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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6.3 | [파랑새를 찾아서]
문학기행 막연한 희망과 절망이 교차하는 거대한 땅 러시아 문학기행
글/신형식 전북대 교수 화학공학과 (2004-02-10 15:57:06)
“저는 원래 여행을 좋아합니다. 제 부모님도 어릴 때는 천방지축 쏘다니는 저를 걱정하셔서 혼내기 일쑤였고 나중에는 제 사주에 역마살이 끼어서 별 수 없노라며 제 타고난 방랑벽쯤으로 치부하시곤 하셨지요. 그런 제가 지난 수년 동안 크고 작은 일에 발목이 잡혀 전주 지역에 붙박이로 묶여 지내던 차에 이 ‘문학기행’에 동참할 것을 권유받게 되었습니다. 자의반 타의반 참가하게 되었는데 오늘 막상 여러분을 뵙게 되니 참 잘된 일이라 생각하고 앞으로의 여행이 기대 막심합니다.” 이상은 1996년 1월 19일 오전 7시 러시아 여행을 앞두고 서울을 향해 달리는 관광버스 속에서 있었던 ‘자기소개’마당에서 필자가 버스 흔들리는대로 횡설수설한 내용의 줄거리이다. 자의반 타의반의 진의를 고백하자면, 이 문학기행을 기획한 사람은 전주 MBC의 이병천PD이고, 그는 내가 문학수업을 위해 소속된 동아리인 전북민족문학인협의회의 회장이다. 언젠가 누군가의 출판기념회 끝에 술판이 벌어졌는데, 그 때 이 여행에 관심있는 회원들 틈에서 스스로 한 약속을 빌미 삼아 내 몫의 할 일을 직장동료들에게 떠넘기고 살짝 빠져나간 길이기 때문이다 러시아 Aeroflot항공사의 러시아 제 여객기 일류선은 처음 타보았는데 단 한 번으로 족한, 더 타라면 심각하게 고민해야 할 비행기였다. 몸퉁이 워낙 날렵한 탓에 비디오는커녕 라디오도 구비되지 않았을뿐더러 화장실 변기는 수세식이 아닌데다 구멍도 협소하여 과녁을 잘 맞추지 않으면 ‘똥 싸고 밑 안닦은 것’같은 꺼림칙한 꼴을 당하기 십상이다. 좋은 점이라고는 기내에서 담배를 맘대로 피울 수 잇다는 것이라고나 할가. 덕분에 기내금연이라는 만약의 사태에 대비하여 MBC진호 PD가 준비해 온 수면제의 약효를 전혀 시험해 볼 필요가 없었다. 러시아에 머무는 동안 시종일관 우리를 감동시킨 분은 아마도 여행 안내를 맡은 50대 중반의 김애자 씨였으리라. 사할린에서 태어난 조선족 동포 2세인 그분은 살아온 험한 세월의 아픔을 얼굴에 담고 있었는데 아버지의 고향이 임실 둔남이래서 우리에게 친근감을 더해주기도 하였지만, 자기 직업에 대해 큰 보람과 자부심을 갖고 일하는 모습이 참으로 보기에 좋았고, 몇십년전의 우리 나라 사람의 깨끗한 정과 이제는 사라져 가는 우리 민족 특유의‘은근과 끈기’를 접하는 것 같아 마음 뿌듯했다. 러시아 기행중에 내가 가장 인상적인 것은 모스크바에서 동남쪽으로 약 200km떨어져 있는 야스나야 폴리아냐(Yasnaya Polyanya)에 있는 톨스토이 생가 방문이다. ‘맑은 들’이라는 뜻의 그 곳을 방문하는 데에는 여행 둘째 날 꼬박 하루가 걸렸는데, 관광버스에 몸을 싣고 러시아의대평원을 달리면서 아직은 거칠고 다듬어지지 않았지만, 광대함 그 자체가 러시아의 가장 큰 관광자원일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회색 하늘이 광할한 설원과 맞닿아 있어 구분이 되지 않듯 막연한 희망과 절망의 나라 러시아, 추워도 얼어붙지 못하는 끝없는 고속도로 따라 썩어도 쉬지 못하는 고물차는 바둥거리며 달린다. 지쳐도 잠들지 못하는 모스크바의 인터걸처럼 혹한의 삭풍에 가지를 살찌우지도 불리지도 못한 채 뗑그라니 큰 끝없는 자작나무들. 생존을 위협하는 비바람, 눈보라, 역사의 아픔을 몸속에 숱한 점으로 새겨둔 채 끝끝내 살아남아 인간의 손이 미치지 못하도록 훌쩍 커버린 나무들, 오늘의 러시아는 점백이 자작나무 숲이다. 귀족의 후예답게 톨스토이의 생가는 널따란 영지 내에 한 폭의 그림같이 자리하고 있었다. 그러나 긴 평생동안 그는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헌신적으로 살았다 하니, 그의 빛나는 문학만큼이나 고귀한 마음씨를 지녔나 보다. 그의 생가는 신혼부부들의 방문지로도 각광을 받는 듯 싶은데, 그것은 아마 그가 세계 문학사에 길이 남는 대문호여서 뿐만아니라 많은 자식을 두고 장수하는 등 사람들이 흔히 바라는 복을 많이 누린 점에서 쉽게 상상이 되는 점이다. 