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6.3 | [신귀백의 영화엿보기]
영화평
리얼리티가 아쉬운 고품격 섹스 영화
<리어설>
글/장세진 영화평론가
(2004-02-10 16:10:12)
지난해 12월 16일 동시 개봉된 <돈을 갖고 튀어라>를 보고 <리어설>상영관에 들어간 나는 깜짝 놀랐다. 두 영화가 흥행 성공할 것이라는 전망이 이미 나왔었지만 <리어설>의 경우 <돈을 갖고 튀어라>보다 오히려 많은 관객으로 가득 차 있었기 때문이다.
물론 <돈을 갖고 튀어라>보다 규모가 적은 극장에서 <리어설>을 상영하고 있었지만 그야말로 입추의 여지가 없는 그래서 양쪽 통로나 맨 뒤편에 입석 손님이 상당수 있을 정도 였다. 그리고 이례적으로 4주 동안 상영되기도 했다.
내킨 김에 하는 말이지만 최근 우리 영화가 그 어느 때보다도 흥행 상승세를 타고 있다. 지난해 11월 18일 개봉된 <아름다운 청년 전태일>이 예상을 개고 28만 명(96.2.2 현재, 관객 동원 수치는 이하 이 기준임)을 동원했는가 하면 <돈을 갖고 튀어라>와 <리어설>이 각각 19만 명과 13만 명(「영화소식」96.1.17일자)의 흥행 성적을 보이고 있다.
또 12월 24일 개봉한 <홍길동>이 25만 명을 동원했고, 12월 30일 간판을 건 <런 어웨이>의 3주째 집계가 8만 명이니 종영까지의 1주일 관객 수를 감안하면 10만 명은 웃돌 것으로 보인다. 정확한 집계는 아직 보이지 않지만 올 1월 20일 개봉한 <아마게돈>역시 15만 명(서울 기준)동원은 무난 할 것이라는 전망이다.
우선 대견스럽고 반가워서 서두가 장황해졌지만, 특히 <리어설>흥행에는 다소 의아스러운 마음을 떨칠 수 없기도 하다. <리어설>은 한국 관객들이 즐겨 보는 장르의 영화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래서일까. <리어설>은 앞에 열거한 영화들 중 유일하게 평론가의 시선을 끌지 못하고 있다. 그것은 여기서 우리가 <리어설>을 만나려는 이유이기도 하다.
아무튼 91년 하이틴 영화 <하얀 비요일>로 데뷔한 강정수 감독이 92년 <우리 사랑 이대로>에 이어 3년만에 연출한 <리어설>은 섹스로 상징되는 지독한 사랑을 그린 작품이다. 폭력배 민수(최민수)와 3류 연극배우 승혜(박영선)가 섹스 위주의 사랑을 나누는 이야기가 그것이다.
먼저 집고 넘어갈 것은 강정수 감독이 연출이 점차 나아지고 있는 점이다. 그 잣대를 무엇으로 삼아야 할 지에 대해서는 다소 복잡함이 있지만 대략 ‘영화를 위한 영화’에서 ‘작품을 위한 영화’로 소폭의 발전을 한 것이 눈에 띤다.
딱 끄집어 말하면 그런대로 리얼리티를 살려내고 있다는 것이다. 아무리 영화를 대하는 잣대가 복잡하더라도 리얼리티가 없으면 그 황당함으로 인해 뒷맛이 개운하지 않을뿐더러 반값밖에 할 수 없음을 물론이다.
그렇다고 <리어설>이 리얼리티 결여를 완벽하게 불식시키고 있는 것은 아니다. 시비조 혐의가 풍기지만 서두부터 그런 점은 발견된다. 다름아니라 민수의 승혜 강간 장면인데 화장실 문도 잠겨지지 않았고 상식적으로 생각되는 예컨대 소리를 지르거나 몸부림을 치는 거센 반항도 보이지 않았다.
주먹을 내세우며 악덕 사채업자 장사장(전무송)의 졸개 노릇을 하는데다가 “화장실에서 뭐든 비워 버릴 때 가장 행복을 느끼는”인물이기에 민수의 그런 행동이 비상식적으로나마 이해되긴 할망정 너무 ‘영화적’이다. 주변 인물들의 묘사가 전혀 없는 해변에서의 키스신 등도 그 연장선이다.
물론 그것은 기이하면서도 광적인 그들의 사랑을 예고하는 복선 구실을 하고 있다. 흔히 같잖은 섹스 영화에서 대책없이 그려내는 이를 테면 성폭행 한 남자를 오히려 기다리는 따취처럼 느껴지지는 않지만 가까이 다가가려는 승혜와 민수, 참사랑을 느끼는 민수와 이제 혐오하게 되는 승혜, 그리고 민수의 죽음 속에서 맞이하는 승혜의 끌림 등 사랑 심리가 리얼리티없는 서두의 강간 장면으로부터 비롯된 것임을 말할 나위가 없다.
섹스를 전진 배치해 사랑으로 승화시키려 하고 있지만 일단 주제 의식면에서 돋보이는 대목이라 할 만하다. ‘색깔있는’ 음악과 영화의 성격을 분명히 한 노골적 앵글의 섹스 신, 시종 웃음기 없는 음산한 최민수의 표정 등도 주제 표현에 한몫하고 있다.
아무런 교성없이 음악을 깔아 처리함으로써 비교적 ‘신사적인’ 섹스 신이라는 느낌을 주지만 그러나 제작사가 선언한 ‘고품격의 섹스 영화’인지에 대해서는 그리고 “한국 영화 역사상 가장 환상적이고 격렬한 섹스 장면이 탄생할 것”이라는 장담에 대해서는 흔쾌하게 동의되지 않는다.
한편 모델 박영선은 대역 없는(그점은 최민수도 마찬가지)섹스 신을 무난하게 소화해 낸 것과 다르게 대화, 표정 등 연기 면에선 최민수를 따라잡지 못했다. 본인에겐 미안한 소리겠지만 박영선은 그냥 모델로 남아 있는 것이 나을 듯 하다.
그밖에 민수와 만나고 싶어 애태우다가 비행기가 떴는데 바로 베드신이 이어지는 등 화면 전개가 고르지 못했고, 결국 주인공인 민수를 죽이기까지 하는 장 사장의 추적이 너무 완만하여 극적 긴장감을 반감시켰고, 민수와 승혜의 파국에 대한 구체적인 동기가 너무 ‘절제’되어 아쉬움을 주었다.
장세진 55년 전주출생으로 원광대학교 국문과를 졸업하고 83년부터 영화,방송,문학평론을 시작했다. 지금은 남원중학교 교사로 재직중이며 저서로「우리 영화 좀 봅시다」「한국영화 씹어먹기」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