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6.6 | [문화시평]
연륜에 맞는 권위와 위상의 절실함
문화저널 편집부(2004-02-12 11:23:47)
제28회 전라북도 미술대전
편집부
전라북도미술대전, 이제 스물 여덟해로 청년기를 벗어나고 있다. 그러나 전북 화단의 치열한 열정의 표출과 미의 압축의장이 되어야 할 전북미술대전이 지역 화단을 향상시키는 문화적 촉매로자서의 역할을 제대로 해내지 못하고 있다는 지적이다. 해마다 늘어나는 미술 인구에 비해 저조한 참여율은 물론 수준도 기대에 못 미치는 양상으로 전북의 지역적 특성을 담고 있는 대표적 미술행사로서의 권위와 위상을 찾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예총 전북지부가 주최하고 전북미술대전운영위원회가 주관한 이번 전북미술대전은 지난 4일 심사를 마친 입상작과 초대작가 작품으로 나누어 5월 13일부터 30일까지 전북예술회관에서 전시되었다. 한국화, 서양화, 조각, 공예, 서예, 사진, 건축, 판화 등 8개 부문에 모두 7백68점이 응모해 지난해 7백 17점보다 51점이 늘어난 전북미술대전은 양적으로 3~4년 전부터 꾸준한 증가 추세를 보여 온 흐름을 따랐다.
올해 미술 대전의 종합 대상은 한국화 부문의 이은경 씨가 안았다. 전북대 대학원에서 한국화를 전공하고 있는 이은경씨는 대학시절부터 시간이라는 주제로 작품 활동을 해 왔으며 이번 대상 작품「시간」도 그러한 맥락에서 시간과 공간을 결합, 작품에 투영시켜보고자 했다고 한다.
각 부문별로는 서양화의 이정웅씨「묵시-너를 위한 시」, 조각의 이길명 씨「외투입은 남자-운명」, 사진의 손석륜 씨「열연」, 공예의 강정이 씨「잉태」, 서예의 최혜순 씨「칠언」, 건축의 강방용 외 3인의 「음식박람회 계획」이 대상의 기쁨을 안았다. 그러나 판화 부문은 지난해에 비해 출품자 수나 작품의 수준에 있어 월등히 우수해졌다는 평가에도 불구하고 응모작의 수적 열세를 이유로 대상작이 없는 우수상만을 내놓기로 정해 놓은 규정을 그대로 적용해 대상작을 내지 못하는 아쉬움을 남겼다.
서양화 심사를 맡았던 김윤진씨는 “출품작들은 독창적이고 신인다운 실험성은 돋보였으나 대체로 작업의 성실성이 부족하다는 느낌이 짙었다. 또한 갈수록 응모자들의 연령이 낮아져 대학 재학중인 학생들이 많이 참여해 다양한 소재 선택은 보여주었지만 작품의 깊이에 있어 아쉬움을 남겼다”는 지적이다.
특히 올해 미술대전은 각 부문 입상자를 비롯한 몇몇 작품들을 제외하고는 전체적인 수준이 고르지 못했다는 목소리가 높아 신인들의 창의력이 오히려 퇴보하고 있는 것이 아니냐는 우려를 갖게 했다. 이같은 양상은 한국화 서양화 조각 부문의 응모자들이 다른 부문의 응모자들은 큰 폭으로 늘어나는 데에 비해 수적으로 줄어든 것에서 기인한다. 원인으로는 빈약한 운영 예산과 미술인들의 도전에 대한 진정한 관심과 애정 결핌, 그리고 입상자들에 대한 지속적인 지원 대책의 부재 등이 제기되었는데 이러한 문제점은 이미 수년 전부터 제기되어 왔던 것으로 근본적인 치유책이 시급한 사안임을 확인시켜 주었다.
이외에도 안정된 재정을 통한 적절한 시상금, 개최시기조절문제 등 개선되어야 할 많은 문제점들이 있다.
