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5.12 | [서평]
서평
세련된 안목과 해맑은 문체의 지긋한 멋
최성자<한국의 멋 맛 소리> (혜안, 1995)
글/송정수 전북대 교수 사회교육과
(2004-02-10 12:13:43)
근 10년간 문화재 전문기자로 활동하며 수많은 문화재와 전통문화 관계기사를 발표해온 최성자 기자가 그동안 발표,미발표한 기사를 정선하고 다듬어 한권의 책으로 묶어냈다. 우선 이 책은 다루고 있는 내용도 내용이지만 이 내용을 담은 그릇인 정갈한 문장에 눈이 간다. “최성자 기자가 한국의 미에 관해 쓴글은 항시 나에게 호젓한 산사에 올라 마시는 한모금 감로수 같았다. 아주 세련된 안목으로 유물을 선택해서 해맑은 문체로 설명하는 까닭이다”라는 유홍준 교수의 평에 고개가 끄덕여진다. 여기에 담고 있는 내용 또한 쉽게 접하기 힘든 국보를 둘러싼 화제로부터 지금은 잊혀졌거나 잊혀지고 있는 일상 사물속에서 전통문화의 숨은 풍취까지 그야말로 다채롭게 채워져 있다.
이 책은 크게 다섯 개의 장과 하나의 부록으로 이뤄져 있다.
첫 번째 장에 해당하는 문화유산의 취재현장 편은 ‘국보 중 국보 금동 용봉 봉래산 향로 취재기’, ‘백제미륵사지에서 발굴된 사람뼈와 벽화 조각’ , ‘백제 왕릉 송산리 6호분 유물의 미스터리’ , ‘뒤바뀐 국보 - 신라 토기’ , ‘조선 후궁의 한이 서린 철궁’ 의 5개 단편으로 이뤄져있다. 제목만 보아도 알 수 있을 만큼 유명한 국보급 문화재에 관련된 것으로 모두 필자가 직접 발로 뛰면서 취재한 것들이라 현장감과 긴박감이 생생하게 묻어나 있다. 문화제에 얿힌 이러저러한 뒷이야기를 접하기 어려운우리 상황에서는 대단히 관심이 가는 글이 아닐수 없다. 이 중에서도 특히 관심이 가는 것은 93년 12월 발굴된 금동 향로 기사이다. 당시 이 향로는 문화재 기사로서는 드물게 신문 1면 톱을 화려하게 장식하며 세인을 놀라게 했는데, 기사화 되기 전에 이 향로를 처음으로 마주한 필자의 떨리는 감동과 흥분이 그대로 전해지고 있다. 또한 이 세계 제일의 향로가 발견된 경위, 구조와 세부 내용, 가계 전문가의 다양한 의견, 향로의 취급이나 보존 처리의 문제 등에 대한 흥미진진한 질술은 문화재 전문서적이나 단편적인 신문기사 등을 통해서는 도저히 접할 수 없는 드믄 글이다. 특히 향로의 췹급이나 보존 처리 관계기사는 문화재에 대한 사람들(일반인만이 아니라 전문가까지 포함해서)의 극히 낮은 인식수준에 대해 경종을 울려준다. 필자의 이런 비판은 원래 국보가 아니었단 ‘흙인형이 달린 뚜껑있는 높은 잔’이 문화재 지정 자료를 만들던 담당직원의 실수로 국보로 둔갑해 있었던 사실이 10년 후인 1988년에야 밝혀져 ‘흙인형이 달린 목이 긴 항아리’가 진짜 국보로 정정된 경과를 담은 기사에서도 날카롭게 지적되고 있다. 행정적 편의 때문에 조선 후기의 청초한 건축 향식과 정원 양식을 그대로 담은 칠궁이 페허가 되다시피하면서 지금은 사람들의 관심 밖으로 밀려나버린 안타까움을 전한 글도 마찬가지 입장에서 쓰여진 글이다.
