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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6.4 | [문화저널]
기괴와 난장의 연극미학 창작극회<부자유친>공연을 중심으로
글/ 김길수 연극평론가&#61598;순천대학교 교수 (2004-02-12 10:34:17)
20세기 후반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부자유친(父子有親)이란 단어는 과연 무얼 의미하는가? 부자(父子)는 있지만 유친(有親)이 아닌 무친(無親)의 세계만이 판치는 이즈음, 연극 <부자유친>(오태석작, 박병도 연출)은 부자 윤리가 상실된 오늘의 병리를 기괴와 난장의 연극 언어로 통렬하게 고발, 풍자하고 있다. 가곡 ‘봄이 오면 산에 들에’라는 선율에 맞추어 육순의 왕(정제혁 분)은 열다섯 살 소녀를 왕비(이태영 분)로 맞아 회춘을 즐긴다. 계단을 사뿐히 내려오는 궁녀들 사이로 늙은 왕의 주책없는 음색이 들려나온다. 여색을 밝히는 왕, 쾌락에 젖은 그의 음성은 듣기가 거북하다. 여색에 환장한 늙은 왕의 비정상적 모습이 클로즈업된다. 그러나 왕은 막강한 왕권으로 이를 은폐시킨다. 이런 왕에 아들(임형택 분)은 반발한다. 아들은 의대중에 시달린다. 옷 실밥이 몸을 기어가는 느낌, 이를 참지 못해 거의 발가벗는 상태로 있어야 하는 세자, 그 괴로움을 참지 못해 갖은 추태가 벌어지고 여기에 왕에 대한 반발이 가미되었으니 그 꼴이 오죽하랴&#61598;&#61598;&#61598;&#61598;. 아들의 대응 행위는 회괴함에 극치에 이른다. 아들은 세자의 신분을 망각한 채 아비를 희롱하는 패륜아로 전락한다. 애증으로 얼룩진 싸움은 급기야 극한 광란의상태로 치닫는다. 광란은 부자간에 벌이는 몽유병적 싸움 형태로 구체하된다. 이들의 싸움형태는 가관이다. 뒤주 속의 세자가 죽어가면서도 아비를 야유한다. 야유의 형태가 속알머리없는 어린애들의 싸움을 방불케 하낟. 뒤주 안에서 욕설과 저주의&#63364;&#63515;&#63686;리가 들려 나오고 뒤주 틈으로 아들의 주먹손이 나와 아비를 조롱한다. 장화신은 채 몽유병자 모습을 하고 있던 왕, 분기 탱천하여 칼을 빼들고 미친 듯이 뒤주 위로 뛰어 올라 그 틈새를 마구 쑤셔댄다. 아비가 훈계하려 하면 그 훈계 언어를 아들은 흉내낸다. “내가 죽으면 삼백년 종사가 망할 것이나 네가 죽으면 종사는 보전될 것이다”. 이 훈계 언어는 아들에의해 조롱언어로 변용된다. 훈계의 내용은 그것의 형식과 일치하지 않는다. 왕권의 체통은 사라진지 오래다. 발악과 광포, 혼돈과 난장의 세계가 불일치의 이미지를통해 극대화된다. 삶과 죽음의 경계 마저 무시하는 난장의 세계, 이는 영조와 사도세자간의 문제에 머무르지 않고 20세기 후반으로 살아가는 오늘의 문제를 조망하게 한다. 유친(有親)을 잊어버린 채 완전 개망나니처럼 애증의 진흙탕속을 허우적 거리는 수많은 부자(父子)들의 모습을 성찰케 하는 대목이다. 이 치유 불능의 상황을 우린 어떻게 대응해야 할까? 오태석의 난장세계를 살리기 위해 박병도는 그 나름의 새로운 연극적 변용과 실험을 가하고있으니 그게 다름 아닌 기괴성의 이미지이다. 기괴성은 갑작스런 전환구조를 통해 강렬한 힘을 발휘한다. 무대 구조, 빛깔, 소리, 상황이 갑자기 뒤바뀐다. 신하역의 배우들, 이들의 태도역시 살아있는 인간 모습에서 생명력을 상실한 마리오넷트로 변환된다. “뒤주를 대령하라!”는 호령과 더불어 모든게 갑자기 뒤바뀐다. 세자의 죽음을 몰고올 이 호령에 모두가 오금을 저리며 썸뜩해 한다. 무대는 완전히 음산한 빛깔과 소리로 가득찬다. 왕이 집전해 왔던 이층무대 중심부, 바로 그 대전밑에 숨겨진 소품들 갑자기 그 모습을 드러낸다. 숨겨진 뒤주, 꼭두로 전락한 신하들, 피묻은 인형들이 굉음소리와 더불어 희뿌연 안개 틈새를 비집고 등장한다. 신하들은 비정상의 왕, 광기의세자를 군주로 섬겨야 한다. 신하들은 이들의 명령에 따라야 한다. 신하들의 목숨은 파리 목숨으로 전락해 있다. 사관(정진권 분)이거 선전관이건간에 비위에 거슬리면 끝장이다. 충성스런 신하들, 왕이 그리고 세자가 죽으라 하면 이들은 그저 죽는 시늉까지 해야 한다. 