민족적 음악으로서 우리의 불교음악이 필요하다
불교와 국악 관현과의 만남
글/조석연 중앙대 한국음학과 석사과정
며칠 전 불기 2540년 부처님 오신 날 봉축기념으로 불교와 국악 관현악의 만남의 자리가 있었다. 영산회상 중 상령산 승무, 의식음악인 예불, 국악관현악 등 불교의 냄새가 물씬 풍기는 고요하고 성스러운 연주와 무용이었다. 또 불교 연합합창단과 송광사 크로마하프의 노래와 연주는 불심으로 인한 많은 노력 탓인지 이미 아마추어 수준 이상이었다. 그러나 곧 필자뿐 아니라 주위의 많은 사람들이 그들의 노래를 들으며 의아한 점을 발견하였다. 국악관현악 반주에 맞추어 부르는 찬불가는 기독교의 찬송가와 거의 흡사한 멜로디를 지니고 있기 때문이었다. 우리 민족의 민족적 종교였으며, 깊은 역사와 많은 자료를 간직하고 있는 불교에서 불교음악다운 그들의 음악을 찾지 못한 채 왜 서양음악에 의존해야만 하는지 다시 한번 생각해 보기로 하자.
상고 시대의 중앙집권적인 사회에서의 부여의 영고나 고구려의 동맹, 그리고 예의 무천과 같은 의식에서 볼 수 있듯이 음악과 노래와 춤이 분리되지 않은 악·가·무의 형태를 가지고 있었다. 그것은 종교적인 특성 중 하나이며 불교가 우리나라에 처음 들어온 소수림왕(372년)때 역시 불교의 교리와 함께 종교의식이나 음악, 춤을 포함하고 있었다. 불교가 외래의 종교이나 1천 6백 여년 동안 우리 민족의 삶과 함께 호흡해 온 종교가 되었고, 음악 역시 우리화된 새로운 불교음악을 탄생시켰다.
범패나 거사소리가 모두 불교라는 종교의식이나 포교활동에 의해서 생겨난 음악문화로서 노래로 불리는 성악곡이다. 그러나 불교가 당시 지배적인 종교였음에도 불구하고, 현재 불리우고 있는 찬불가는 거의 모두 서양음계로 되어 있다. 더욱이 종교적이고 성스러움을 강조하기 위하여 기독교 성가에 상요하는 단선성가 즉 그레고리안 찬스(Gregorian chant)선법까지 사용하고 있는 실정이다. 이는 개방적인 서양 문화가 한꺼번에 물밀 듯 들어오면서 다소 폐쇄적인 우리 문화를 압도하였다. 또한 기독교가 들어오면서 서양음악까지 포함하고 있었으며 주춤해진 불교는 그 자리를 잃으면서 음악마저 민족음악의 자리를 지키지 못하였다. 1950년 경 불교는 포교를 목적으로 하는 찬불가를 만들기 시작하였으나 그것은 서양음계를 기초로 하고 있는 기독교의 찬송가에서 비롯된 것이다.
이러한 찬불가는 포교활동에 얼마나 큰 효과를 가지고 왔는지는 알 수 없으나 우리에게 적잖은 아쉬움을 남기고 있다. ‘불교다운 음악’, 불교다운 성스러움‘ 그것으로서 불교의 음악을 다시 찾을 수는 없을까?
불교음악을 서양종교음악의 부산물이 아닌 불교만의 민족적 음악으로 계승·발전시키기 위해서는 다음 세가지 문제를 들 수 있다. 첫째, 전통불교음악의 전승과 발전, 둘째, 창작 불교음악활동, 셋째, 불교인과 국악인들의 노력이다.
전통불교음악이란 범패, 화청, 회심곡을 가리킨다. 범패란 범음·성명(聲明)·범성·어산(魚山) 등으로 불리우며 절에서 제(濟)같은 의식의 거행때 불리는 노래의 총칭을 말한다. 우리나라 역사에 나와있는 범패에 관한 최초의 기록은 『삼국유사』제5권에 나오는 월명사기로 760년(경덕왕 19년)의 것이다. 여기에 “자기는 향가만 알고 범패는 모른다.”는 기록이 이미 나오는 것으로 보아 범패가 이미 760년 전부터 있어 왔음을 알 수 있다.
