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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6.2 | [문화저널]
꽁트 오만원
글/이광재 소설가 (2004-02-10 14:46:05)
소설가 소씨는 요즈음 너나 할 것 없이 하게 된 해외여행이란 것을 다녀올 예정이었다. 하지만 소씨가 그냥 단순한 관광여행을 하려는 것은 물론 아니었다. 여행도 여행이지만 그는자신의 문학적 상상력을 더욱 확장하고, 작가로서의 시야를 넓히려는 데 목적을 두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첫 해외여행지를 러시아로 잡게 되었던 것이다. 산문의 거장들이 아직도 곳곳에 숨결을 남겨두고 있는 러시아로. 소설가 소씨가 그이 첫 해외여행지를 러시아로 잡은 이유는 또 있었다. 그가 비록 소설가라는 이름으로 불리우게는 되었을망정 그의 근본은 이른바 ‘운동권’이었다. 지금은 사면복권이 되어 소설가 행세를 하고 있지만 소씨는 십여년 전에 국가보안법에 걸려 교도소에 다녀왔을 정도로 그 방면으로는 상당한 골수분자였다. 이제 그는 사회주의 국가의 수장이었던 러시아를 한번 보고 올 작정이었다. 소설가 소씨는 새삼스레 러시아 관련 서적을 사다놓고 그것을 독파해가는 중이었다. 뿐만이 아니라 그는 간단한 러시아 회화를 공부한답시고 또한 책을 가지고 다녔다. 그가 시도 때도 없이 ‘스파시바’어쩌구 하며 욕도 아니고 뭔가 아닌 말을 중얼거릴 때에는 그 모습이 참말 가관이었다. 하지만 남들의 이목이야 어떻든 그는 이번 여행에 그렇듯 공을 들이는 것이었다. 소설가 소씨에게 정작 문제가 생긴 것은 출국을 약 일주일 남겨놓았을 때였다. 그와 함께 떠날 사람들과 같이 신청한 여권이 문제를 부리기 시작한 것이었다. 다른 사람들의 여궍은 아무런 문제없이 나왔는데 유독 그의 여권만은 열흘 쯤이 늦어지겠다는 것이었다. “제 전력 때문에 그러는 겁니까? 십여년 전의 그 국가보안법요?” 소설가 소씨는 외국어를 하듯이 간신히 단어들을 긁어모아 정보과 형사에게 물었다. “글세 그건 말할 수 없지만 하여튼 열흘쯤 늦어질 겁니다..” “이거 보세요. 그건 벌써 십년도 더 지난 일이고 더구나 난 사면복권까지 된 몸이란 말입니다. 지금은 문민정부 시대란 말예요. 열흘후엔 모스크바에 가 있을 겁니다.” “그런 얘길 저희한테 할 필요는 없고 전 다만 그렇다는 걸 알려드릴 뿐입니다.” “제가 지금 당장 찾아가겠습니다. 알겠습니까?” “얼마든지요.” 소설가 소씨가 격앙될수록 형사의 말투는 도리어 침착해졌다. 그것이 마치 비아냥거림처럼 느껴져 더욱이나 머리 꼭지까지 분통이 치밀어올랐다. 그래서 그 즈음 끊어가던 담배를 거푸 두 대나 피우면서 생각에 잠겼다. 침착해지자, 길은 있을 것이다. 그는 수없이 자신에게 다짐하며 경찰서를 찾아갔다. 소설가 소씨의 예상과는 달리 형사는 삼십대 초반의 젊은 사람이었다. 형사가 자신과 연배가 비슷한 삼십대 초반의 젊은이라는데 새삼 또 화가 났다. 저 또한 어떤 식으로든 팔십년대를 경과해왔을 녀석이 그처름 으르딱딱하게 군 것을 생각하니 사그러들던 울화가 다시 솟는 것이었다. 하지만 결심대로 소씨는 화를 삭여두기로 했다. “비록 십여년 전에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 로 교도소에 다녀온 적은 있지만 그 뒤로 사면복권이 돼서 아무런 문제도 없이 살고 있습니다. 그 사이에 결혼해서 아이도 낳았고, 민방위 훈련에도 잘 참여했습니다. 국가에서 내라는 세금도 열심해 냈습니다. 그런데 이제와서 십년 전의 과거를 문제 삼는 것을 이해할 수 없습니다. 더군다나 문민정부 시대에 말입니다.” 소설가 소씨는 마음 먹은대로 차분하게 심정을 밝혔다. 그가 그렇게 나가자 정보과 형사도 그때쯤엔 상당히 고분고분해졌다. “사정이 참 딱하게 됐군요. 하지만 저희들로서도 어쩔 수 없습니다.” 소설가 소씨는 그쯤해서 정곡을 찌르기로 했다. 이제 그는 러시아에 가지 못해도 상관없다는 김정이 되어가는 중이었다. “솔직히 말씀해주시죠. 이거 기관에서 장난하는 거죠?” “그렇게 생각하신다면 그런 것으로 해두죠.” 소설가 소씨는 이제 무슨 말도 소용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정보과 형사도 소씨의 얼굴에서 순간 흘러내린 체념을 읽어내린 듯했다. 그리고는 안타까운 표정이 되어 물었다. “러시아 비자도 받아야 하죠?” “예. 한 닷새 걸린답니다.” “아마 이틀만에도 받을지 모릅니다. 원래 한 열흘 걸리지만 제가 최대한 독촉해서 닷새쯤 걸리도록 힘 써 보겠습니다. 기다려보세요.” 소설가 소씨는 그쯤에서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그래도 이대로 물러나기에는 너무나 억울해서 그는 제가 아는 사람모두에게 전화를 걸었다. 이를테면 전화를 걸어 압력을 행사해달라는 청탁을 위해서였다. 그가 알고 있는 대공과 형사를 비롯해서 국회위원에 이르기까지 실로 다양한 살마들이 그와 통화했다. “운동권 십여년만에 망했네, 망했어!” 소설가 소씨는 공중전화 부스에 나오며 할일없이 그렇게나 중얼거렸을 뿐이었다. 소설가 소씨는 며칠 후에 전화를 받았다. 여권이 나왔으니 빨리 찾아다가 비자를 신청하라는 전화였다. 출국이 사흘 남았을 때였다. 연신 고맙다는 소씨에게 정보과 형사는 의미심장하게 말하는 것이었다. “아따 제 업무를 며칠간 못봤네요.” “아니 왜요?” “항의전화가 어떻게나 많이 오는지 혼났습니다. 빽이 대단하시데요?” 소씨는 전화를 끊고나서 즉시 여권을 찾아왔다. 다른 사람들은 오만원에 신청한 비자를 소씨는 긴급으로 신청했다. 십만원이었다. 소씨는 비자신청을 하고 나오면서 중얼거렸다. “국가보안법 대단하구만! 난 다른 사람들보다 오만원어치를 더 살아야 돼.” 소설가 소씨의 목소리는 그때 참으로 쓸쓸했다. 그리고 그는 마지막으로 한 번 더 의미심장하게 중얼거렸다. “운동권 십년만에 빽도 생기긴 했구나!” 이광재 / 1963년 생. 전북대학교 철학과를 80년대에 들어갔으나 졸업은 90년대에 와서야 할 수 있었다. 국가 보안법으로 감옥살이 한 경력도 있고, 냉철하지만 따듯한 감성을 지니고 있다. 소설쓰기에 전념하고 있지만 전북 재야운동의 핵심 실무자로 일하고 있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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