2장 ‘멋’ 편은 크게 생동감 넘치는 취재기사와 문화재 만이 아니라 일상생활속에서 발견되는 전통의 빼어난 멋을 담담하게 그려낸 기사로 이루어져 있다.전자에 해당하는 것이 베니스 비엔날레에서 특별상을 수상한 화가 전수천의 진솔한 삶과 쟁이정신을 담은 ‘사람의 얼굴 신의얼굴’ , 돌아오지 못하고 있는 우리 문화재의 설움을 담은 ‘일본 속의 한국문화재 1.2’이다. 후자는 ‘아름다운 우리 옷 한복 예찬’ ,‘맵시나는 옛 복식’ , ‘선비문화의 운치’ ,그림과 음률의 멋‘ ,’삶과 죽음의 경계, ‘깨달음과 수도의 도량’ 등의 단편에 다양한 전통한복,서안,마패,신육복의 봄그림,청사초롬,거북빗장,만장,목어,풍겨등이 주제별로 묶어져 소개되고 있는데 마치 아스라한 아름다움과 신비스러운 느낌들이 손에 잡힐 듯 이 묘사되어 있다.
‘맛’편은 우리의 여러 전통음식을 다룬 ‘김치,입맛 돋구는 그 세계적 음식’ ,‘ 멋쟁이떡 절편과 떡살무늬’,‘양념, 그 감칠맛’,‘우리술, 그 독특한 향취’와 주로 똬리나 수저집 같은 것을 다른 ‘부엌살림의 미’로 이루어져 있다. 김치와 양념의 경우에는 그렇게 종류가 많았던가 하는 생각에 새삼 깜짝 놀라게 된다.
‘소리’편은 지금은 거의 듣기 어려워진 일살에서 울려나오는 추억의 소리인 ‘여인네의 가슴앓이,다듬잇돌 소리’,‘구도의 길 일깨우는풍경소리’,‘불 쇠 노동의 행복의 만남, 대자간 소리,’농부들의 벗님네, 농요,‘어우러진 삶의 장, 장터 소리’,‘파도에 실어 보내는 어부의 삶, 남해안고기잡이노래’,‘지난 시절의 자화상, 찹살떡 메밀묵 사려’,‘산이 부르는 소리 메아리’,‘봄의 서곡,골짜기의 물 흐르는 소리’와 듣기만해도 어찌나 정겨운지 저절로 웃음이 피어오른 ‘아파트촌 아이들의 와자지껄한소리’ 까지 담고 있다. 글을 토해 소리를 듣는다는 것이 이런 기분일까. 을씨년스러운 바람이 창문을 때리는 때 조명등 아래 등받이 의자에 몸을 편하게 젖히고 눈을 감고 있으면 이 소리들이 멀리서부터 천천히 들려올것만 같다.
위의 네 장이 각각 대상을 달리하고 있으면서도 거의 비슷한 감동을 줄 수 있는 것은 화려하든 소박하든,섬세하든 거칠든, 진지하든 농스럽든 모두 지금의 우리를 만들어낸 숨을 담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 필자는여러 어려움속에서도 이러한 옛 것을 지키는 사람들을 좋아한다. 마지막 장에 해당하는 우리 멋,맛,소리를 지키는 사람들 편은 그러한 사람들을 그린 것으로 과정없이 잔잔하게 서술하여 오히려 감동을 준다. ‘꽹과리에 바친 삶, 마지막 유랑인 최성구’,‘조선의 마지막 나라목수 배희한’,‘격동의 시대 전통 음악에 생애를 바친 풍각쟁이의 아버지, 하규일’,‘부 끝에 혼신 팔십 평생을 불화 외길,단청 인간문화제 이만봉’,‘우리옷의 아름다움을 지킨 복식 연구가 석주선’,‘궁중음식의 인간문화제 황혜성’,‘전통 벽돌 기와 연구가 김영림’,‘우리네 여인의 숨결과 더불어 산 한국자수박물관장,허동화’,‘전통 화장 문화 연구의 외길, 태평양 박물관장 전완길’,‘간송미술관의 재가승 미술사학자 최완수’,‘사금피리를연구한 위당 정인보의 아들, 정양모’,‘문화재 전문 사진 작가 한석홍’이 그들이다. 여기에서 소개된 사람들은 사실 각각의 방면에서는 내노라하는 사람들이지만 극히 소수를 제외하고는 대부분 사람들의 시선을 거의 끌지 못한 사람들이다. 그만큼 우리 전통문화에 대한 관심이 약한 탓이리라. 앞으로 그려낸 전통문화에의 감동을 계속 간직하고 후손에게까지 남겨주기위해서는 이러한 사람들이 반드시 필요하며 또한 사랑을 받아야 한다. 필자가 특별히 하나의 독자적인장을 부여하여 이들을 서술한 것은 이때문일 것이다. 그리고 사람들이 그다지 주목하지 않는 전통문화등을 포함한 특별한 것들을 보존하고 전시하는 이색 전문박물관을부록으로서 소개하고 있는 것도 같은 생각에서일 것이다.