화청과 회심곡은 짓소리나 범패가 한문 또는 범어를 사설로 쓰고 있는 반면 쉬운 우리말로 되어 있다. 화청과 회심곡은 불교의 포교를 목적으로 하고 있기 때문에 대중이 잘 이해할 수 있는 내용과 음악으로 짜여져 있다. 회심곡은 경기도 창부타령과 같은 경기민요풍으로 되어 있고 화청은 지방에 따라 그 지방의 민요의 특징을 도입했기 때문에 지역마다 조금씩 다르다.
두 번째로 창작불교음악 활동은 관현악곡, 실내악곡, 찬불가(합창을 포함한 노래) 등 불교음악에 관련된 창작활동을 말한다. 필자는 이중 가장 많은 부분을 차지하는 찬불가만을 말하고자 한다. 1950년대 가까스로 조금 열린 불교음악의 문으로 서양음악의 선율이 비집고 들어왔다면, 이제는 불교음악의 문을 더욱 활짝 열고 원래에 존재해야할 음악으로 제 자리를 찾을 때이다. 이러한 노력은 몇몇 작곡자나 연주자에 의해 행해지고 있다. 그 대표적인 예가 박범훈과 김영동이다. 박범훈은 국악교성곡 ‘붓다’를 발표하였고 김영동은 불교명상음악 ‘선Ⅰ·Ⅱ’를 발표하였다.
셋째로 불교인과 국악인들의 관심과 노력이다. 무엇보다 불교와 가장 가까운 사람은 스님과 신자들이다. 요즘은 사찰마다 합창단을 만들어 불교의 교리를 노래로서 찬양하며 포교하고 있다. 어쩌면 이러한 활동은 종교와 음악이 분리될 수 없는 이유이기 때문일 수도 있다. 어찌되었든 매우 고무적인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이러한 활동으로만 그쳐서는 안된다. 깊은 역사와 충분한 자료로서 면밀히 분석하여 이 시대에 서로 공감할 수 있는 불교음악을 만들고 발전시켜야 한다. 전통불교음악의 깊은 뿌리를 두고 새로운 불교음악을 창출해 나아갈 때 비로소 불교음악의 발전과 나아가 국악의 발전은 한 걸음 더 나아갈 수 있을 것이다.
시대에 공감하는 불교음악에의 모색
“불교와 국악관현악과의 만남”이라는 제목의 팜플렛을 보고 무척 기대를 하였다. 더욱이 불교 연합합창단들이라는 말에 불교계에서 꽤 큰 행사임을 어림잡고 더욱 그러하였다. 불교의 음악을 둘을 수 있으리라는 기대 때문이었다. 필자는 특별할 불교신자도 아니고 기독교 신자도 아니다. 다만 국악을 아끼는 사람 중 하나로서 그 자리에 참석하였고 이내 아쉬움이 남아 몇자를 적었다. 국악과 가장 가깝고 어우러지는 종교가 불교라면, 불교음악은 이제 조금씩 제자리를 찾아야 할 것이다. 전통불교음악을 바탕으로 이 시대에 서로 공감할 수 있는 새로운 불교음악을 창출해 나간다면 머지 않아 종교를 떠난 우리 민족음악도 이 시대에 제자리를 찾을 수 있는 기회가 될 것이다.
민속문화의 생명력을 위한 출발
「장승 사진전」
글/이상훈 진안제일고등학교 교사
하나, 장승과의 만남
민속 공부를 한답시고 이 마을 저 마을 다니면서 동네 할아버지들과 막걸리와 함께 마을의 지킴이들 뿐만 아니라 세상사 이야기를 듣기 시작하던 때에 장승을 만났다. 그때가 벌서 십여 년 전의 일이 되어 버렸다. 그때의 벅찬 가슴과 또 다른 장승 만남을 위한 설렘은 한참 계속 되었다.
천차만별 천태만상의 우리네의 모습을 만날 수 있었다. 위엄을 갖춘 듯 하면서도 자상한 모습, 험상궂은 듯 하면서도 포근하고 익살스런 모습, 할아버지 할머니에서 천진난만한 어린아이 모습까지 때론 우리 만화 속에서나 볼 수 있는 호랑이 모습을 한 친근한 모습도 볼 수 있고, 너무 박제화 되어 식상하기도 하지만 돌하루방을 한 장승들.
이렇게 장승의 만남에서 시작된 민속 공부는 장승 자체로만 의미가 있지 않다는 것을 어느 사이엔가 깨닫게 되었다.
