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6.2 | [문화칼럼]
문화 칼럼
역사는 바로 세워질 수 있는가?
글 / 마동훈 전북대 교수 신문방송학과
(2004-02-10 14:51:10)
19세기 중반 유럽사회의 가장 중요한 이념적 특성은 신(新), 구(舊) 가치관의 혼재(混在)였다. 종교 혁명과 산업 혁명에 이은 대중정치, 대중교육 제도의 도입으로 새로운 인본주의, 자유주의 가치관의 주입이 이루어진 한편, 중세적 권위의 상징인 교회와 왕, 귀족들은 봉건적 구(舊)질서를 지키고자 하는 노력을 쉽게 포기하지 않는다. 새로운 가치관의 명분은 두 말할 필요없이 인간 개개인의 권리와 자유의극대화에 있었다. 이를위해 민주적 정치과정이고안되었다. 체제유지상의 안정과 능률의 측면에서 다소간의 문제가 당분간 있더라도, 민주적 정치체제야말로 인간이 창안할 수 있는 최선의 정치제도라고 믿어졌기 때문이었다. 왕권과 교회가 주인공이었던 중세적 역사관이 인간중심 사관으로 대체되었다. 요즈음 우리 신문에 자주 오르내리는 용어를 써서 표현하자면 이것은 인류역사상 가장 획기적인 정치, 경제, 국민의식 개혁운동이었고, 또한 가장 중요한 ‘역사 바로 세우기’운동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시대적 흐름에 대한 구(舊)질서의 응전도 만만치 않다. 수세에 몰린 수구세력에게 응전의 명분을 제공한 것은 정치적, 사회적 무질서와 가치관의 혼돈이었다. 이들은 세계관의 변혁기가 필연적으로 불러온 가치관의 혼재 속에서 소외와 좌절감을 느끼고 있는 대중들에게 근대 이전 사회의 안정고 질서에 대한 향수를 불러일으키는 방법으로 접근해 갔다. 20세기 초반 이후 유럽의 몇몇 국가에 파시스트 정권들이 등장한 배경이 여기에 있다는 역사 해석도 가능하다. 이로 인해 역사상 씻을 수 없는 큰 상흔들을 여기저기에 남기게 되었다는 것은 익히 알려진 바이다. 근대 사회로의 이행기에 행해진 역사 바로 세우기 작업 과정의 어딘가에 큰 시행착오가 있다는 이야기이다.
영국의 빅토리아 시대에 활약했던 걸출한 논객이자 문예비평가의 한 사람인 마튜 아놀드는 그의 저서 중 하나인 ■문화와 무정부■에서 당시의 문학, 예술작품에 담긴 ‘세련되지 않은’, ‘매우 거칠고, 다루기 힘든’, 또한 ‘무뢰한 항의자’인 대중문화 현상들을 실랄하게 비판한 바 있다. 아놀드의 비판대상은 단지 대중문화적 현상들에만 그치지 않았고, 표현의 자유를 무분별하게 남용한 ‘3류’ 선동가, 정치인 등에게도 이르고 있다. 아놀드 자신이 주장했고 또 실천하고자 했던 당대의지식인의 사명은 순진하기 짝이 없는 다수의 대중을 문화적 무정부 상태로부터 보호하는 것이었다. 즉 지식인은 무정부 분위기에서 자칫 우왕좌왕하기 쉬운 대중이 현재 서 있는 곳은 어디이며, 바라 보고 있는 것은 무엇인지를 설명해주고, 나아가 이들의 미래를 선도할 책임을 띠고 있다는 것이다. 대단히 이상적으로 보이는 이야기이다. 그러나 어딘가 위험한 구석이 보인다.
아놀드는 빅토리아시대의 정치, 문화, 사회적 상황을 설명하며 이 시기의 시대적 목표는 역사적 시계열 선상의 과거와 미래, 양편 모두의 동시적 압력에 대항하여 인간의 존엄성을 지키는 것으라고 보았다. 과거로 부터의 압력은개인의 자율적 의지와 자유의 억압에도 불구하고 최소한 외견상은 하나의 균형이룬 사회체제로서 안정된 모습을 보였던 중세적 질서에 대한 향수이다. 한편 미래로부터의 압력이란 사회체제의 안정도는 다소 떨어져 보이는 반면 인간 개개인의 존엄성과 자율적 의지, 표현이 상대적으로 강조되는 근대사회에 대한 동경이었다. 아놀드의 관찰은 역사의 양 방향-과거와 미래-으로부터의 상반되는 요구를 동시적으로 지적하였다는 점에서 매우 포괄적이고 예리하다. 결국 그의 견해를 빌면 유럽 사회의근대적 역사 바로세우기 작업은 미래사회의 비젼에 대한 국민합의의 도축 과정이 생략된 채 소수 엘리트에 의해 강행되었으며, 그 결과 이후 파시스트 정권 등장의 빌미가 제공되는 역사적 비극이 되풀이 된 것이다.
