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6.3 | [문화시평]
문화시평
남성위주 사회의 편견에 대한 여성작가들의 날카로운 응시
신춘문예와 올해 문단의 흐름
글/김만수 군산대 국문과 문학평론가
(2004-02-10 15:58:11)
신춘문예라는 ‘제도’는 현재 지구상에서 한국에만 존재한다고 한다. 일본에도 예전에는 신춘문예가 있었다고 하나 이미 없어졌다 한다. 하여튼 신춘문예는 등단에 등단하기 위한 가장 중요한 통과의레로 되어 있기 때문에 지금도 이땅의 문학도들은 신춘문예를 앞두고 ‘열병’을 앓는다.
신춘문예가 좋은 문학도들을 끌어들이고 육성시크는데에 긍정적인 역할을맡고 있는가에 대해서는 회의의 목소리도 적지 않다. 신춘문예가 신인들의 실험과 의욕의 산물이 됮 못하고, 그야말로 어디선가 한번 본 듯한, 베낀 듯한 모범 답안을 양산하고 있다는 비판이 그것이다. 신인의 당당함이란 어디에서 오는가. 한 문인의 시인다움이란 기준이 문학이나 문단에 대한 통렬한 공격이어야 하지 않을까. 그래서 발터 벤야민 같은 사람은 저자에 대해 이렇게 정의하지 않았던가.
책을 쓰는 사람이란 도서관을 폭파하고 부정하기 위해 책을 쓴다. 진정한 의미에서 글쓰기란 해우이는 도서관의 모든 글들을 부정하기 위한 것이다. 선배 작가들의 작품을 읽고 만족했다면, 그는 한 줄의 글도 더 쓸 필요가 없는 것이다. 그는 선배의 글을 부정하기 위해 그만의 작품을 쓴다!
그러나 신춘문예는 아무리 선의의 선정자가 고른다 해도 자기의 취향에서벗어날 수 없다. 일급이 시인, 소설가, 비평가가 고른 작품이라 해서 그 선정작이 곧 일류가 되는 것은 아니다. 새로운 작품이란 일류의 작가에 의해서 평가되는 게 아니라, 일급의 독자들에 의해 평가되어야 하는 것이다. 대부분의 나라에서는 작품은 편집자들에 의해 선택되어 독자에게 전달된다. 이것이야말로 당연한 유통 구조인 것이다. 그러나 우리와 같은 신춘문예의 구조에는 유통이라는 개념이 없다. 신문사의 역할은 당선작이 선정된 후 그 작품을 한 차례 신문에 실어 주고 상금을 전달하는 것으로 끝난다. 예전에는 서울신문사의「예술과 비평」,「계간문예」, 중앙일보사의「문예중앙」등이 문학잡지로서이소임을 어느 정도 맡긴 하였지만, 그 한계란 뻔한 것이다 현재 어느 신문사도 자기 출신 작가들을위해 나서서 출판 사업을 대행해 주지 않는다. 신춘문예라는 이름을 걸고 있으면서도 정작 작품과 작가의 사진, 당선 소감 등은 다른 기사에 밀려 1월 1일자에 실리지 못한다. 신문사로서는 뉴스 밸류가 떨어지는 문학작품을 1일자 신문에 내지 않는 것이 당연할지도 모른겠다. 그러나 신인 작가를 대하는 대접치고는 그리 기분 좋을 리는 없다.
적어도 다음과 같은 경우는 신춘문예를 거치지 않는 것이 좋을 듯하다. 작품의 형식이 지나치게 실험적이어서 신문의 일반 독자들이 접하기에는 좀 어려운 작품, 다루는 주제가 너무 어두운 색조여서 희망의 새 아침에 실리는 미담기사나 희망적인 새해의 청사진과는 거리가 있는 작품, 분량이 방대하여 문학잡지에서 바로 단행본으로 출간할 수 있을 정도이거나 연재나 가능한 작품 등, 이런 경우는 바로 문학 전문 잡지사에 투고하거나 동인지를 거치는 것이 좋을 듯하다.
