 예이다.
‘상주아리랑’ 과 ‘우리가원하는 우리나라’에서는 임동창이 하고자 하는 예술세계를 확실히 볼 수 있다. 먼저 상주아리랑은 기존의 아리랑 창법에 서양 창법을 가미한 음악이다. 악기는 선율악기인 아쟁, 유율타악기인 피아노, 무율타악기인 사물이 모여 우리 창법과 서양 창법이 함께 만나는데 원래 상주아리랑의 모습도 살리면서 동서양을 넘나드는 모습을 보게 되는데 이는 흔히 우리가 만나는 연주회하고는 좀 다르다. 우선 연주자가 모두 한마음이라는 사실이다. 영혼의 세계에서 경험할 수 있는 그런 분위기, 서로가 서로를 너무 잘아는 그런 무대 연출을 보게 된 것이다. 임동창의 음악세계는 한마디로 ‘우리가 원하는 우리 나라’에서 느낄 수있다. 오죽하면 우리 나라가 어지럽고 흐트러져 있으면 이런 음악을 만들어낼 수밖에 없느가 하는 생각이 든다. 이노래는 마치 절규에 가깝다고 할 수 있다. 우리 문화 우리 음악도 제대로 만들고 익히고 즐기지도 못하는 주제에 무슨 음악을 한다고...
임동창은 이 시대가 낳은 명인이다. 우리가 명인 명창이라함은 창작기능과 연주기능이 탁월할 때 붙이는 경어이다. 본인은 과분하다고 할지라도 분명 임동창은 명인임에 틀림없다. 또한 임동창은 왜래 문화에 예속되기를 원하는 ‘한국이 낳은 세계적인 음악가’가 아니다. 임동창은 ‘세계가 낳은 한국의 음악가’이다 그만큼 나라를사랑하고 민족을 아끼는 마음이 음악 속에 가득하다 우리가 원하는 또 세계가 원하는 음악가는 바로 임동창과 같은 사람이 아닐까 싶다.
이날 연주회장에서 관객들의 감상 모습도 눈에 아직도 선하다. 과연 ‘우리가 원하는 우리의 음악은 어떤 음악일까’ 하는 기다림을 우리는 보았다.
이철수 그림을 보는 짧은 생각 및 토막
문화저널 초대 이철수 판화전
글/안도현 시인 장수산서고 교사
어느날 나는 중생들이 주고 받는 몇마디 이야기를 엿듯게 되었다. 그들은 이철수의 최근 판화를 보고 나서 느낀바를 서로 이야하는 중이었다. 어떤자가 사뭇 심각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이철수가 지금 가고 있는 곳이 어디일까?” 이물음 속에 적잖은 무게가 실려 있는 탓인지 모두들 두 눈만을 뒤룽뒤룽 굴리고 있었다. 인간이 두 눈을 굴린다는 것은 저의 ‘짱구’를 굴린다 는 뜻이다. “불교적, 명상적, 신적(榊的)세계로 가고 있더군.” 누군가 매우 단순명쾌하게 한 마디를 툭 던졌다. 그가 평론가였던가? “이철수는 중 비슷한 옷을 입고 왜 자꾸 절집을 찾아가지?” “도닦으러 가는 거겠지, 뭐” ,“그럼 그런 쪽 말고 가족이나 생활이 소재로 등장하는 그림은 어떻게 이해해야 하나?” “생활이란 역사의 일부잖아. 그가 일찍이 민중미술 했다는 걸 자네도 잘 알면서 그래. 민짜(民字)들은 생활 그거 참 좋아하거든.” “우리가 생각하는 민중 미술하고 지금 이철수의 그림하고는 뭔가 달라도 크게 다른단 말이야.” “그래, 세상 변했다고 그 친구 지금 막 가는 거 아냐?” “그건 좀 과한 표현이고, 그가 산중으로 , 혹은 고요속으로 점점 깊숙이 걸어 가고 있는 듯한 느낌은 많이 들어.” “그림의 선들 좀 봐. 참 가늘고 부드러워졌지?” “그러다가 이세상 더러운 것들 다 잊어버리고 그만 머리 깍고 입산해 버리는 거나 아닐까?” 중생들은 이런저런 이야기를 좀더 나누는 것 같았으나, 나는 별 흥미가 없어져서 거기서 내 귀를 막았다. 귀를 막았더니 이철수의 그림이 보였다. 귀를 계속 막고 있었더니 대승사 산신각 아래 마른 풀 열매가 부르는 겨울 노래 소리가 들려왔다. 그리하여 나는 나에게 물어 보았다. ‘이철수는 과연 지금, 그 곳으로 가고 있는 것일까, 아니면 이 곳으로 오고 있는 것일까?’
