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6.1 | [세대횡단 문화읽기]
새로찾는전북미술사 26
근대 일본화풍의 전통 위에 선 작가
정복연(鄭復然)
글/이철량 전북대 교수 미술교육과
(2004-02-10 12:44:27)
1900년대에 들어서면 한반도는 대단한 열병을 앓게 된다. 그것은 수백 년 내려오던 조선조가 몰락하고 한일합방이라는 치욕의 역사가 시작되기 때문이다. 이는 정치 사회적인 측면 외에도 문화 예술에서 엄청난 소용돌이에 휩싸이게 된다. 한반도 역사에서 한번도 경험해 보지 못했던 새로운 충격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게 되는 것이었다. 일제 통치와 한국전쟁이라는 엄청난 사회적 혼란을 살아갔던 이 시대 예술가들은 마치 순교자처럼 살았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그것은 도데체 예술이라는 사치스러운 존재는 어디에서도 사랑받을 수 없는 현실이었기 때문이다.
역사적으로 보면 이러한 혼란의시기의 예술은 대개 그 부류가 분명하게 구분되는 모습을 보인다. 하나는 예술이 현실의고통을 감싸주는 안식처 역할을 하는 경우이며, 둘째는 예술이 현실에 저항하는 수단으로 활용되기도 한다. 그리고 또 다른 하나는 적극적으로 현실을 수용해 버리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정복연의경우는 세 번째의 경우에 속했던 작가가 아니었을까 생각해 본다.
그의 남아 있는 유품이 거의 없어 정복연에 대한 섣부른 평가는 신중해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존하는 작품은 그 성향이 너무 뚜렷한 경우이다. 필자는 그의 유품을 직접 확인할 수 있는 기회를 갖지 못했다. 자칫 정복연이라는 훌륭한 화가에게 누를 끼치는 일이 될까 염려된다. 어떻든 그의 그림은 화조화에 대단히 능숙했고 또 현재 소개되고 있는 작품은 확실한 일본화에 속한다는 것이다.
일제를 살았던 이 시대의 전문화가치고 왜색 화풍을 조금이라도 수용하지 않았던 화가는 실상 거의 없었다. 사대부 지식 계층의 양반 계급들은 다소 경우가 다르다. 그들은 대개 글방에 앉아 서화를 치며 시대의 아픔을 조용히 달랠 수 있었으나 화가로 입신해서 호구를 지탱해야 했던 전문화가들의 경우는 당시의일본식 화풍은 외면할 수 없는 현실의 과제였을 수 있다.
이러한 현실을 긍정하고 본다고 하더라도 정복연은 확실한 왜색 화가로서 지역 화단에서 대표되는 인물이 아닌가 보여진다. 정복연은 김제에서 1909년에 출생했다고 전한다. 당시 김제에서 한의사를 했던 부친의 넉넉했었던 생활이 어찌면 정복연에게 새로운 공부에 눈뜨게 했을 지도 모른다. 어느 때인지는 확실하지 않으나 훗날 옥구로 이사했다. 이렇게 거처를 옮긴 것은 군산과 옥구가 당시 일제시대 활발한 활동이 이루어지던 번성한 도시였기에 새로운 공부를 위해 옥구로 이사했을 수도 있다. 그리고 군산은 이 지역에서 가장 일본인들의 활동이 두드러지던 지역이었다. 아마도 왜색 문화를 가장 손쉽게 접할 수 있었던 곳이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정복연은 황종하에게서 그림을 배웠다고 전한다. 황종하는 당시 군산에서 서화연구소를 운영했던 제일의 화가였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리고 특히 호랑이 그림에 능란했다고 전한다.그리고 그의 형제들도 모두 화가였다. 황종하 문하를 거쳤던 화가들이 정복연 외에도 이상길등이 있다. 황종하 문하에서 배운 사람들이 모두 영모화에 뛰어남을 보여준다. 이를 통해 황종하의 화풍을 짐작할 수 있다. 황씨형제 *용하, 성하)들은 원래 개성사람들이라고 전한다. 그리고 1923년에 일본 황족회관에서 초청전람회를 가졌었다고 전하고 있다. 어떻든 이들이 당대에 뛰어난 활동을 보였음을 짐작할 수 있다. 그러나 HDSMFSKF 이들 황종하와 그의 화맥이 거의 전하고 있지 않은 아쉬움이 있다. 그 연유는 좀더 연구되어져야 할 부분이다. 다만 필자의 추정으로는 왜색이 짙었던 이들의 활동이 해방 이후 일제 잔재 청산등의 사회 분위기 속에서 잊혀진 작가들이 아닌가 생각된다. 어떻든 황종하와 그의 인맥들은 당대 전북 화단의 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었음은 부인할 수 없다. 정복연은 황종하의 연구소에서 그림을 배우면서 한편으로는 일본의 회화 강의록을 통해 공부했다고 전한다. 그의 강의록을 통한 공부가 얼마나 깊이 이루어졌을 지는 쉽게 상상할 수 없지만 상당 부분 일본화에 빠져들 수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그의 작품은 많이 알려져 있지 않다. 다만[호남한국화 300년]도록을 통해서 이해되고 있을 뿐이다. 그러나 이 두 작품을 통해 보면 그가 상당한 정도의 수준 있는 기량을 쌓았던 화가였음이 드러난다. 이 두 작품 중 하나는 전형적인 일본 채색 화조화이고 다른 하나는 왜색풍의 수묵화이다.