그럼에도 신춘문예가 주는 매력은 대단한 것 같다. 개인의 초라한 서재에서 일약 중앙의 문단에 낄 수 있다는 것. 한 신인이 제도를 거쳐 한 공인으로서 평가받을 수 잇는 것이 등등이 그 이유일 것이다.
봉투를 꺼내어 / 부의(賻儀)라고 그리듯 겨우 쓰고는 / 입김으로 후-불어 봉투의 주머니를 열었다 / 봉투에선 느닷없이 한 움큼의 꽃씨가 쏟아져 / 책상 위에 흩어졌다 채송화 씨앗 / 씨앗들은 저마다 심호흡을 해대더니 / 금새 당당하고 반짝이는 모습이 되었다.
조선일보 시 당선작인 최영규의「賻儀」(부의) 일부이다. 이 작품은 죽음/삶의 이중성을 잘 포착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사실 위의 작품은 매우 훌륭한 작품이다. 그러나 ‘신춘문예용’이라는 느낌이 없지 않다. 신춘문예의 선자들은 늘 기교 중심, 쇄말주의 등의 모범 답안에 대해 질책한다. 그러나 막상 선자의 입장에 서서 보면, 기교와 쇄말이 끼여들지 않은 작품을 당선작으로 밀 수는 없는 처지에 접할 수도 있다. 자기 자신만의 시각과 문체를 가지는 것이 가장 중요한 조건이지만, 신춘문예의 한계인 것이다. 동아일보의 소설 당선작인 이한음의「해부의 목적」은 실물학 강의 시간이나 강연문에서나 구사될 수 있는 어법과 형식을 잘도 오려낸 작품이다. 이 작품이 흔쾌하게 당선작으로 꼽힌 이유는 세련된 유머, 식물에서 인간으로 확대될 수 있는 생명의 법칙에 대한 발견(해부)에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아주 편한 호흡으로 읽을 수 있는 이 작품은 그만그만하게 심각한 체 하면서 심사에 관련된 이러저러한 눈치를 보는 경향에서 벗어나, 활달하게 자기만의호흡을 유지한 점이 강점으로 작용했던 것으로 보인다. 너무 심사 요건에 얽매이지 않되 또 그 요건에 크게 벗어나지 않은 것, 이것이 신춘문예용 작품의 특성이다.
이번 신춘문예를 보면, 여성 작가들이 상당히 많이 늘었음을 보여준다. 몇 년 전부터 일어난 현상인데 크게 보면 우리 문단이 일종의 ‘남성적’ 주제를 잃어 가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우려를 낳기도 한다. 그러나 여성 특유의 섬세함은 단순히 문체나 주제에만 국한된 게 아니라, 사물을 보는 근본적인 시가고가도 관련된 것이다. 남성 위주의 사회가 안고 있는 우스꽝스러운 편견과 분답을 여성 작가들은 날카롭게 응시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다.
비평에서는 작가론과 작품론이 강세였다. 80년대의 비평이 민중문학론 등 큰 주제를 다룬 반면, 이제는 작품이 담고 있는 미학적 측면에 주목하고 있는 것으로 보이는데, 이 또한 역기능이 없지 않다. 비평의비평다움은 비판에 있는 터, 이를 도외시하고 대학원 정도에서 배운 미학적 관점을 비판없이 되풀이하고 있는 이러한 경향은 크게 보아, 사회와 인간에 대한 고민이 문학의영역에서 추방되고 있는 듯한 느낌을 준다.
김만수 60년생으로 전주고등학교를졸업했다. 서울대 국문과와 같은 대학원에서 희곡을 전공하고 95년부터 군산대 국문과 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전북지역의 문학에 각별한 관심을 갖고 있는 젊은 문학평론가로 앞으로 활발한 활동이 기대되고 있다. 평론집으로「문학의 존재 영역」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