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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5.12 | [신귀백의 영화엿보기]
영화평 다시 세상에 온 스물 두 살젊음 <아름다운 청년 전태일>
글/이정하 영화평론가 (2004-02-10 12:22:19)
지난 여름 나는 문화저널의 영화 강좌에 참여하느라 전주를 자주 찾았다. 전주는 전주,원주와더불어 내가 좋아하는 도시이다. 하여간 그일로 이지면까지 얻고보니 한편 고맙기도 하고 새삼 인연을 소중함을 생각하게 된다. 그때 끝까지 남았던 수강생들 중에 당시 한창 촬영이 진행중이던 영화 전태일에 대해 묻는 이들이 많았다. 어떤이는 제작 후원금을 내겠다는 이도 있었고 또 어떤 이는 촬영장에 단체로 견학을 가자는 말까지 한 것으로 기억하고 있다. 그들이 영화가 완성되어 극장에서 공개된 지금 어떤 느낌을 갖고 있을지 퍽이나 궁금하다. 영화 <아름다운 청년 전태일>의 마지막 장면은 많은 것들을 생각하게 한다. 영화가 끝났다고 생각한 다음에도 관객들은 무려 7천 8백 48명의 이름들을 읽어내려가야하기 때문이다. 그 이름들은 모두 이 영화르 만드는데 제작 후원금을 낸 사람들이다. 애초 이러한 제작 방식은 한국영화의 현실을 알고 있는 이들에겐 위험하기 짝이 없는 것으로 보였다. 그러나 승리한 쪽은현실을 근심한 이들이 아니라 현실을 번혁하고자 한 사람들이었다. 제작 방식의 측변에서 <아름다운 청년 전태일>은 한국영화의 물줄기를 바꿀 독립영화의 위대한 승리로 기록될 것이다. 80년대 중반부터 시작된 이 땅의 민중영화운동은 87년 8월항쟁과 노동자대투쟁을 거쳐 만만찮은 발전을 기록했지만 90년대 들어 그 기세는 꺾인 듯이 보인다. <파업전야>는 그 포물선의 정점에 위치한 작품이다. 일이 이렇게 된 데에는 90년대 사회환경의 금변 탓도 있지만영화운동을 하는 사람들의 잘못도 컷다. 특히 영화운동의 전망을, 한국영화의 전체 판을 바꾸는 공격적이고 대담한 방향에 두지 않고. 16밀리 소형영화와 비제도권의 울타리에 가두어버린 것은 아무래도 소극적인 태도였다. 다행스럽게도 최근 들어 독립영화에 대한 논의가 활발해지고 있지만 여전히 그 소극성은 온존되는 듯하다. 독립영화란 영화에 가해지는 지배적 정치경제체제의 압박으로부터의 자유를 추구하는 영화를 말한다. 그런데 흔히들 독립영화를 고립영화로 오해한다. 이런 측면에서 볼 때 <아름다운 청년 전태일>은 앞으로의 독립영화가 갈 길을 실천적으로 밝혀주고 있다. 평화시장의 한 재단사가 “근로기준법을 지켜라!”고 부르짖으며 스스로 물을 불태웠던 사건이 일어났던 것은 1970년 11월 13일의 일이었다. 전태일이 처음 조직한 모임이 ‘바보회’ 였거니와 그는 정말 바보같은 사람이었다. 그러나 그는 죽은게 아니었다. 그는 스물두살에서 젊을 영원히 멈춘 채 어둡고 찬바람 부는 70년대의 들판에서 늘 불빛으로 살아있었다. 그러나 그 때문에 청년은 하나의 신화가 되어야 했다. 그런데 전태일은 영화속에서 웃고 있었다. 박광수 감독은 신화의 장막에 가린 그의 고뇌와 벌거벗은 몸과 그의 천진한 미소를 잡아낸 것이다. 영화는 전태일의 신화보다는 전태일의 진실에 다가가고자 한다. 이점이 이영화의 미덕이자 우리가 진정 보아야 할 것이다. 그가 간지 25년이 지나서 우리는 다시 세상에 온 그를 만나게 된 것이다. 1970년 11월 13일 영화의 끝이 아니라 오히려 기점이다. 이것은 이영화를 , 박광수가 ,전태일의 죽음으로 마감되는 전기영화가 아니라 80년대 중반부터 1970년대 중반까지 10여년의 역사를 총체적으로 재조명하는 ‘전태일과 그의 시대’에 관한 영화로 만들고자 했음을 말해주는 것이다. <아름다운 청년 전태일>은 크게 두 요소로 구성되어 있다. 