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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6.4 | [문화저널]
분단시대의 마지막 작품 통일시대 첫 작품 극단 ‘길라잡이’의 <직녀에게>
문화저널(2004-02-12 10:35:59)
통일을바라보는 희망적 시선 「이별이 너무 길다. 슬픔이 너무 길다 ■ ■ ■ ■ ■우리는 만나야 한다」 언젠가 인지는 모르겠지만, 아마 내가 중학교 시절에 이 노래를 들어본 적이 있는 것 같다. 그 때는 무슨 내용인지도 모르고 흥얼거렸을 것이다. 하지만 이 노래가 생소한 사람이라도 가사의 흐름이나 리듬을 들어본다면 금방이라도 따라 부를 수 있는 노래이다. 이 노래의 제목과 독같은 <직녀에게>라는 연극이 무대에 올려졌다. 막이 오르기 전에 팜플렛을 보았다. 연출에 임진택. 어디선가 낯익은 이름이었다. 아! 작년 여름 홍세화 씨의 「나는 빠리의 택시 운전사」라는 책을 읽으면서 민족의 통일과 나라의민주화를 위해서 애썼던 사람들을 한순간에 매장시켰던 사건을 기억나게 하였다. 그 책의 뒷부분에 ‘빠리의 이반인 세화형을 그리며’라고 쓴 연출가 임진택 씨의 글이 떠올랐다. 아 그분! 한번도 보지 못한 임진택 씨의 일므이 이렇게 정감 넘치게 다가오는 이유는 무엇일까?■ ■ ■ ■ ■무대에 불이 꺼&#51275;다. 연극의 시대적 배경은 1954년 평남 무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당시 음악가 성경민은 자신의 음악 세계를 펼치기 위해 쌍둥이 현과 율을 데리고 월남하던 중 총에 맞아 숨진다. 숨지기 전에 성경민은 서관우와 최일호를 만나게 되는 데, 두 딸 중 서관우에게는 현을, 최일호에게는 율을 각각 맡아 달라고 하면서 숨을 거두게 된다. 현과 율의 미래는 과연 어떻게 될까? 이 연극은 현과 율의 삶이 크게 두 축을 이루어서 진행된다. 남한에 사는 현의 가정을 통하여 당시의 남한의 사회적 분위기를 적나라하게 보여주고 있다. 반공을 국시로 삼았던 군부 세력이 당시 지식인을 강제로 연행해 가는 모습, 아무 이유없이 빨갱이로 몰아붙여서 고문을 하는행위 등 지난 우리 사회의 이중적인 얼굴을 보았다. 그리고 북한에 사는 율의 가정을 통해서 잠깐이나마 북한의 단편적인 분위기를 보여주고 있다. 하지만 연극에서 보여주는 북한의 모습은 남한의 암을한 분위기와는 달리 활기찬 모습이 많이 반영된 것 같았다. 우리가 남한 사회에 있다 보니 상당한 부분에서 남한 중심적인 내용들이 많았던 것 같다. 현과 율은 이념이 서로 다른 곳에서 살았지만, 몇 차례의 만날 기회를 얻게 된다. 하지만 현과 율은 문화적 정서적 이질감을 극복하지 못하고 결국 만나지 못한다. 「직녀에게」라는 애절한 노래로 무대의 막은 내렸다. 나에게 수많은 질문과 대답을 남긴 채■ ■ ■ ■ ■ 연극의 주인공인 현과 율의 만남이 끝내 어긋난 것은 많은 아쉬움을 남겼다. 만약 현과 율의 극적인 만남이 있었다면 우리에게 통일에 대한 희망의 싹이라도 튀워 주지 않았을까? 연극을 보고 난 후 나는 누군가의 숙제를 대신 떠맡은 기분이었다. <직녀에는>우리 나라의 식민지 시대에 태어났던 아니 그 이전에 태어났던 우리 할아버지, 할머니 세대까지 어쩜다음 세대의 숙제로 남게 두게 된 경위를 짧은 시간이 나마 다시 한번 상기시켜 주었다. 홍세화 씨는 이제 한반도의 통일을 바라볼 수 있는 때가 왔다고 희망적인 말을 책에 남겼다. 정말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다른 이데올로기를 지닌 북에 대해서 체제에 대한 비난 보다는 그들의 사회를 존중하는 태도가 아닐까 싶다. 연극 <직녀에게>의 팜플렛 앞에 써 있었던 것과 같이 작품이 분단 시대의 마지막 작품이면서 통일 시대의 첫 작품이었으면 한다(전북대 송명은) 통일, 우리 세대가 해결해야 할 과제 연극 <직녀에게>가 극찬을 받는 이유는 광복 50주년을 맞이한 현재의 우리에게 통일염원극으로서 무대에 올려졌다는 이유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바로 극의 구성에 있어서의 탄탄함, 관중의 참여를 유도하여 극의 흥미를 높였던 점, 그리고 무엇보다도 돋보이던 배우들의 연기가 이 연극을 성대히 마치도록 해주었다고 생각된다. 1인 2역 현과 율의 연기를 거침없이 소화해 낸 여배우(배정미), 개성 있는 연기를통해 극의 흥미에 크게 기여한 율의 양아버지(박철민), 파업 전야에서 진솔한 노동자 연기를 보여주었던 완숙미가 돋보인 현의 양아버지(고동업)등은 각각의 독특한 개성으로 극중 인물들의 모습을 통해 그 시대 전반적인 사회 모습을 보여주었다. 머리로 느낀 것보다 몸으로 느끼는 감동이 진하고 오래 전달된다고 생각하는 나에게 연극 <직녀에게>는 바로 온몸으로 감동을 전해 받은 것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의 모습은 형편없게 보인다. 지금은많이 사라졌지만 얼마 전까지만 해도 초등학교 시절부터 부르던 ‘우리의 소원은 통일’은 6월만 되면 아이러니컬하게도 반공 글짓기, 반공 웅변되회, 반공 포스터 등에 밀려 제 구실을 잃어버린 적이 있었다. 통일되지않은 분단 국가에서 터득한 체제 순응적 자세라고 할까? 슬프게도 반세기의 긴 분단 체제는 통일에 대한 두려운 시선을 적지 않게 만들어 냈으니 말이다. 비극이 아닐 수 없다. 과연 통일을 과제로 둔 현시대를 살아가는 우리 젊은 학도들이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일까? 아직도 대중매체를 주름잡고 있는 TV에서는 북을 소재로 한 코미디가 끊이지 않고 계속되고 있음은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순간 순간 아무 생각없이 그저 말투가 우습다는 이유로 아무 생각없이 넘어가지만 그이면을 자세히 살펴보면 통일을 저해하는 요소가 다분히 존재함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자료의 제약과 통제로 우리에게 알려진 북한의 실상은 상당 부분 왜곡되어 있을 수 도 있고 어느 한 일부분일 수도 있다. 단지 순간적인 웃음만을 위해 제작된 것이라면 당장 집어치워야 할 것이다. 그리고 더 이상 북한을 분리된 나라로 보아서는 안된다. 비록 눈으로는 갈라진 조국을 보고 있지만 마음만으로는 굳게 단결된 하나로 보아야 할 것이다. 이런 마음가짐을 갖는 것이 아마도 우리가 해야 할 최선의 방책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해보며 그만 마칠까 한다. (전북대 윤명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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