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6.4 | [문화저널]
진실과 용기에 대한 ‘돈돌라리’
제4회 「선언」정기 공연을 보고
글 / 김지영 MBC 구성작가
(2004-02-12 10:22:29)
내가 ‘선언’을 알게 된 것은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 대학 1학년 때 교내 노래패들이 한데 모여 장기수 문제를 다룬 노래극을 보고 적잖이 충격을 받은 적이 있었다. 장기수들의 처참하고 어려운 생활, 인간적인 고뇌들을 노래극으로 올리는 배우들을 보면서 많이 울었던 기억이 있다. 그때 무대에서 불렀던 ‘저 창살에 햇살이’이 노래를 부르는사람을 만나면 그가 나와 비슷한 시기에 학교에 다녔다는 걸 짐작할 수 있다.
일일이 기억 할 순 없지만 그 뒤로 노래극은 빠지지 않고 봤던 것 같다. 학교 안에서 노래를 불렀던 그 선배들을 만날때면 잘 알고 있는 듯한 착각에 무심코 인사를 꾸벅하기도 해서 그들을 당황하게 하기도 했었다. 당시 그들은 나의 우상이었다. 어떻게 저렇게 아픈 노래를부를 수 있을까■ ■ ■ ■ ■어디서 저렇게 무서운 힘이 쏟아져 나올까■ ■ ■ ■ ■.절망스럽고 힘든 상황을 노래했지만 그 노래를 부르다 보면 용기를 얻었고 위로가 됐고 희망을 찾을 수 있었다. 그러다 나중에 그 선배들이 ‘선언’이라는 사회 노래패를 만들었다는 것을 알았고 그 사람들의 고집스러움이 반가웠었다. 세상도 변했고 다들 변해가는데 아직도 변하지 않고 있구나■ ■ ■ ■ ■. 그렇다. 선언에는 변하지 않는 사람들이 있다. 끝내 설득하다 지쳐서 그냥 쉽게 타협해 버리는 생활에, 바쁘다는 핑계로 소홀해져 버리는 사람챙기기에 한없이 난도질당했다고 생각되는 원칙과 진실에 대해 선언은 용기와 희망을 준다. 그래서 각자 생활 전선에서 어렵게 싸우면서 각박해져가는 우리들은 ‘선언’의공연이 이 메마름을 해결해 줄 수 있을 거라고 믿고 있다. 더구나 정기공연을 무대에 올릴 때마다 하루가 다르게 성장하고 있는 ‘선언’이기에 이번 공연에선 얼만큼 자라 있을까 자못 궁금하기도 했다.
‘돈돌라리’라는 낯선 제목으로 올려진 제 4회 선언의 정기 공연은 잃었던 것들을 찾아보겠다는 선언의 의지를 담은 무대였다. 구경꾼에 머무르는 걸 용납하지 않는 선언이기에 언제나처럼 새로운 노래를 하나 배우기 시작한 열림마당은 굳어진 얼굴과 마음을 한 껏 열어제끼면서 청중들로 하여금 노래가 전하고 싶은 이야기에 귀를 기울일 수 있도록 했다. 북청 사투리로 ‘돌아오라’는 뜻의 돈돌라리를 통해 이제는 기억조차 희미한 그때를 떠올리는 것으로 공연은 시작했다. 이번 공연은 잃었던 노래를 찾는 「노래-돈돌라리」는 어릴 적 놀이 동요로 시작되었다. 노래를 듣다 보니 ‘맞아, 그때 이런 노래도 있었어■ ■ ■ ■ ■.’라는 새삼스런 기억도났고 그러다보니 나도 모르게 따라 부르게 되기도 했다. 요즘 노래는 맘먹고 배우려고 노래방을 몇 번씩 드나들어도 1절 이상을 따라 하기가 수비지 않은데 그땐 책에도 없던 노래들을 동네 아이들 모두가 불렀었다. 컴퓨터나 전자 오락기가 없었는데도 해지는 줄 모르고 놀다가 밥먹으라고 부르는 엄마의 소리에 마지못해 집으로 끌려 들어가곤 했었다. 아직 이런 기억을 가진 세대가 있을 때에 선언이 우리 구전민요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다는게 반가웠다. 앞으로 선언 무대에서 이런 구전민요를 들을 수 잇게 될 것같아 더욱 기대가된다. 이렇듯 그 시절 동무들에 대한 향수를 불러일으키면서 마무리된 첫째 마당은 사람에 대한 향수를 불러일으키는 두 번째 마당으로 자연스럽게 이어졌다.
