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6.2 | [파랑새를 찾아서]
저널여정
시인의 바다
부안 석정시비를 다녀와서
글 / 김태호 「문화저널」기자
(2004-02-10 15:29:00)
아침을 먹고나면 완산동 간이 터미널에서 9시 반쯤 부안행 버스에 몸을 실을 수 있다. 무료할 것 같은 휴일날이면 더욱 좋다. 금방 ‘어머니’. ‘하늘’. ‘먼 나라’와 같은 시어들을 또올리게 하는 시인 신석정의 고장 부안을 향해 가는 길이다.
평야 끝으로 보이는 올망졸망한 산들이 마치 커다란 옹기 항아리의 허리쯤에 붙어있는 손잡이처럼 앙증맞게 붙어있다. 아침도 한나절, 김제평야의 겨울볕이 따스하다. 부안은 예부터 풍수지리가들에 의해 ‘십승지지(十勝之地)’라 하여 나라 안에서 피난처로 손꼽히는 열 곳 가운데 하나인 변산을 품 안에 안고 있다. 안과 밖으로 아름다운 산과 바다와 평야를 함께 품고 있는 부안은 그 땅의 품성만큼이나 아름다운 시들을 잉태해냈다. 부안은 석정 이전에 개성 출신 황진이에 비견되는 시인 매창을 낳았다. 이 두 인물은 4백 년 가까운 시간을 두고 같은 곳을 살다 가면서 뒷날 세인의 문학적.감성을 일개우는 작품을 남기고 있다.
농부들이 들일을 나갔다가 쉬어갈리는 만무한 일인데 사방이 농토뿐인 도로 옆으로는 무슨 스타장, 무슨 러브장하는 이국풍의여고나들이 자랑처럼 서있다. 이곳의 농군들은 소나무 숲 푸른 솔잎에 눈을 씻고 사는 모양이다. 바다가 가까워지면서 평야끝으로 푸른 소나무 머리를 인 언덕들이 자주 눈에 띈다.
11시쯤이면 부안에 도착한다. 신석정 시인의 옛집이 있는 선은리는 부안 터미널에서 삼사백 미터 못미치는 곳에 있다. 신선이 숨어 살았다고 해서 선은리(仙隱里 )라고 한다. 전주쪽에서 가다보면 계화도로 들어가는 갈림길을 지나 부안 읍내로 들어서는 언덕 굽잇길이 나있는데 언덕을 넘어서게 되면 바로 읍내가 눈앞에 보이고 왼편에 이런 가든, 저런 가든 하는 음식점들이 있다. 선은동이라고 쓰인 빗돌이있는데 눈에 잘 띄지 않아 두어 차례 말품을 팔고나서야 길을 찾을 수 있었다.
선은리는 나지막한 북산 기슥에 자리잡고 있다. 큰길에는 20여 미터 들어가면 왼편으로 ‘仙隱마을 會館’이라고 쓴 건물이 있는데 이 마을 회관 뒤쪽으로 허름한 기와집이 보인다. 사철나무로 울타리를 두르고 있는 이 집이 신석정(1907~1974)시인의 고택, 청구원(靑丘園)이다. 그냥 보기에도 허술하기 이를 데 없다. 이 옛집은 1932년 석정이 26세때 지은 집으로 당초에는 초가 3간이었던 것이 1962년 이후 전 국토가 새마을 운동의 바람을 타던 무렵 개량 기와로 지붕을 얹고 큰 변화없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처음 집을 지을 때 정원에 은행나무, 벽오동, 목련, 산수유, 철쭉, 시누대, 등나무 등을 심어 청구원이라고 이름을 붙였다는데 그동안 집주인이 두어번 바뀌면서 그 흔적을 찾아볼 수 없게 되었다. 큰길쪽으로 있는 주류창고 바깥벽에 안내판이 뿌리가 뽑인 채로 기대어져 있어 찾아 온 이를 의아하게 한다.
지금의 청구원에는 이곳으로 이사온 지 25년 된다는 오십 줄의 아주머니가 가족과 함께 살고 있는데, 이 짖ㅂ을 복원한다고 하면서 드나들던 사람들 때문에 적잖은 겁을 먹었던 모양이다. 혹시 하는 생각에 이 아주머니는 안내판을 뽑아 버려두고 가끔 찾는 방문객에게 대문을 걸어잠그게 된것이다. “살수가 없어요.”라는 아주머니의 엄살에서 내집을 내 맘대로 못하고 쫓겨나는 것은 아닌가 하는 불안한 마음을 읽을 수 있다. 전라북도 기념물 제 84호로 지정된 청구원의 오늘 모습이다.
석정은 이곳에서 마주보이는 성황산 기슭의 동중리에서 태어나 이곳 선은리로 이사를 왔고 여기서 성장했다. 그의 시집 「촛불」,「그 먼 나라를 아십니까」, 「슬픈 목가」등에 실린 초기의 시작들이 바로 이곳 청구원(靑丘園)에서 이루어졌다. 동중리에 있었다는 석정의 생가는 진작 헐리고 그 모습을 차자아 볼 수 없다.