우리 일행이 그 곳을 방문했을 때에도 결혼예복 차림의 두 세 쌍의 신혼부부가 친구들과 몰려와 왁자지껄 뒤풀이를 하고 있었는데 우리 일행들도 손짓 발짓하여 그들로부터 보드카를 한 두잔씩 얻어 마시기도 하며 친구처럼 어울렸다. 어느 한 쌍에게는 결혼 축의금을 전하기도 하였는데, 돈 전달은 이병천 PD가 했고 신부에게 하는 키스 차례엔 내가 잽싸게 달려나가 가로챈 것을 두고 나중에 버스로 돌아와서 수군대는 말들이 걸작이다. 누군가 ‘재주는 곰이 부리고, 돈은 왕서방이 버는 꼴’이라고 하니, 이병천 왈 ‘신부가 좀 덜 생겨서 내가 양보한 것’이라고 응수했고, 여행 도중 늘 조용히 명상에 잠겨있던 최승범 교수까지 ‘그런 키스는 마땅히 단장인 내가 해야 했어야 할 일’이라고 가세하는 바람에 모두 크게 웃었다. 쿠슈킨이 ‘유럽을 향해 열린 창’이라고 묘사했던 러시아의 옛 수도(1712~1918)성 뻬째르 부르크(st. Petersburg)에서의 1박 2일은 너무 짧은 시간이었다. 모스크바로부터 동북쪽으로 약 600km 떨어진 이 도시는 북위 60〫 에 위치하고 있어서 겨울 낮의 길이가 고작 4~5시간에 불과하여 더욱 아쉽게 했다. 서유럽의 건축사와 조경사를 초빙하여 18세기의 도시 설계를 완료했다는 ‘혁명의 도시’구레닌그라드는 바로크 양식의 중후한 건축물들이 왕복 10차선의 사통팔달의 도로망을 장식하고 잇어서, 모스크바와 다른 독특한 매력과 분위기를 가진 도시였다. 재정 러시아 시대에 역대 황제의 거처였다는 에르미타주 박물관의 화려함과 웅장함은 황실의 권위속에 숨겨진 민중들의 비참했을 삶을 상상하기에 충분하였다. 이 도시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성 이삭 성당이다. 나는 공학도이지만 지금도 비행기를 탈 때마다 그 육중한 물체가 하늘을 날 수 있다는 사실에 새산 놀라곤 한다. 이삭 성당도 신비스러웠다. 이 성당은 우선 규모가 엄청나게 큰데 그 내부는 300점 이상의 동상과 성서의 장면과 성인들의 수많은 유화와 모자이크화로 장식되어 있다. 그러나 무엇보다 내 관심을 끈 것은 110m나 되는 돔 형태의 대리석 지붕이었다. 건축 당시(1818~1857)의 기술로 어떻게 개당 67톤이나 된다는 수십개의 기둥들을 쌓아올렸을까 의문이었다. 나 같이 따지기 좋아하는 사람이 많았던지 모형과 도표를 사용하여 자상하게 설명하는 안내문이 있었지만, 러시아어에 까막눈인 나로서는 그저 놀라울 뿐이었다. 100개 남짓한 성으로 이루어졌다는 이 ‘물의도시’뻬째르부르크에서는 프리발티스카야 호텔에 묵었는데 그 바로 뒤가 발트해이다. 좋은 날씨에는 핀란드가 보인다고 한다. 꽁꽁 얼어붙은 바다를 삼삼오오 떼를 지어 한참 걸었는데, 그것 또한 색다른 경험이었다. 모스크바를 자정에 떠나 뻬째르부르크를 행해 달리는 침대열차 ‘붉은 화살’속에서 나는 이런 저런 생각에 골몰하였다. 끊임없이 흔들리는 불면의 밤. 칠흙같은 어둠 속 음흉한 도깨비불처럼 불쑥불쑥 날뒤는 인근 농가의 불빛. 나는 러시아의 장래는 붉은 화살 같다고 생각한다. 아직은 희망과 절망으로 뒤범벅된 채 국민들도, 정치지도자들도 혼돈 속에 있는 듯 하지만, 러시아 광활한 대지 그 찬란한 문화유산을 볼때 그것을 꽃피우게 한 슬라브 민족의 풍토적인 ‘잔인함과 강인함’으로 붉은 화살처럼 달려 세계의 열강 대열에 되서게 될 것은 시간문제리라. 마지막날은 모스크바로 돌아와서 종일 시내를 관광하였다. 영하 20·의 혹한을 만끽하며 크렘린, 붉은 광장과 레닌 묘, 도스토에프스키 박물관, 모스크바 대학교, 레닌 언덕, 굼 백화점, 아르바트 거리를 쏘다녔으니 평소의 내 ‘원풀이’를 한 셈이다. 1월 24일 오후 김포공항에 대기중이던 관광버스를 타고 귀향 길에 오른 우리 18명의 한국신사들은 단장님의 ‘매우 잘 된 여행’이라는 총평을 끝으로, 돌아가서 해야 할 일을 헤아리려 깊은 시름에 잠겼다. 신형식 55년 생. 서울대 화학공학과를 졸업하고 미국 콘웰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고등학교 시절부터 시를 쓰기 시작해서 90년 시집「추억의 노래」로 문단활동을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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