하나는 전태일의 삶을 기록적으로 재구성한 부분이고 다른 하나는 전태일의 삶을 쫓는 한 지식인 활동가의 생활을 그린 부분이다. 영화는 지식인 활동가 감영수(문성근)가 전태일의 짧은 삶의 매듭을 평전으로 풀어가는 과정을 기본축으로 해서 전개된다. 전태일의 죽음 이후에 시간을 이어받은 김영수(문성근)는 고 조영래 변호사나 장기표 씨를 떠올리기도 하지만 그는 크게 보아 70년대 내내 전태일의 죽음에 충격받아 노동운동의 횃불을 당긴 민주노조 1세대를 상징하는 인물이기도 하다. 영화는 지난해 민주노총 준비위 결성식을 담은 기록화면에서부터 시작한다. 이어 화면은 흑백으로 바뀌어 거뭇하게 번들거리는 기름, 손에 든 근로기준법, 라이터불을 켜는 손,튀어오르는 작은 불꽃송이를 비춘다. 그리고 다시 화면은 인혁당 관련자들이 사형을 당하던 시점인 70년대 중반의 허름한 셋방으로 옮겨간다. 그곳에서 김영수는 전태일이라는 화두를 붙들고 있다. 그의 시선으로 평화시장 시다로 들어가면서부터 분신하기까지의 전태일의 굵다란 삶의 순간들이 되살려진다. 실밥이 백열등에 엉겨붙은 다락방 공장의 시다생활, 재단사 시절, 근로기준법의 발견, 어린 시다를 돌보는 장면, 바보회의 결성, 삼각지 노동판 생활 견단, 삼동회 결성, 시위 , 그리고 운명의 11월 13일. 영화는과거는 흑백화면, 현재는 칼라로 잡아내었는데 흑백화면 쪽이 더욱 선면한 것은 물론 그 속에 전태일이 있기 때문이다. <칠수와 만수>,<그들도 우리처럼>,<그 섬에 가고 싶다> 등 박광수의 영화는 늘 관객을 관찰자의 위치에 둔다. 이 방법은 때로 애매한 화면들을 낳기도 했지만 이번 작품에서 그것은 또렷하게 초첨이 잡혀있다. 박광수는 전태일의 삶을 극적으로 재구성하거나 눈물로서 미화하지는않는다. 그 대신 그는 평화시장을 중심으로 전태일의 노농과 싸움과 여린일상의 에피소드를 절제의 미학으로 잘라낸다. 한국 최고의 영상촬영가인 유영길의 카메라는 화면을 길게 깊숙이 똑바로 응시한다.카메라는 고정된 채 작업장의 전경과 중경과 후경을 한꺼번에 잡아낸다. 무엇이 보기를 강요하지는 않지만 그러나 하나하나의 화면 속에는 전태일을 죽음의 결단으로 이끈 모든 것이 들어있다. 졸고 있는 미싱공, 창백한 시다들의 모습 ,허리를 굽혀야 겨우 올라갈 수 있는 다락방, 폐를 파고드는 실밥먼지, 희미한 백열등. 이 경우 카메라의 응시가 카메라의 움직임보다 훨씬 깊은 맛을 준다. 신화로서의 전태일을 기대한 이들은 이 영화에 실망할지도 모른다.또 감독이 뜻한 만큼 70년대가 드러나지 않은 허접도 있다. 그러나 이 영화에서 박광수가 전태일을 바라보는 방식은 충분히 주목할 만하다. 감독은 감히 전태일이 아름다웠다고 말한다. 그는 전태일의 고뇌와 몸부림조차도 아름답다고 말한다. 분신 이후 영화가 25년의 시간을 훌쩍 뛰어넘을 때, 평화시장의 김영수 앞에 전태일이 미소를 띠며 나타났을 때 , 박광수는 다시한번 그가 아름답다고 말한다. 그리고 미소띤 순간을 영원히 정지시킨다. 우리는 이 장면에서 다음과 같은 그의 육성을 동시에 들을 수 있다. “친구여 , 나를 아는 모든 나여, 나를 모르는 모든 나여, 부탁이 있네, 나를 지금 이순간에 나를 영원히 잊게 말아주게”. 또한김영수가 구로공간의 노동자인 애인 신정순(김선재)에게 한 말은 뜻에 우리가 육박할 수 있을 때 진정<아름다운 청년 전태일>은 완성될 것이다. 그는 그녀에게 이렇게 말했다. “네가 전태일이 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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