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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6.2 | [서평]
서평 질곡의 역사를 되돌아 보며 「십년간」(방현석, 실천문학사, 1995)
글/ 김경석 전북대 강사 (2004-02-10 14:59:29)
요즘에는 ‘역사 바로세우기’라는 말이 유행이다. 이 화두는 우리에게 우리 나라의 현대사가 얼마마한 질곡들을 거쳐왔는지를 새삼 생각하게 해준다. 유신으로 국민을 압살하던 박정권은 박정희 자신이 그 자신의 심복 부하에 의해 시해되면서 막을 내렸고, 광주를 제물 삼아 권좌에 올랐던 5,6공의 실력자들은 이제 심판을 기다리며 차디찬 감방 안에 있다. 사회 전반에 걸친 대변혁의 와중에 있는 우리는 과연 우리네의 현대사를 어떻게 정리할 수 있을 까. 어찌되었든 그 질곡의 역사 속에서 부대끼며 살아았던 사람들이 이제 지나간 그 시대를 어떤 눈으로 바라볼지 자못 궁금하다. 일제 강점기와 해방 정국과 6.25, 이승만 정권, 박정권과 유신의 6-70년대, 광주와 80년대, 3당합당과 김영삼정권, 그리고 지금을. 수출 천억불이나 국민소득 일만불이라는 경제적 수치들이 보여주는 것은 분명 오늘날의 삶이 이전보다 나아졌다는 것을 의미하며, 누구도 그것을 부인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의 현재가 그 치열했던 과거를 기반으로 해서 가능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해방 이후 엄창난 수의 사람들이 이념의 희생물로 역사 속으로 사라졌고, 다시 수많은 사람들이 후손들을 위해 보이지도 않는 앞길을 여느라고 자신들을 희생하였다. 그리고 오늘, 대망의 21세기르 앞둔 90년대의 중반에서 우리는 방현석(61년 경남 울산)이라는 한 젊은 작가를 만나게 되었다. 80년대의 노동 현장에서 부대끼면서 그 현장의 민주화를 이해 투쟁했던 그는 88년부터 「내딛는 발길은」이라는 작품을 필두로 「새벽출정, 「내일을 여는 집」등의 단편들을 발표하면서 문단에 등장, 편협 하지 않은 특유의 넉넉함과 치열함으로 문단의 주목을 받아왔고, 95년 말에 와서 장편 「십년간」을 우리 앞에 내놓았다. 90년대에서 20여년만 거슬러 올라가면 우리는 「십년간」의 주인공들을 만날 수 있다. 이 소설은 그 격변기를 겪은 사람들에게 가슴 시림 기억을 되살려 줄 수도 있을 것이고, 그 연장선상에서 고난의 시대를 살았던 80년대의 사람들에게는 통절한 아픔을 느끼게 해 줄 수도 있을 것이다. 소설 「십년간」은 이서이고가 정준호라는 인물의 대립을 기본 축으로해서 여러 보조 축들이 서로 맞물리면서 박정권의 폭압과 민주 인사들의 저항, 자본가와 노동자들의 갈등, 필요에 따라 터무니없이 조작되고 남용되었던 시국 사건이나 간첩단 사건 등 70년대를 뜨겁게 달구었던 사건들을 다루고 있으며, 많은 인물들이 실명으로 등장한다. 우리는 이 소설에서 석정남의 「공장의 불빛」의 소재가 된 동일 방직 사건을 다시 접 할 수 있고, ‘아름다운 청년 전태일’과 민청학련 등 조작된 시국사건에 연루된 사람들도 만날 수 있고, 심지어 현재이 야당 지도자와 대통령까지도 만날 수 있다. 이 소설의 주요 구조는 이서익과 정준호라는 인물로부터 시작된다. 이들 두 인물간의 대립의 씨앗은 일제시대에서 배태되고 해방과 6.25공간에서 폭발된, 아직도 끝나지 않은, 좌우 대립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이서익네는 친일과 우익적 편향을 가진 집안으로 시대와 이권의 흐름에 따라 움직임으로써 경제적으로나 정치적으로 성공한 반면에 정준호네는 정반대의 다른 한 축을 이룬다. 반공이 국시이던 그 당시의 우리 사회의 감정적 사상적 풍토가 그러기는 했겠지만, 정작 문제가 되었던 부분은 그것이 아니었다. 