봐라
꽃이다!
봄날이
길 떠나기는
좋지.
가야겠다!
있거라.
<좌탈>연작 중 내가 제일 좋아하는 이 말씀. 그의 그림에서 이제 떼어 놓을래야 떼어 놓을 수 없는 이 시적말씀의 눈부심을 나는 전에 시쓰던 자로서 ‘영역 침법’이라는 꼬리표를달고 투정을 부린 적이 있는데, 투정을 넘어 강력하게 항의를 해야 할 지경에 이르렀다. 그림은 물론 이거니와 말씀이 이미 한 경지를 이루고 있지 않는가? 기승전결이 무어냐고 묻는 학동이 있다면 나는 이 말씀을 또박 또박 배껴 줄 것이나, 삶에서든 죽음에서든 초월이 이렇게 당당하고 힘찬 소리를 내는 것을 나는 본 적이 없다.
이철수의 ‘말씀’뒤에 느낌표와 물음표가 유독 많이 붙는 까닭은? 마침표의 구태의연함이 싫다는 뜻이고, 이 세상 물상 하나하나에 부처가 다 들어 있는 것처럼 그의 눈길 닿는 곳이 다 감동의 도가니라는 뜻이고, 그만큼 삶의 감동을 발견할 줄 하는 선한 눈을 그가 가졌다는 뜻이고, 그래도 아직 그의 눈은 궁금한게 많다는 뜻이고.
광어 큰놈으로 골라 염하고 항물 끼얹어 장식을 두르니
그 한 접시가 꽃상여 같구나.
아이야. 잔 돌려라. 어차피 조문이다.
존재의 깊은 곳을 툭 건드리고 가는 서늘한 바람소리가 들린다. 이철수는 비록 아무일 아니라는 듯이 세상의 한쪽을 툭 건드리고 가지만 그 소리를 들을 자는 그만 가슴이 뜨거워진다. 그의 그림 앞에서 굳이 생활이며 시대며 역사며 불교 따위를 보려고 하지 말 일이다. 그것은 달 대신에 손가락 끝을 보는 것이다. 그런 것들은 모두 존재라는 말 앞에서 기가 죽는다. 뜬금없이 무슨 ‘존재’냐고 물으실 것 같아서 이철수는 말한다. ‘삶을 조용히 지켜보는 눈이나 경험이 그림을 이해하는 데 더 쓸모있고 소중해ㅈ게 되기를’ 바란다고. 비록 잔잔한 어투로 말하고 있지만 이건 대중에게 보내는 아주 노골적인 사랑 고백이다. 그는 보편적 감동이 세계를 목판 위에 새겨 살려내고자 하는 아죽 욕심 많은 작가인 것이다. 붓이 겨누어야 할적이 분명하게 보이던 시절에 보편적 감동 운운 하는 것은 전열을 흐뜨러려는 음모이거나 현실에서 눈을 돌리기 위한 변명에 불과했다. 그러나 이철수는 이제 누구보다 용기 있게 보편적 감동을 그려내겠다고 말하고 있고, 실제로 그것을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다. 고은 선생이 탄복한 뛰어난 그의 ‘검술(劍術)’에다가 ‘서서 흐르는 개울’을 보는 눈을 그는 가지고 있다. 또한 무엇보다 그의 칼끝이 존재의 중심을 정확하게 향하고 있는 것이다. 아, 이철수의 무기는 바로 ‘존재’로구나.
가을볕이 찬란한데, 큰길에는
흙먼지 날리는 차만 바쁘다. 아까운 별을
쓰지도 못하고 버리는구나. ‘아까운 가을볕 나나 쓰자!
<고추 말리기> 라는 작품이다. 이 작품의 끝 문장을 나는 두 가지로 읽는다. ‘아까운 가을볕 나누어 쓰자!’로 읽을 경우, 발화자는 작가 자신이 된다. ‘나누어’가 ‘나눠 -> 나놔 -> 나나’로 변형되는 것을 안다면 우리는 발화자의 간절한 호소 앞에 저절로 마음이 따뜻해지는 것을 느끼게 될 터이다. 이와는 달리 ‘아까운 가을볕 나 혼자나(나라도)쓰자!’로 읽을 수도 있다. 이경우에는 발화자가 마당에서 말라가는 고추가 되는 셈인데. 이것이 고추가 인간이나 우주에 던지는 말이라고 생각해 보자. 그 또한 전율 아닌가!