예전엔 친구가 전학 가거나 이사 가거나 하면 눈이 퉁퉁 붓도록 많이 울었었는데, 길거리에서 구걸을 하는 사람을 보면 그냥 지나치기가 너무 힘들었었는데■ ■ ■ ■ ■. 요즘은 나말고는 중요한 게 아무것도 없어져버렸다. 딱하고 도와주고 싶은 마음이 어쩌다 들더라도 괜히 나섰다가 귀찮아질 것을 미리 염려한다. 그저 알아서 잘 했으면■ ■ ■ ■ ■이 고작이다. 이렇게 마음이 메말라 가면서 더 이상 남을 위해 눈물을 흘리는 사람도 없다. 사람을 위해 울지도 않으니 환경이야 어떻게 되든 상관하지 않는다. 나 살기도 힘드니까■ ■ ■ ■ ■.그런데 선언은 이런 자기 합리화와 변명을 허락하지 않는다. 이처럼 스스로 굴복하고 인정하는 일상을 강하게 부정하는 것으로 두 번째 마당을 정리하면서, 세 번째 마당을 통해 잃어버렸던 정서와 인간성을 회복하고 힘들어도 그런 살맛나는 세상을 만들어 보자는 약속을 남기며 마무리했다.
매번 느끼는 거지만 선언 공연이 긑나고 나면 숙제 하나씩을 받은 기분이다. 숙제 검사는 다음 공연 때 한다. 얼마나 잘 살았는지 확인하고, 힘들진 않았는지 다독이면서 또다시 조금더 앞으로 나가 보자고 할 것이다.
이걸 알면서도 사람들이 자꾸 모여드는 것을 보면 ‘비슷비슷하게 힘들고 외로운가 보구나’라는 생각이 든다. 더구나 희망없는 음울한 노래가 급속도로 확산되는 요즘을 염려하는 많은 사람들이 선언에게 그 대안을 제시하길 바라고 있기에 선언이 해야 할 일이 더욱 많아지고 있다. 그런 의미에서 이번 공연을 통해 선보인 국악 실내악단의 무대는 가장 인상적이고 또 앞으로 선언이 나아가야 할 방향을 미리 엿볼 수 있게 하는 좋은 시도였다. 그러나 이런 기대감에 몇 가지 첨가하고 싶은 것이 있다. 먼저 선언은 노래패라는 것을 말하고 싶다. 하고 싶은 많은 이야기들은 노래로 나타내야 한다. 출발에서부터 마무리까지 관통하는 줄거리를 가지고 극을 수성해 나갈 때 하고 싶은 주제들을 보다 명확히 전달할 수 있으리라 생각된다. 하나 더 선언은 시민들을 상대로한 대중 노래패라는 것을 말하고 싶다. 변함없는 고정팬들 뿐 아니라 처음 온 사람들도 그 상황을 이해할 수 있는 치밀함이 잇었으면 좋겠다. 늘 만나는 사람뿐 아니라 이제는처음 보는 새 얼굴이 다음 번에 또다른 새 얼굴을 데리고 오는 모습을 보고 싶다는 얘기다.
공연이 있던 날 봄비가 내렸다. 반갑기는 했으나 공연장을 찾기에 좋은 날씨는 아니었다. 그런데 끝나고 보니 빗속을 뚫고 그 공연을 찾았던 사람들이 제법 많았다는 걸 알 수 있었다. 가뭄을 해결해 줄 단비처럼 선언의 다섯 번째 정기 공연을 그렇게 기다리는 사람들이 많이 있을 것을 의심치않는다.
김지영/ 전북대 생물학과를 졸업했다. 재학시절 학교방송 황토마루 TV에서 활동, 졸업 후 전주문화방송에 입사하여 현재 ‘얼쑤 우리가락’, ‘이런 사람, 저런사람’의 구성을 맡고 있다. 진한 감동이있는 휴먼 다큐멘터리를 제작하는 것이 소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