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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6.1 | [신귀백의 영화엿보기]
영화평 가난했던 삶의 빛바랜 사진첩 <내일로 흐르는 강>
글/이효인 영화평론가 (2004-02-10 14:07:38)
마흔여덟 살의 아버지와 스물아홉 살의 어머니에게서 태어난 ‘나’. 제재소를 운영하는 아버지 집에는 뚱보 셋째 부인과, 어머니와 나이가 비슷한 큰 형이 살고 있었고 , 셋째 부인이 달고 온 아들이 하나 있었다. 어머니의 첫째 남편은 전쟁 중 부역을 한 죄로 죽었고, 남편을 잃고 굶주림을 견디다 못한 어머니는 작은 형과 누나를 데리고 아버지 집에 와서 ‘나’를 낳았다. 박재호 감독은 이런 가족사를 펼치면서 그 행간 행간에 우리의 가난했던 삶을 송곳처럼 박아 넣었다. 빛바랜 사진첩을 들여다보는 것처럼 우리는 ‘나’의 가족들의 삶에 들어가 있고 때때로 황망히 홍천 강변을 거닐기도 한다. 오히려 여기서 ‘나’는 국외자로 머문다. 1부 ‘나의 아버지’에서 주인공은 ‘나’와, 어머니가 같은 작은 형과 누나를 통하여 자신의 삶을 예감한다. 작은 형과 누나의 삶이 엉망이 되었던 것처럼 ‘나’의 미래 또한 그만큼 엉망진창이 될 것이라고 말이다. 작은 형은 유교적 가치관만으로 미래를 바라보던 아버지에게 한문을 배우면서 하도 머리를 얻어맞아 지나치게 공부를 못했으며, 누나는 여자는 공부하면 안 된다는 논리에 의해 일찌감치 학업을 중단하고 야학에 나가거나 독서를 하는 것으로 배움의 허기를 달랬다. 어머니는 밥을 먹고 사는 것만으로 만족하면서 아버지가 정한 게임의 법칙에 순응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렇게 조용하게 세상은 지나가지 않는다. 홍천 강변의 바람은 작은 형과 누나를 가만 두지 않았다. 읍내 정미소 담벼락에 붙은 장의 사 간판은 작은 형을 언제나 유혹하였다. 작은 형은 제임스 딘을 존경했고 엘비스 프레슬리를 숭배했으며 게다가 ‘노란 샤쓰입은...’과 맘보춤을 섬겼다. 그 뿐만이 아니다. 읍내 금은방 집 딸인 모범 여학생을 꼬드겨 허파에 바람을 잔뜩 넣었다. 시대의 절망과 유혹은 뱀의 혀처럼 유혹적이었다. ‘해뜨는 집’의 암울하면서도 환각적인 음악의 향기에 취해 그는 반항하였고 그 반항은 가출과 월남전 전사로 이어졌다. 그의 절묘했던 춤 솜씨를 전쟁은 시기하였던 셈이다. 누나는 누나대로 시위 사건으로 피해 온 사촌 오빠와 눈이 맞아 집에서 &#51922;겨났고 그 길로 둘은 서울에서 동거생활에 들어갔다. 하지만 어느 날 작은 아버지는 사촌 오빠를 데려갔다. 마침 그 날은 동네에 초상이 나서 붉은 등이 걸린날이었다. 사촌 오빠는 역시 돌아오지 않았고 누나는 혼자 애를 낳고 대학을 다녀서 유치원 선생을 하였다. 이제 아버지 차례다. 아버지는 ‘나’가 크는 것을 보지도 못하고 죽었다. 곧 이어 어머니도 죽었다. 그리고 2부 ‘가족’은 1부를 이어받으면서도 전혀 다른 코드로 이어진다. ‘나’는 작은 광고 대행사의 ‘감독’이 되었다. 감독은 1부에서 아무런 주석도 달지 않은 채 모든 얘기를 다해 버렸다. 정치와 저항, 월남전과 죽음, 유교적 가치관과 여인의 불행, 강요와 굴종 굶주림과 살아남기 등 모든 얘기를 스쳐 지나가는 말투로 다해 버린 것이다. 장의사 간판과 ‘해뜨는 집 그리고 초상집에 걸린 조등만으로 그는 자신의 정서를 전하고 있다. 여기에는 운명의 가혹함과 다양한 삶의 불가피했던 처지에 대해 쓸쓸한 눈으로 돌아다보는 이상의 언급은 없다. 감독은 이런 전술을 결코 후회하지 않는다. 오히려 신념처럼 2부 역시 밀고 나간다. ‘감독’은 감독의 전술을 그대로 이어받으면서 적당히 포기하고 마지막으로 빽하고 소리를 내지른다. 