아무래도 이철수는 가는 세월이 아니라, 오늘 세월 같다. 그는 판화로만 오고 있는 것이 아니다. 그는 발목을 걷어부치고 지금 논 가운데로 성큼성큼 걸어 오고 있다. 중생들이여, 우리가 다 익은 벼로 서 있다고 한다면, 그벼의 눈을 가지고 있기만 한다면, 저기 오는 그를 볼 수 있으리.
변혁의 열정에서 대안과 생활의 문화로
‘우리마당’정기공연과 ‘그림마을’의 첫 번째 전시
글/원도연
다시 ‘80년대가 각광받고 있다. 전직 대통령 두 사람이 연이어 구속되고 5.18이 연일 상종가를 두드리는 깜짝 놀랄 일들이 우리 앞에 벌어지고 있는 것이다. 우리가 살아왔던 ’80년대는 도대체 무엇인가. 한해를 보내는 감상에 보태 지나간 세월에 대한 희한들이 사람들 저마다의 가슴속에 허무하게 자리잡고 있는 듯 하다.
그속에서 지난달과 이번달에 우리는 색다른 공연 한편과 조금은 뜻밖인 전시회를 만나게 된다.놀이패 ‘우리마당’과‘그림마을’이 앞서거니 뒤서거니 그동안의 활동들을 모아 사람들 앞에 내놓은 것이다. 두 단체는 모두 아직도(?) ‘80년대로부터 영양을 공급받으며 활동하는 전문 사회인패들이다. 그들이 가지고 있는 무기는 서로 다르지만 그들의 감성과 의식과 지향은 무척이나 흡사하다. 그들의 나이 20대 초반에는 ’모든 예술의 변혁의 도구이다‘라는 명제를 가슴에 품었고 대학의 울타리를 벗어나서는 한참의 방황기를 겪었으며, 바로 윗 세대의 선배들과는 또 다른 길을 선택했다. 그리고 그들이 최종적인 선택은 ’대중과 함께‘로 표상되어 있고 지난한 실험작업을 통해서 진정으로 단련되고 있는 것이다.
놀이패 ‘우리마당’은 지난 11월 12일 정기공연<경사났네 , 경사났어>를 무대에 올렸다. 그들의 주전공인 사물놀이는 물론 춤과 슬라이드, 극 , 마임, 노래, 춤, 민요, 설장고, 판굿 등에 이르기까지 전통적인 마당놀이의 요소에 새로운 시도까지 그야말로 온갖 장르의 놀이양식이 무대를 가득 채웠다. 그러나 공연은 그다지 훌륭하지 못했다. 전통적인 무대공연의 관점에서 본다면 그들의 무대는 전혀 세련된지 못했고 문제의식을 제도로 표현하지도 못했다는 혹평을 받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무대가 실험적으로 평가되고 우리의 관심을 모았던 것은 그 무대에 선 ‘우리마당’의 식구들이 잘 훌련된 전문적인 예인들이 아닌 순수한 동호인들로 이루어졌다는 점이다. ‘우리마당’의 김선태 대표(28)는 공연의 참가자들이 ‘무대에 적응하지 못했다’고 지적했고 진정한 놀이판의 궁극적으로 무대에 걸맞는 것인가에 대한 회의를 느꼈다고 한다.
그날 무대에서의 실패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전혀 위축되지 않았다. 한전에 다니는 아저씨도, 집에서 살림하는 아주머니도 예술회관의 무대에 설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스스로 확인했다는 데 대해서 서로 대견해 했다. 위축되지 않는 그들의 여유는 그들이 지향하는 새로운 민족민중문화의 양식이 이전의 문화적 질서와는 질적으로 다르기 때문이다. 그들은 여전히 이 지역에 하나뿐인 뜬패로서 전문적 기능에 대한 깊은 갈증을 버리고 있지 않지만 그들이 중시하는 것은 기능이 아닌 ‘내것에 대한 자신감’이다. 그리고 그들은 하나의 놀이판에서 서로 공유할수 있는 ‘느낌(또는 정서)’에 충실하고자 한다. 그들이 지향하는 ‘놀이’는 그래서 고급화된 문화로서가 아니라 대단히 일상적인 것이다. 매주 수요일에 모여서 굿을 치는 그들은 매월 보름이면 어디든 달빛 아래서 한판을 신나게 놀이판을 열어 끊겨진 놀이의 진정성을 되살리기를 바라고 있다.
