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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6.4 | [문화칼럼]
흙과 스무고개, 그 하나의 우주
글/이태영 덕천교회목사■순창농민상담소 소장 (2004-02-12 10:27:08)
어렸을 때 즐겨 하던 놀이 중에 스무고개가 있었다. 질문자가 생각하고 있는 어떤 사물을 스무 번의 질문안에 알아맞히는 놀이였다. 그런데 스무고개를 하면 질문자가 처음에 반드시 동물성, 식물성, 광물성 중에 하나를 먼저 말해주어야 했기 때문에 국민학교 이후로 뭐든지 모든 사물을 세 가지 중의 하나로 분류하는 습관이 생겼다. 연필이나 구슬은 광물성이었고, 동물원에 가면 동물성 천지였고, 아버님이 유난히도 이뻐하셨던 선인장의 꽃은 식물성이었다. 모든 사물을 세 가지로 분류해서 보던 습관은 스무고개 놀이를 하지 않으면서 점점 사라져갔다. 신학교를 졸업하고 나는 임실 오수의 농촌-도시 복합형 교회에서 교육담당 전도사로 봉사하다가 1년 후인 83년 순창에 있는 마을 단위의 작은 교회를 섬기게 되었다. 교인이라고 해봐야 고작 열 두어 명 있는 작은 교회였다. 여러 가지 불편한 점도 없지 않았다. 버스를 타려면 1시간씩 걸어다녀야 했고, 물도 펌프로 퍼 먹어야 했다. 단칸방에 때로는 지네가 나오기도하고, 갈라진 천장 틈으로 구더기가 떨어지기도 했다. 그러나 도시에서만 자랐던 나는 농촌에서의 하루하루가 고생으로생각되지 않았다. 2년 정도 지난 다음 전주에 있는 큰 교회의 지원을 받아 밭을 3백 평 샀다. 직접 농사를 지어야 농민들의 어려움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들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 밭에 율무, 백지, 방풍, 마 등 약초도 심고 콩 같은 일반 작물도 조금씩 심었다. 오수에서 알고 친하게 지냈던 친구가 가끔 와서 기술 지도를 해주었다. 당시 그 친군즌 약초를 재배해 농가소득을 올려야 하나다고 생각하고 젊은 패기로 밀어붙이고 있었다. 호미 한 번 잡아보지 못했던 나는 농사를 통해 많은 것을 배울 수 있었다. 씨에서 싹이 트는 것이 신기했다. 봄비가 초촉하게 온 다음날 밭에 가 보면 새싹들이 씨앗의 껍질을 모자처럼 쓰고올라오는데 그게 그렇게 예쁠 수가 없었다. 하루는 밭에 서 김을 매다보니 뭔가 흙 속에서 꼬물거리는 것이 있었다. 무슨 벌렌가 궁금해서 흙을 한 줌 쥐고 자세히 보았다. 이름은 모르지만 등이 딱딱하고 검은 색깔의 벌래였다. 새끼 손톱만한 크기였다. 좀 더 자세히 들여다 보는데 아 , 벌레는 그것만이 아니였다. 여기저기 흙을 파고 나오는 놈, 다시 흙 속으로 들어가는 놈, 여러 마리의 벌레들이 부지런히 움직이고 있었다. 놀라서 더 자세히 들여다 보았다. 그랬더니 원 세상에! 눈에 잘 보이지 않을 만큼 작은 벌레들이 수 없이 많지 않은가? 고은 흙 알갱이가 미세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흙인줄 알았는데 벌레였다. 어느새 내 눈은 현미경이 되어 있었다.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손바닥의 흙을 쳐다 봤다. 충격이었다. 나는 이때까지 흙이란 단지 광물성으로 생각했다. 스무고개의 분류법에 따르면 흙은 당연히 광물성이었다. 죽어있는 것이었다. 그러나 난 그 시간 이후부터 흙에 대한 분류를 바꾸었다. 흙은 생물성이다! 살아있는 것이다! 이러한 깨달음은 논에서 모를 심을 때도 경험할 수 있었다. 하루는 모내기를 하면서 잠간 쉬는 시간을 이용해 논물을 손으로 떠 본 적이 있다. 논에 구데기 비슷한 것이 헤엄쳐 다니면서 사람을 무는데 무척 따갑고 아파서 어떻게 생겼는지 궁금했기 때문이다. 