하지만 그 소리는 너무 작아서 이 영화 밑에 숨어 있는 피눈물을 이해하지 못하거나 이해하지 않으려는 사람에게는 전혀 들리지 않을 것이다. ‘감독’은 어느 날 친구 따라 게이 바에 갔다가 문득 자신이 동성연애자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감독’은 그 날 애인을 사귀게 되는데 그 애인은 자동차 영업소 소장이며 자식을 거느린 양성연애자이기도 하다. 애인은 ‘훌륭한’소시민이다. 이런 사람만 있으면 절대 성수대교는 무너지지 않는다. 그는 가정의 중요성과 인간에 대한 깊은 이해심을 갖고 있다. 하지만 ‘감독’은 자꾸 보챈다. 그 약간 앞머리가 벗겨진 그의 애인이 가정을 포기하길 은근히 바라는 것이다. 둘은 결코 변태성욕자가 아니다. 애인은 ‘감독’이 결혼하길 원한다. 혼자 살면 여러 가지로 귀찮다는 것을 잘 알기 때문이다. 하지만 ‘감독’은 결코 결혼하지 않았다. 다만 셋째 어머니의 칠순 잔치에서 둘은 멋있게 발을 맞추며 ‘노란 샤스’를 내리 부르고는 ‘감독’은 애인을 자기 아내라고 소개한다. 그리고 영화는 끝난다. 이 부분이 감독이 빽하고 소리를 지르는 부분이다. 감독은 2부에서도 누나의 딸이 학생운동에 깊이 감염되었으며 자신 또한 그 와중에서 고통을 겪었다는 것쯤은 얘기한다. 하지 만 그것은 1부에 이어진 시대 묘사에 불과했고 오히려 감독이 강조를 둔 것은 ‘감독’과 애인 등이 언제나 만났다 헤어지는 장소다. 그 장소는 바로 1부의 장의사 간판과는 비교도 안될 만큼 큰 ‘장의사 간판’이 내 걸린 건물 앞이다. 감독은 태어남의 형식이 운명적이듯 죽음의 형식 또한 운명적이라고 얘기한다. 그 앞에서는 인간의 의지라는 것은 참으로 왜소해진다. 동성연애자에 대한 심각한 접근조차 결코 없다. 그들도 사람이며 아니 누구보다 인간적이며 그들은 결코 음란 포르노에 나오는 변태 성욕자가 아니라는 것을 재미있고 따듯하게 말할 뿐이다. 그런데 ! 감독은 정말 그것밖에 얘기하지 않았을까? 역사적 운명과 개인적 운명을 바라보는 방식의 다양함을 감독은 존중하고 있다. 동시에 그것은 언제나 짝을 맞추고 있다는 것을 반복된 장면들의 계획된 삽입으로 해결하고 있다. 한 상황은 다음 상황에서 전혀 다른 문맥으로 접근한다. 작은 형이 불렀던 참으로 슬픈 ‘노란 샤쓰’는 웃음으로 다시 등장하지만 그것은 더 큰 슬픔의 반어법이다. 게이 바에서의 열창은 ‘감독’이 혼자서 이불을 뒤집어쓰고 소리 죽여 노래 부르는 장면과 정확하게 일치한다. 영화 속에 언제나 등장하는 멋있는 차는 여기에서는 삼천만이 조롱하는 티코로 변해 있는 등 영화적 관습은 박재호라는 사십을 바라보는 노회한(?) 청년 감독에 의해 완전히 뒤집어지고 있다. 물론 첫 작품 이후 오랜만에 작품을 만든 감독의 1부 편집은 숨이 찰 정도로 바빠서 성가시고 가끔씩 엉성한 연기는 실소를 불러일으킨다. 하지만 이런 미숙함은 전혀 문제가 아니다. 박재호에 의해서 비로소 한국영화는 같은 사실을 ‘다르게’ 바라보고 남들과는 ‘다르게’얘기할 수 있는 성과를 따낸다. 감독은 주장에 의하면 세상은 참 쓸쓸한데 그것은 역사와 개인의 운명 같은 것이고 그것을 꼭 나쁘게만 말하지 않을 수도 있지 않은가, 지나고 보면 그것 역시 우리가 부둥켜안고 가야할 우리들 삶의 조각이 아닌가라는 것이다. 모든 가치가 서구와 미국 쪽을 향하여 열려 있는 지금, 이 영화는 그래서 그만큼 소중하고 슬기롭다. 이효인 / 현재 가장 활발한 영화평론을 하고 있는 평론가이자 부산 예술대 강사로 일하고 있다. 계간 <영화언어>편집인이며 [한국 영화 역사 강의 1}, [한국의 영화감독 13인]등 다수의 저서를 펴낸 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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