간결하고 담백한 문체, 해박한 역사적 지식, 국보급 문화재만이 아니라 일상적인 것들까지 포함한 전통문화에 대한 넘치는 애정, 풍부하고 적절하게 뽐아 내어 배치한 사진들, 이 책을 빛나게 해 주는 것들이다. 이는 아직 전문가들의 영역으로남아 있는 문화재에 일반 대중이 보다 쉽게 접근하여 관심을 가질수 있도록 다리를 놓아주었다는 점에서 높이 살만하다. 물론 몇가지의 집중주제를제외하면 내용상 각주제에 대한 설명이 지나치게 간략하게 처리된 감이있어 보다 상세한 설명을 곁들였다면 하는 아쉬움이 없지는 않다. 거기에 향로를 제외하고는 전부 흑백으로 처리된 사진을 컬러로 했더라면 정말 금상첨화일텐데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지나친 욕심일까.
낮선 사랑의 노래
박남준<그 숲에 새를 묻지 못한 사람이있다>
서울:창작과 비평사, 1995.
글 정철성 <문화저널>편집위원 전북대 강사
박남준의 세 번째 시집을 받아 들고 넘겨보았을 때 불만이 먼저 목에 걸렸다. 속표지에 한자로 쓴 그의 이름이 틀린 것은 출판사 실수이니 재판 찍을 때 고치면 되고, 이름 위 사진이 너무 어두운거야 말하기 좋아하는 사람의 공연한 트집에 불과할 것이요,<그 숲에 새를 묻지 못한 사람이 있다>라는 제목이 마음에 안드는 것은 취향이 다른 탓으로 돌리면 그만이다.오래 기다렸다는 것도 사정을 아는 사람에게나 통할 법한 투정이지 세상사에 정해진 시간에 대저 어디 있단 말인가. 네 개의 가제목 아래 차례까지 붙여서 만들었던 그의 초고 파일에는 작년 구월 날짜가 찍혀 있었으니 초고를 정리하고 시집이 나오기까지 일년 이상이 걸린 셈이다. 물론 달라짐 점이 없는 것은 아니어서 그 사이에 쓴 열다섯 편의 시들이 ‘미친 사랑의 노래’ 등이 빠진 자리를 채우고 있다. 이런 것들 말고 내가 느낀 불만은 초고의 균일함이 완성판에서 오히려 깨뜨려졌다는 점이었다.
연애시가 거의 대부분인 이 시집에서 우리가 만나는 것은 부담스러우리만큼 지순한 사랑의 감정이다. 새로울 것도 없는, 구시대의 잔유물로 느껴지는 연애감정이 박남준의 시에서는 낯선 느낌으로 다가온다. 그러나 그의 감정처리 방식을 들여다 보면 그것이 전통적인 방법의 변형이라는 것을 짐작할수 있다. 쉽게 사랑하고 쉽게 포기하는 이 시대의 저울질에 역행하여 그는 욕망을 최소화함으로써 감정을 해소하려는 고행을 실천한다. 시인은 “욕망이 다한 페허를 택해 숲의 입구에 무릎 꿇고 엎드렸던”(10) 것이다. 금욕주의와 맞물리는 것처럼 보이는 그의 방법은 만족의 극대화를 미리 가정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금욕주의 와도 거리를 유지한다.