최근 몇몇 여론조사 결과에 의하면 우리 국민 다수는 우리 현대사의 상당 부분이 잘못 그려져 있으며, 이는 반드시 바로 잡혀져야 한다는 데 동의하고 있다. 이러한 국민여론은 현정권이 역사를 바로 세우는 캠페인에 나서도록 밀어 세우는 역할을 하였다. 그런데 문제는 역사 바로세우기의 선도역할을 담당하는 현정부가 이러한 국민여론을 단지 촉매로만 간주할 뿐 주원인성분으로 보고 있지는 않는 것 같다는 저머에 있다. 이 작업을 국민이 이룬 성과물이 아닌 정부의 대국민 선물로 보아서는 곤란하다. 12■12, 5■18등 현대사의 중요 사건들에 대한 법률적 재해석은 물론 사법부의 손에 의해 이루어져야 함이 타당한다. 그러나 역사 바로세우기의 실제적 작업은 국민의 손에 의해 이루어져야 한다. 이는 분명 쉽지 않은 일이다. 단기간에 끝장을 볼 수 있는 문제도 아니다. 여기에는 역사 바로세우기 작업의 선도자인 정부와 마땅히 이의 주체가 되어야 할 국민들간의 대화의방법론이 필요하다.
다시 역사 속으로 돌아가면, 19세기 유럽의 역사 바로세우기 작업의 방법론은 하향식 사회커뮤니케이션 수단인 대중교육 제도를 통해 국민들에게 근대적 교양을 함양시키는 것이었다. 새로운 역사의 교육내용은 교육제도를 주도한 소수 지식인, 교양인들에 의해 쓰여졌다. 새롭게 창안된 역사관은 일방적으로, 하향적으로 전달되었을뿐 충분한 토의의 과정이 생략되었다. 대중교육을 통한 사회적 신분유지와 상승을 겨냥하고 달려드는 대중들은 이러한 일방적 홍보식 교육의 더 없이 요긴한 사냥감이었다. 그 결과 역사 바로세우기의 주체에 서야할 개인들은 수동적 방관자의 위치로 밀려날 수 밖에 없었고, 이들에게 죄절감, 소외의 크기는 더욱 증폭되어 갔다. 결국 이는 반혁명의 훌륭한 명분을 제공하였다. 역사 바로세우기에는 분명히 선도자가 필요하다는 점을 인정한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이 작어의 주체인 국민이 소외되어서는 안된다. 학급에 반장은 필요하되 학급운영은 전체 학생의 의견을 쫓아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이다. 소외된 다수 국민을 이용하는 또다른 수구세력의 등장을 경계해야 한다.
오늘날 국민적 합의점을 도출하기 위한 제도적 장치로 존재하는 것이 의회와 언론이다. 의회는 국민여론을 충실하게 읽고 이를 역사 재해석의 가장 중요한 기초자료로 삼아야 한다. 이를 정략의 수단으로 삼아서는 안된다. 특히 제 15대 총선을 눈앞에 둔 이즈음 이에 대한 우려는 대단히 크다. 짐작하건데 역사 바로세우기 캠페인의 발상이 모종의 정치적 책략에 있었다는 것이 이 캠페인 선도자의 솔직한 고백일 것이다. 그래서 역사 바로세우기의 마무리도 정치적 책략으로 이루어지지 않을까 우려하는 것이다. 총선을 바라보며 언론이, 그리고 온 국민이 예의주시하여 감시해야 할 것이 바로 이것이다.
불길한 징조는 또 있다. 최근 모 일간지에 의하면, 역사 바로세우기의 선도자격인 김영삼 대통령이 한유력인사의 신학국당 영입을 호소하는 자리에서 ‘이제 80년대식의 최류탄과 돌팔매가 난무했던 학원과 거리의 혼란은 피해야 한다’는 점을 강조했다고 한다. 무엇인가 불길하다. 그가 한때 한편에 서서 지지했던 국민의 역사 바로세우기의 노력들을 지금와서 ‘아놀드식’의 ‘거칠고, 다루기 힘든 대중’처럼 묘사하고 있다는 점이 우리를 불안하게 만든다. 그는 여전히 역사는 반드시 바로 세워져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지나치게 서두르는, 소수 정치엘리트의 정략을 위한, 국민적 합의를 도외시한, 그리고 이가 맞지 않는 역사 바로세우기 작업은 다시 무서운 시련을 불러 올 수 있음을 경계해야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