크게 보아 ‘80년대 ’녹두골‘과’온고을‘을 이후 명맥이 끊겼던 풍물패 운동은 ’90년대에 들어서 ‘우리마당’으로 이어져 있다. 10년 세월의 변화만큼이나 형식과 내용은 완전히 바뀌었고 엄연히 성격을 달리하지만 아직도 이런저런 시위현장이나 행사장에서 그들은 여전히 궂은 일을 마다하지 않는다. ‘우리마당’은 창립 5년 만에 40여명의 회원을얻었고 수많은 강습회원들이 그곳을 거쳐갔다. 전통에 기초하면서도 단순한 전통문화의 재현에 머무르지 않고 우리의 삶 전체를 신명난 놀이판으로 바꾸어 거리로 공원으로 그 놀이판을 가져가겠다는 그들의 의지는 아직은 실험적이지만 건강한 문화의 미래일 수 있다.
‘우리마당’보다는 2년 늦게 ‘그림마을’은 시작했다. 민중미술의 흐름에 서서 ‘90년대 초반의 ‘겨례미술연구소’ 시절을 거치고’ 92년 대선의 패배와 함께 미족민중미술전국연합이 해소되자 제2의 홍성담을 꿈꾸던 젋고 충만한 문제의식을 가지고 있던 ‘80년대 학번들은 다시 새롭게 몸을 만들었다. 그때의 상황을 두고 ’그림마을‘의 양선형(30)대표는 ’조직의 위상을 낮추면서 한편으로는 민미련의 해소가 아닌 낮은 차원에서의 조직변화‘가 필요했다고 말한다. 민미련이 지나치게 정치적이고 선전적인 미술가들의 모임에 그치면서 결과적으로 대중성을 잃고 창작활동 마져도 부재한 상황을 불러왔다는 것이 그들의 문제의식이었다.
그들이 민미련 시절에 느꼇던 많은 문제와 한계들을 이 제는 직접 해결하고 풀어나가겠다는 의지가 ‘그림마을’의 창립으로 이어진 것이다. 그렇게 만들어진 ‘그림마을’은 ‘93년 창립때부터 지금까지 대중 강습과 꾸준한 훈련을 거쳐왔다. 한편으로 미술인구의 저변을 확대하는 역할을 담당하면서 ’그림마을‘이 지향했던 미술을 일상생활과 가장 근접한 그림이었다. 저눈가와 비전문가와의 경계를 극복하고 민중미술과 생활미술의 차이를 좁혀 가는 작업인 ‘그림마을’의 주된 작업이 되어왔다. 그림의 소재가 투쟁적인 이미지에서 생활상의 소재로 넘어오면서 그들이 집요하게 추구한 것은 그림속에 자신의 삶과 생활이 어떻게 녹아드는가 하는 것이었다. 결국 좋은 그림과 좋지 않은 그림의 차이를 삶과 미술이 어떻게 만나는가의 문제로 결정짓는다는 것이다.
그렇듯 진지한 고민 속에서 이루어진 작업의 결실이 12월 15일 예술회관에서의 전시로 첫 열매를 맺는다. 이번 전시에 올려지는 작품은 4점의 찬조 작품과 9명의 정회원이 두 점씩 내놓는 18점으로 구성된다. 이 전시가 사람들에게 어떻게 보여질지 어떻게 평가받을지 아직은 알 수 없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그들이 듣고 싶어 하는 것은 민중미술의 적자라는 어색한 이야기보다는 ‘그림 잘 그리더라’는 소박한 칭찬이다.
창립 3년 만에 처음으로 갖는 전시회는 그래서 여느 전시와는 다를 수밖에 없다. 그들의 전시를 통해서 우리는 ‘80년대 민중미술의 패기 만만한 운동가들이 어떻게 생활인으로 변화해 왔는지를 가늠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어려운 살림살이를 지탱해 오면서 포기하지 않고 그들이 들고 온 것이 무엇인지를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진정한 ‘우리의 놀이’를 창조해 보겠다는 우리마당이나 ‘생활이 있는 미술’ 이라는 새로운 도전에 나선 그림마을의 노력과 결실은 한 시대를 정리하면서 대안의 문화가 어떻게 형성되는가를 보여준다. 그리고 그들은 이미 그대안을 향해서 힘차게 뛰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