같은 시의 “새를 묻지 못한 사람이 포자의 눈물같은 습막을 두르고 숲의 어둠을 떠다니고 있다”는 마지막 구절에서 우리가 보는 것은 운명처럼 통제를 거부하고 날아오르는 새의 모습이다. 포자와 습막이라는 한자어의 이질감은 산을 가로막고 서는 밤안개의 불가해성을 표상하지만 동시에 건너편에 있을 새의 그림자를 쫓는 시선의 궤적이 반영되는 화면의 구실도 한다. 여기서 사랑의 대상으로서의 새는 ‘산중’과‘세상’의 두 범주를 동시에 벗어나는 물상이며, 초고의 시들에서 유지되던 숲의 시인과 세속의 연인이라는 이분법을 파괴하는 존재이다.
이시집은 ‘짐승의 울음’(65)을 우는사내의 기다림과 그리움이 ‘씁씁한 자조’(40)를 거치면서 분해되는 과정의 기록이다. 박남준의 시에는 새와 꽃과 나무의 이름이 지천으로 등장한다. 이러한 대상들이 종종 사랑의 투영으로서가 아니라 사랑의 불가능성을 확인하는 도구가 된다는 점이 쉽게 이해할수 없는 부분이다. 시기가 없서는 시들에서는 세상과 산중을 사이에 두고 길이 있었고. 이길끝에서 뒷모습을 보이는 자가 주로 화자로 등장했다. 그는 ‘가슴에 못을 박은사랑’(46)을 보냄 인물이지만 적어도 기다림의 여지를 지우지 않았다. 그러나 페허를 이르고 보면 도대체 ‘오랜 죽음의 병’(58)의 원인 조차 불분명 해지고 만다.
나의 불만은 아마도 뒤엉킨 심리의 흐름을 추적하는 일이 괴로움에서 비롯된 것인지도 모른다. 그렇다면나의 짜증은 결국 게으른 독자의 불만에 불과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마디 덧붙이지 않을 수 없는 것이 박남준이 사랑의 대상을 직접 묘사하는 법이 없다는 사실이다. 그의 연인은 눈매와 미소를 보여주지 않고 다만 멀리 ‘저 산 그 어느 강 너머’ ‘산국 같은 향기로’(59) 존재할 뿐이다. 이런 까닭에 나는 그의 사랑이 아니라 사랑의 대상에 대한 생각의 되새김질은 아니라는 의심을 품는다.
박남준의 시들이 자학의 분위기를보이는 것은 그를 아끼는 사람들에게는 안타까운 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나가는 충고가 별로 쓸모가 없으리라고 믿는 것은 그가 세상을 바라보는 태도의 일관성 때문이다. 아무도 그의 병을 고치려 약을 쓰지 않는다. 그의 사랑에서 다소 신파냄새가 나는 것은 사실이지만 우리들의 시대에 이 비슷한 순정을 찾기가 어디 쉬운일인가? 나도 그저 너무 날을 세우지 말라고 들릴 듯 말 듯 중얼거릴 뿐이다. 최영미가 발문에서 언급한 예의 “당신은 무슨 일로 그리합니까”하고 시작하는 노래만하더라도 흘려서 들으면 절창이지만 마음이 어긋나면 듣고 있는 사람들까지 한심해 보이는 기묘한 장면을 연출하고 마는 것을 그가 알고 있을 것이라고 믿기 때문이다.
시인을 알고 시를 읽는 것이 때로는 의미의 확장을 차단할 수도 있다. 그러나 덕을 부지 않는 것도 아니어서 행간에서 시인의 육성을 직접 느낄 수 있음은 이런 함정을 피하려는 수고를 보상하고도 남는다. 그의 목청에 귀 기울여본 경험에 비추어보면 박남준의 시는 아주 천천히 읽어야 제맛을 느낄수 있다. 그가 문장의 중간에 가끔 사용하는 쉼표의 의미의 공백을 삽입시킴으로써 자연스러운 속도로 진행하는 독자의 시선을 방해한다. 그의 시는 오뉴월 게으른 전라도 햇빛이 느려터진 발걸음으로 알게 모르게 곡식을 익히미 들은 건너가듯이 느릿느릿 음보를 밟아 간다. 이것을 느끼기 위해서는 각각의 시를 소리내어 읽는 편이 좋을 것이다.
오늘 저녁에는 새벽강에 나가 한잔술을 따르고 ‘상처받은 자에게 쑥부쟁이 꽃잎을’(46)띄워보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