독수리가 떡갈나무 가지에 앉아 있는 이 그림은 독수리의 사실적 묘사가 대단히 뛰어나 정복연이 영모화에 남다른 훈련을 쌓았음을 보여준다. 뿐만 아니라 떡갈나무의 줄기르 거의 90도 각도로 몇 차례에 걸쳐 꺽어지는 특이한 화면 구성은 그의 대담한 경영 능력을 엿보게 하는 대목이다. 그러나 이러한 그의 뛰어난 표현력에도 불구하고 이 작품이 소재의 이미지나 표현 방식이 일본화의 그것을 그대로 수용하고 있어 이 지역에서 완벽한 일본화의 작가로 지목 받고 있다. 우리 나라의 화조화에서도 독수리 등이 그려졌던 영모화는 일찍부터 발달해 왔다. 그러나 정복연의 이 작품에서와 같이 바탕을 균일하게 칠하고 그 위에 주제를 그려내는 방법은 없었다. 뿐만 아니라 떡갈나무를 둔탁한 채색 방식으로 그려내거나 독수리의세세한 묘사 등은 조선조의 영모화에서는 발견되지 않는 표현 방식이다. 더욱 이 색채의 사용에 있어서도 호분 (흰색)을 많이 섞어 불투명하고 두꺼운 맛의 질감은 일본 채색화에서 발달한 전형이라 볼 수 있다.
일본은 근대 이후 서양 회화를 받아들여 독특한 자기식 채색 방식을 개발했다. 그것은 유화와 같은 두꺼운 질감을 얻어내는 것과 유화에서와 같이 흰색을 많이 사용하여 부드러운 맛을 내는 것 그리고 여백은 남기지 않고 바탕색을 바르는 것 등이 그 특징으로 꼽힌다. 이러한 방식으로 얻어내는 독특한 감각의 서정적이고 감각적인 부드러운 사실화는 신일본 화풍으로 불려진다.
이렇게 여백을 순백색의 종이 빛깔을 살리지 않고 칠해 버리는 방식이 일본 채색화에서 유행하게 되지만 그 영향을 받았던 수묵화에서도 이러한 표현법이 등장하게 된다. 정복연의 다른 작품인 새 그림에서 그 모습을 볼 수 있다.
이 작품은 어두운 밤에 나뭇가지에 앉아 있는 새를 그린 것이다. 제작 DUSD대가 알려져 있지 않아 정확한 정황은 알 수 없지만 만일 이 그림이 해방 이전의 초기 작품에 속한다면 당시로서는 상당히 파격적인 표현이었을 것이다. 이 그림 속에서는 그 외 채색화에서 보여졌던 사실적 묘사는 사라지고 거친 필치가 주종을 이루고 있다. 마치 난마처럼 얽혀 있는 속도감 있는 필치는 그러나 새 그리고 고목의 등걸과 잎 등의 형체를 따라 설명되고 있다. 배경은 마치 심연의 바다처럼 깊고 고독한 어둠을 표현해 내고 있다. 그러나 그의 거칠고 속도감있는 붓은 여기에서도 멈추지 않는다. 이러한 분방한 붓과 효과 있는 연한 먹빛은 오히려 깊은 밤의 냉랭한 공기의 흐름을 효과적으로 설멍하고 있다고 보여진다. 소재가 가지고 있는 정서를 충분히 살려내고 있는 작가의 능숙한 솜씨가 잘 드러나고 있다.
어떻든 이러한 단편적인 경우만 보더라도 정복연은 대단히 수준 높은 기량을 가졌던 작가임을 알 수있다. 그러나 불행하게 도 그의 유품이 나타나지 않고 있어 아쉬울 뿐이다. 더욱이 이러한 점이 그가 이 지역에서 일본 화풍의 대표적인 작가로 지목되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우리는 오늘의 입장에서 과거의 역사를 기록한다는 냉정한 입장에서 정복연의작품이 평가되기를 기대한다. 그의 작품을 많이 찾아내어 우리 지역에서 어떻게 일본 화풍이 뿌리내리게 되었는지 확인되어져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