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6.2 | [세대횡단 문화읽기]
음반감상
‘느림’의 미학을 그대에게
국악(正樂)대전
글 / 문유걸 전북대 강사 。사회학과
(2004-02-10 15:23:41)
얼마전 한 남자에게 있었던 일이다. 그는 시골에 다녀왔는데 번잡한 도시를 벗어나 근교의 한적한 2차선 도로를 달리다 보니 그동안 잊고 지냈던 감흥에 빠져 들었다고 한다. 차창 너머로 보이는 겨울 가뭄에 더욱 말라붙은 옷젓은 가로수와 바짝 치켜자른 머리같은 논바닥 등이 제법 예전의 감흥을 불러 일으켰나 보다. 그래서 속도를 늦추고 오랜만에 찾아 온 감흥에 흠벅 빠져 들었다. 몇분이나 흘렀을까? 뒷 차의 요란한 경적음이 그를 놀라게 했다. 백밀러로 쳐다보니 20대 초반으로 보이는 남녀가 탄 차가 뒷 꽁무니에 바짝 붙어 있었다. 맞은 편에서는 차들이 꼬리를 물고 있었고 뒷 차는 전조등까지 번쩍거려댔다. 그는 마침 그 곳이 제한속도 50킬로 구간이었고 얄미운 생각까지 들어 50킬로를 유지하며 버텼고 뒷 차는 빨리 달리라며 경적과 전조등을 번갈아가며 요란을 떨더란다. 한참을 실갱이하다 뒷 차는 옆 차선을 이용하여 앞지르기를 했는데 그 차를 쳐다보니 조수석의 여자가 V자 모양의 손을 흔들며 뭐라고 외쳐댔다고 한다. 그리고 그 차는 쏜살같이 앞으로 내달렸다. 그는 그저 이겼다는 뜻인가 보다 하고 별 생각없이 잡쳐버린 감흥을 추스르고 있었는데 불현듯 그여자의 입모양이 떠올랐다. 그녀는 승리의 V가 아닌 손가락으로 가위질을 하며 ‘야 짤러!“라고 외쳤던 것이다.
세상은 이처럼 바쁘다. 모두들 얼마나 바쁜지 옆 사람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관심을 둘 여유도 없다. 또 바쁘지 않으면 이 치열한 정글에서 경쟁에 뒤져 살아남을 수 없다. 음악도 마찬가지인 것 같다. ‘인기’가 가장 선망이 되는 희소가치인 요즘의 세상에서 무엇하나 부러울 게 없을 것 같던 가수들의 연이은 자살소동, 그리고 점점 더 빠른 템포로, 그리고 점점 더 요란한 음악으로, 점점 더 눈에 듸고 자극적인 소리로, 음악도 경쟁의 논리에는 어쩔 수 없나 보다. 이번에는 ‘야 짤러’가 아닌 ‘야, 더 빨리’라는 말로.........
고리타분한 얘기 좀 하자. 옛 문헌에 보면 음악은 매우 조심스럽게 다루어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는 음악이 인간의 정신에 미치는 영향력을 이해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시끄럽고 빠른 음악은 인간의 마음을 어지럽힌다 하여 금지하고 있다. 심지어는 조선 영조 때의 대학자인 이익은 임진란의 여러 원인중 하나로 선조 때의 빠른 음악을 꼽고 있다. 효종과 순조임금은 각각 자기 시대의 음악이 빠르고 번잡하며 시끄러워졌다고 염려하며 이를 망국의 전조라고 개탄하고 있다. 이 시대의음악을 요즘과 비교하면 10배 이상 느린데도 말이다.
나는 재작년 여름, 그 지겨웠던 무더위 속에서 이 음반들을 발견했다. 그리고 그것들은 그 지겨운 여름을 이겨내게 한 최상의 파트너였다. 이 음반들이 바로 94년 국악의 해를 기념해서 SKC에서 발매한 국악대전이라는 15개의 CD전집이다. 이 음반들에는 충실한 해설이 붙어 있어 나와 같이 국악에 과문한 사람에게는 최상의 텍스트였다. 물론 한 장씩 낱개로도 구입할 수 있고 가격도 매우 저렴하다. 여기에는 상급계급의 음악인 정악, 민중의 음악인 송악, 기악곡인 산조 등 국악전반이 망라되어 있어 하나씩 사 모으는 재미가 솔솔할 것이다. 특히 온통 기계음으로 가득찬 요즘의 음악과는 다른 소리를 들을 수 있다는 점과 이 빠른 세상과는 반대되는 느린 음악과 함께 함으로써 ‘느림’이 주는 마음의 안정도 얻을 수 있으니 금상첨화다. 우리 음악에 대해 이제 막 관심을 갖기 시작하는 분들에게 이 음반들이 나에게 국악개론서의역할을 해주었던 경험을 토대로 전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