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6.2 | [문화저널]
이현배의 옹기 이야기
길어지지 않는 화장지
이현배(2004-02-10 15:26:54)
나의 바램 중에 하나가 전용변소를 갖는 것이다. 그게 큰 사치라는 것을 알면서도 남몰래 그런 꿈을 키워 온 것은 아내의 극심한 사전검열 때문이다. 나의 버릇 중에 변소에 가면 뭐든 읽을 거리가 있어야 정서적으로 안정이 되는 게 있다. 아내 입장에서 보면 순서를 기다릴 때 답답한 것도 있고 결코 좋은 습관이 아니라는 거다. 이 버릇은 늦게 생긴 것이다.
재수를 하던 시절인데 그때 주로 남산 도서관과 서울역 앞에 있는 대일학원을 오가며 공부했었다. 하루는 남산도서관을 나서는데 막 일어나면서부터 아랫배가 거북했다. 어떻게 어떻게 해갖고 간신히 학원엘 도착했지만 변소 앞에는 이미 여러 명이 줄을 서 기다리고 있었다. 같은 식으로 어떻게 어떻게 해갖고 간신히 순서를 타 갖고는 길게 한번 힘을 쓰구서 안도의 한숨을 쉬는 데 바로 코 앞에 이런 글귀가 써 있던 거였다. ‘당신이 힘을 주고 있는 이 순간에도 경쟁자의 책장은 넘어가고 있습니다.’ 나는 깜짝 놀라 책을 꺼내 책장을 넘기기 시작했다.
내가 아내에게 늘 당하기만 하고 사는 것은 아니다. 나도 소위 사전검열이란 것을 한다. 그것은화장지를 쓰는 대목에서다. 나는 보통 서너 마디로 해결하는데 아내는 열두 마디에서 이쪽저쪽이다. 이 대목에서는 우리가 어떻게 부부가 디었을까 싶을 정도로 너무 다르다. 그것은 서로 자라온 환경과 공부 방법 그리고 이념의 차이까지를 보여준다. 그러면서 팔 년을 같이 살다보니 아내의 화장지가 조금씩 짧아지고 있다. 문제는 나의 화장지가 길어지지 않는다는 거다. 나의 심보 중에 뭘 간신히 하면서 스릴 같은 걸 즐기는 게 있다. 이게 나한테는 재밌지만 곁에서 지켜보는 사람은 조마조마한 모양이다.
이제는 생활의 모든 부분에서 확대의 필요성을 느낀다. 뭐든 충분한 상황에서도 나 자신을 추스릴 줄도 알아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다만 그렇게 결심하고 실천하자니 호나경문제가 걸린다. 아직까지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