성황산까지는 걸어서 갈 수 있는 거리이다. 성소산이라고도 하는데 흔히 서강산이라 부른다. 높지 않은 이산엔 부안읍 주민들의 휴식처은 서림공원(西林公園)이 있고 공원 입구 약수터 옆에는 매창시비(梅窓侍碑)가 서 있다. 석정이 세상을 떠난 1974년에 세워졌는데 시비에는 다음과 같은 그의 대표적인 시조 한 수가 새겨져 있다.
이화우 흩날릴 제 울며 잡고 이별한 님
추풍 낙엽에 저도 나를 생각는가
천리에 외로운 꿈만 오락가락 하노매
매창과 관련하여 석정은 생전에 매창의 한시를 번역하여 놓은 「매창시집」(1958년)을 편낸 일이 있다. 이 시비와 관계 없이 석정은 바다가 보고 싶을 때면 이곳에 올랐을 것이다. 산마루에 오르면 동쪽으로는 바로 눈아래, 조금 전에 나온 선은리가 내려다 보이고 서쪽으로는 내변산의 능선과 석골산, 개화도가 서해와 청호 저수지를 끼고 차례로 늘어서 있다. 썰물 때면 물이 얕아 저만치 떨어져 있는 개화도까지 걸어서 갈 수 있었다고 한다. 석정은 언젠가 개화도에 놀러갔다가 저녁 무렵 바짓가랑이를 걷어붙히고 나오는데 그때 서해 바다로 지는 붉은 해를 보게 되었다고 한다. 저녁 석자와 물가 정자를 쓰는 그의 호 ‘석정(夕汀 )은 여기서 지어졌다고 한다.
하지만 석정이 건넜던 바닷길은 찾아 볼 수 없다. 개화도로 가는 바닷길은 기름진 간척지로 탈바꿈하게 된것이다. 쌀쌀한 바람 속에서도 겨울 햇살을 받으며 누이의 목덜미처럼 곱게 서있는 은회색 백양목이 못내 반갑기만 하다.
시외버스 터미널 옆으로 들어서 있는 부안시장에는 백합죽으로 유명한 집이 있다. 따끈한 엽차르 한 잔 받아 들고 있으면 ‘팔공년’부터 개화도의 백합을 잡아 장사를 하고있다는 아주머니가 너덧 가지 깔끔한 찬과 함께 상을 차려낸다. 이곳 백합죽은 동해안의 전복죽과는 다른 담백한 맛을 지니고 있다.
부안 터미널 건너편 군내 버스 승강장에는 격포행 버스가 30분 마다 있다. 20분 정도 가면 해창이라는 곳에서 내릴 수 있는데 변산교 라는 다리를 건너면 바닷쪽으로 석정시비가 서 있다. 1991년 8월에 건립되 s이 시비에는 ‘갈대에 숨어드는 소슬한 바람 9월도 깊었다’로 시작되는 「파도」라는 시가 새겨져 있고 시비 뒷면에는 석정을 “우리 고장이 낳은 한국의 대표적 전원시인이자 민족시인”이라고 적고 있다. 「그 먼 나라를 알으십니까」와 같은 석정의 초기 시들은 일제 강점기의 왜곡된 민족 현실 속에서 한가롭게 깨끗한 정원 풍경을 그려 마음에서의 동경을 구체화하고 있다. 이러한 동경의 시어들은 1940년을 전후해서 현실의 긴장을 받아들이는 시적 생기를 보여주고 있다.
나와
하늘과
하늘 아래 푸른 산뿐이로다
꽃 한 송이 피어낼 지구도 없고
새 한 마리 울어줄 지구도없고
누루새끼 한 마리 뛰어다닐 지구도 없다
나와
밤과
무수한 별뿐이로다
밀리고 흐르는 게 밤뿐이요
흘러도 흘러도 검은 밤뿐이로다
내마음 둘 곳은 어느 밤하늘 별이드뇨
<슬픈 구도(構圖)>(1939)전문
시인은 일제의 압박에서 가까스로 견대어 내던 당시의 암담한 시대 상황을 이렇게 담고 있다. 석정 시비가 서 있는 해창의 바다는 흙물로 출렁이고 있다. 새만금 간척사업으로 몇 년 후면 이 바다 또한 멀리 도망가 있을 것이다. 40.100ha의 국토를 넓히고 나면 우리는 한 없는 시상이 밀려오던 시인의 바다를 잃어야 한다.
석정시비가 있는 언덕너머에 새만금전시관에 가면 머지 않아 뭍이 될 바다를 망원경으로 볼 수 있다.
낙조대에 올라 서해로 지는 해를 보지 못하고 변산의 바닷가에 서서 바다 끝 저녁 구름 속으로 사라져가는 석양을 안타깝게 바라 보았다. 이제야 석정의 변산에 들어선 듯 한데.
긴 여름해가 그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