특히 세자를 추종했던 작자들, 세자에게 공을 들여놓았던 신하들, 그들에겐 모든게 끝장이다. 이제 희망이 없다. 더구나 아비가 아들을 죽게 하다니, 이는 사람이 할 짓이 아니다. 그러나 추상 같은 어명에 순종해야 한다. 세자의 죽음을 인도해야할 신하들, 얼굴에 마스크를 쓰고 있다. 무표정이다. 입이 있지만 그들은 참언어를 이야기할 수 없다. 그들의 움직임은 꼭두기계의 움직임을 방불케 한다. 인간다운 생명력을 찾아볼 길이 없다. 시체를 상징하는 피묻은 인형들을 그들은 명령에 따라 뒤주 속에 던져 넣어야 한다. 그것도 날카로운 갈쿠리손으로 찍어 넣는다. 그 갈쿠리손은 왕의 명령에 따라 억지로 움직이는 살해기계에 불과하다. 축처진 다른 손은 허공을 향해 앞으로 뻗어있을 뿐 아무 일도 하지 못한다. 죽어가는 세자를 앞에 두고 있지만 자신들은 속수무책이다. 절망의 연속, 모든 관계는 단절되고 암담한 만이 계속되는 현실&#61598;&#61598;&#61598;. 스타카토 리듬의 움직임, 로봇들(이미라 외 4인)의 움직임, 희노애락의 감정을 포기한이들, 이제 사랑했던 사람과 영원한 단절이 이루어질 순간이다. “뗏장을 울려라!” “못질하라!” 광포한 왕의 명령. 흥분이 극에 달한 광란의 언어가 무대와 객석을 관통한다. 뒤주를 돌며 못질하는 신하들, 못질의 소리가 집단화되고 둔탁한 소리로 변용되낟. 영화 ‘태백산맥’의 주제선율이 둔탁한 못질 소리와 더불어 절망의 변주곡으로 합성되면서 감상층의 가슴을 짓누른다. 사도세자와 뒤주, 이는 삶의 영역에서 죽음의 영역으로 전환됨을 의미한다. 뒤주의등장은 그 자체만으로도 대단한 긴장감을 자아낸다. 세자에 대한 연민과 동정, 이는 당연하다. 그러나 이 공연은 연민이나 감정이입이라는 재래적 감상성에 극의 무게중심을 두지 않는다. 관객은 예상 밖의 기괴성 이미지와 난장의 이미지를 접하고서 그만 압도될 뿐이다. 군주의 행위가 유아들의 난장 행각을 벗어나려 하지 않기에 사람들은 절망한다. 절망의 변주곡은 죽음을 집행하는 신하들에게 머무르지 않고 나인 빙애(김경미 분)와 혜경궁 홍씨(김진옥 분)와 선희궁(최경성 분)에게로 이어진다. 대전에서 늙은 왕의 정사를 재연해야 할 빙애, 이는 빙애 자신의 죽음은 물론이고 세자의 죽음 마저 의미한다. 이를 알고 있기에 절망과 암담함을 상징하는 기이한 빙애의 웃음 소리는 오랫동안 감상층의 의식을 파고든다. 괴이한 빙애의 웃음 소리, 소름끼칠 듯한 음색과 표정 그리고 의도적인 불일치를 통해 유발되는 기괴한 에너지는 서서히 사유의 묘미, 수수께끼 풀이의 묘미를 야기시킨다. 배우들이 창출해내는 마리오넷의 이미지, 침묵의 이미지는 보다 다양한 성찰의 에너지를 불러 일으킨다. 남편의 처참한 죽음을 목격해야하는 해경궁 홍씨, 세손을 위해 아들의 죽음을 묵인하는 어머니 선희궁, 아픔, 고뇌, 그 절규의 극한점에서 이들은 인간적 언어와 감정을 감추어야한다. 베일과 가면의 이미지, 기계론적으로 내뱉는 허깨비의 이미지, 언어가 있지만 속마음을 감추어야하는 언어, 침묵과 무반응이 음산한 음향과 한데 어울려 절망의 극점을 기괴한 이미지로 연출해 낸다. 불일치를 통한 기괴성의 이미지는 시종 성찰의 반향을 얻어냈다는 점에서 이 공연의 최대 덕목으로 손꼽을 수 있다. 삶에 대한 애착, 권력에 대한 애착, 사랑과 증오에 대한 혈육 간의 반응, 생명을 초개처럼 여기며 충성하고자 하는 참 신하들(신상만, 최종만, 류경호, 김현석 분)의 행위. 생명을 부지하고자 벌이는 장난기 섞인 추태, 나약한 이미지, 이를 옛날과 오늘의상황이 교차하도록 다양한 실험과 기법을 동원했음은 박병도의 연극 열정과연출가로서의 재창조 의욕을 드러낸다. 그러나 군주와 신하 간의 난장 게임. 이의 현대적 변용은 비유 및 상징의 처방이 요구된다. 부자윤리가 상실된 오늘의 난장 세계, 그럼&#50647; 이에대한 무기력과 불감증은 침묵, 가면, 관계의 단절로 전이되고 있으니&#61598;&#61598;&#61598;&#61598;. 이 연극은 바로 이런 병리 현상을 상징적으로 드러냈다는 점에서 엄청난 맛과 멋을 되새기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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