피를 요구하던 당시의 아수라장에서 정준호네는 이서익네를 구했지만, 세상이 바뀌고 나서 이서익네는 정준호의 아버지를 생매장했고, 준호를 낳은 지 한달도 채 되지 않은 산모를 총검으로 찔려 죽였다. 두 집안의 반목은 이것을 기점으로 해서 증폭되어 그들의 자식들에게 대물림된다. 대물림된 대립은 정준호가 빨갱이의 자식이라는 이유로 학생회장 입후보 자격이 박탈당한 후 중학교를 뛰쳐나감으로써 잠시 휴기지를 맞지만, 그들이 최고 명문인 수도대학교에 입학하면서 다시 연결된다. 이들의 대립은 모든 문제에서, 심지어 시국 사건에 연루되어서도 계속된다. 이들 두 사람의 갈등 구조를 축으로 하여 같은 고향의 인물들이 여러 보조축으로 작용한다. 독자는 그 시대의 많은 사람들이 그랬듯이, 가정 형편상 노동판에 뛰어들 수밖에 없었던 완수와 순분을 통하여 노동자들의 비참한 생활상과 , 그네들끼리의 이전투구, 그리고 유혹에 견디지 못하고 변절하는 사람들의 모습들을 볼 수 있으며, 나아가 열악한 노동 환경에서 노동자들이 조직적으로 대응하는 이른바 노동운동의 면면들도 볼 수 있으며, 사용자들의 비인간적인 대우와 대응, 그리고 변절한 노조 지도부에 의해 작성된 블랙리스트도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정치 지마생 석우를 통해서는 당시 40대 기수론을 내세웠던 김영삼과 김대중의 야당의 모습을 볼 수 있다. 유신정권에 의해 사형 당한 고규락과 정권 타도를 외치며 투신자살한 백상태 등의 운동권을 통해서는 학생운동권의 반미 반독재 투쟁이 모습들을 볼 수 있다. 방현석(방재석)은 그의 20대를 80년대에서 살았던 사람이다. 그러나 그 또래의 다른 작가들과는 대조적으로 첫장편을 70년대에서 시작했다. 80년대르 노동현장에서 보냈던 그가 70년대에 천착했던 이유는 무엇일까. 아마도 그 사람들의 아름다운 삶의 모습들을 오늘이 있기까지의 원동력이었다는 사실을 자칫 오만과 방종으로 흐르기 쉬운 이 시대의 사람들에게 깨우쳐 주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다시 그 참담한 시절로 역사의 시계바늘을 돌려놓고 싶지 않아서. 앚기도 노조 운동은 핍박을 받고 있고, 아직도 반공은 날선 서슬을 감추지 않고 있다. 또 아직도 많은 사람들의 뇌리에는 과거 군사 정권의 망령과 이념이 그대로 살아 있다. 역사를 바로 세운다고 하는 지금도 말이다. 해방은 되었지만 일제의 잔재를 청산하지 못했던 우리는 이승만이 물러났어도 군사 정권의 서슬 아래 억눌렸고, 그 유신정권이 사라졌어도 다시 군부독재의 길을 열어 주었다. 누구의 잘못일까. 누가 뭐라고 해도 이것은 국민 스스로의 잘못이다. 누구도 그 책임으로부터 자유로울 수는 없다. 다시 90년이 왔어도 국민들은 일신의 영달을 쫓는 무리들을 심판하지 못했고, 지금 도다시 이권에 따른 이합집산이 이루어지고 있다. 한 번 잘못꿴 단추는 꼭 끝까지 엉클어져야만 하는가. “유신보다 더 위력 있는 명령어는 없었다”던 그 시대의 삶의 무게를 버티어 내던 그들 젊은이들의 모습이 우리 독자들에게 시사하는 바가 있을 것이다. 그것을 어떻게 바라보는가는 각 독자의 몫일 것이다. 필자의 이 글은 이 소설에 비해 너무 무겁다. 그의 소설은 전혀 무겁지 않다. 아주 차분해서 오히려 시리도록 서정적이고 아름답다. 그가 그 살벌했던 노동 현장에서 분노했던 사람이라는 사실이 믿어지지 않을 만큼 말이다. 그 아름다움을 많은 분들이 함께 느껴 볼 수 있기를 바란다. 김경석 / 1963년 생. 전북대 영문학과와 같은 대학원에서 박사과정을 마치고 전북대에서 강사로 활동하고 있다. 소설을 전공했으며 여전히 뜨거운 비평을 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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