그 벌레가 논 물에 있기에 두손으로 논물을 떠서 보는 순간 나는 다시 한 번 충격을 받지 않을 수 없었다. 한 공기의 양도 안되는 그 논물에는 엄청나게 많은 생명체들이 꼬물대고 있었다. 실지렁이처럼 빨갛고 가느다란 벌레, 깨알만한 크기의 물방개 모양 벌레, 현미경으로 보아야만 생김새를알수 있을 것 같은 작은 벌레 등이 그 논물 속에서 열심히 살아가고 있었다. 그랬다! 논물은 그 자체가 하나의 우주였다! 논물에는 거머리와 올챙이, 소금장이와 물방개 정도만 살고 있다고 생각했던 나에게 논물은 또하나의 충격이었다. 이런 이야기를 마을들에게 했더니 싱겁다고 웃었다. 당연한 걸 가지고 대단한 발견이라도 한 것처럼 말하는 내가 우스웠나보다. 그러나 나에게는 상식이 바뀌는 일이었다. 흙에 대한 선입관과 가치관이 근본적으로 바뀌는 일이었다. 죽어있다고 생각한 것이 살아있는 것으로 바뀐 것이다. 단순한 물질이 살아있는 생명체로 다가온 것이다. 우리는 오늘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을 커다란 기계로 보는 가치관 속에서 살아가고 있다. 인류역사의 가장 최근에 생긴 산업사회는 이를 이끌어가는 저변에 기계론이 있다. 이 기계론적 가치관은 이 세상을 이끌어가는 원동력을 에너지로 파악한다. 그리고 어떤 사물이든지 대체 가능한 부속품으로 본다. 사회를 이루는 기본 구성원인 개개인은 말할 나위도 없거니와 심지어 지구까지 부속품으로 여긴다. ‘지구의 수명이 다하게 될 때 인류는 어떤 혹성을찾아 나설 것인가?’라는 질문은 기계론적 가치관의 극치를 보여준다. 대인관계도 마찬가지다. 나에게 잇어 저 사람이필요한 사람인지, 아니면 쓸모 없는 사람인지를 따지는 것이 그렇다. 조직이라는 것은 더 말할 나위가없다. 이 사회와 세상은 그저 커다란 물리적, 혹 화학적 결합에 의해 움직일 뿐이다. 닩 용(用)과 불용(不用)이 잇을 뿐이다. 그러나 21세기를 맞이하는 오늘에있어 이러한 기계론적 가치관이 우리 인류의 장래를 과연 보장하고 있는지 우리는 심각하게 질문하지 않을 수없다. 강을 단지 수자원으로 생각하고, 산을 그저 광물을 얻기 위한 대상으로 바라본 결과 우리는 무엇을 얻었는가? 지구가 언젠가는 불용(不用)이 될 상태를 전제함으로써 인류 스스로가 지구에 있어 불필요한 존재하라는 것을 고백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이 세상은 광물성이 아니다. 커다란 기계도 아니다. 살아있는 생명체요, 유기체이다. 이 세상은 온통 살아있는 것으로 가득차있다. 팔다리가 우리 몸에 있어 용, 불용의 관계가 아니라 몸의 한부분인 것처럼, 우리 인간도 이 세상의 한부분으로 살아가는것이다. 오늘날 지구는 무엇인가? 스무고개식 화두에 우리는 진지하게 답을 해야 한다. 인류는 무엇이며, 또 나는 무엇인가? 그리고 이 모든 것은 어떤 관계인가? 우리는 이 질문에 대한 답을 농촌에서 찾을 수 있다. 오늘날 농사가 중요한 것은 단지 식량과 환경보전을 위한 목적에서가 아니다. 인류가 살아날 수 있는 답이 감춰져 있기 때문이다. 울 인류가 21세기를 앞두고 농촌을 보며, 살아있는 흙을 보며 ‘ 이 세상을 무엇이라고 운을 떼야 하나?’라는 스무고개식 화두를 진지하게 풀어갈 때 우리 인류가 직면해 있는 숱한 과제가 비로소 풀려지리라 생각한다. 이태영 / 58년 서울엣 태어났다. 한국신학대학을졸업했으며 83년부터 순창에 뿌리내리고 살고 있다. 농민을 위한 상당소를 87년에 개설해서 운영해 오고 있고, 순창신문을 91년에 창간해서 지금까지 발행하고 있다. 사람들이 돌아오는 농촌을 만들기위해 어떤 일을 할 수 있을까를 늘 고민하며 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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