둘, 장승 노래
“낙태약 된다고 저 장승코 어제밤 비온 뒤에 또 긁어 갔소. 오목 오목 들어간 고무신 자국. 키작은 여자가 발 버팀 쳤소 우뚝하던 그 코가 없어지고도 그 코가 한 치나 패어 들었네 캄캄한 밤 중 타서 찬 칼을 품고 저 장승코 베러 들적에 약한 맘 얼마나 발발 떨었노. 아니다. 대담하지 그 처녀아이”
‘흥원 아리랑’이란 부제가 붙어 있는 ‘장승코’인데, 1931년 박금이란 사람이 발표한 것이다.
여기에서 우리는 장승에 대한 인간의 믿음을 엿볼 수 있다. 그리고 장승의 의미가 인간과 밀접한 관련을 맺을 때 단순한 나무나 돌 자체로 서 있는 문제로서가 아니라 진정한 의미가 있음을 찾을 수 있는 단서를 제공한다. 그러나 여기에 머물러서는 안된다.
“모셔 가세 모셔 가세 모든 악귀 물리치실 추악대를 모셔 가세/모셔 가세 모셔 가세 천하대장군 모셔 가세 우리 마을 지켜주실 천하대장군을 모셔 가세/모셔 가세 모셔 가세 지하대장군 모셔 가세 우리 마을 지켜 주실 지하대장군을 모셔 가세
위 노래는 충북 옥천군 동이면 청마리 마티마을에서 장승과 솟대(짐대)를 깎을 나무를 운반하면서 불렀다. 장승과 솟대와 같은 신앙 대상물은 개인이 아닌 우리네 모듬살이 공동체 의식과 밀접한 관련을 맺으며 그 생명을 이어나간다. 그 생명력이 다시 우리 삶에도 생명력을 불어 넣어 주기도 한다. 그 때 진정한 의미를 지닌다. 그러면 어느새 우리는 장승과 하나가 된다. 장승과 우리는 함께 살아왔던 것이다.
“‘장승, 우리들의 순수한 모습, 화났을 때 매서운 눈길로 즐거울 땐 귀밑까지 찢어지는 웃는 입으로 슬플 땐 처량한 모습으로 향토와 함께 한민족 한(恨)을 무마시켜 준 장승”
셋 다시 만난 장승
장승을 처음 만난 이후10년을 넘겼어도 다 보지 못한 전라, 충청도 나무, 들장승이 모두 모였다. 짐대도 보이고, 남근석도 보인다. 장승들도 정겨운 양 하나같이 활기차다. 그렇지 친구들과 함께 어우러지는데 신명나지 않으랴. 그렇게 기쁘지만은 앉은 홀로된 장승도 있지만 이런 장승 축제를 전북대 사학과에서 열어놓았다.
장승 전시실에 들어서면서 입구에 자리한 남근석 조형물은 인상적이기도 하거니와 전시회에 큰 몫을 하기에 충분했을 것이라 생각을 해본다. 그리고 전라도, 충청도의 특징적인 돌장승과 나무 장승을 이해할 수 있도록 배려하는 듯했다. 특히 장승자체만 사진에 담았다면 조형적인 감상에 그칠 터인데 충청도 지역 장승제를 사진에 담아 장승을 생생한 마을 공동체 신앙물로서 의미를 놓치지 않도록 했다. 필자가 10년을 넘게 다녔어도 보지 못한 장승을 그리 길지 않은 시간 한자리에 모은 열정과 정성, 성실함은 찬사받기에 충분했다. 장승 축제를 이끌었던 돌장승 부부 같은 두 녀석에 이끌리어 새내기들에게
“참으로 힘든 작업을 하셨습니다. 저도 10여 년 전부터 장승을 만나기 시작했거든요. 앞으로 이런 전통문화의 올바른 자리매김과 이해를 위해서 이런 작업을 연속성 있게 추진되었으면 합니다. 가령 짐대(솟대), 성신앙, 마을굿 등과 관련된 것들 말입니다.”
이제 출발이라고 생각한다. 민속문화에 생명력을 불어넣어 주기 위해서라도 이 작업은 계속되어야 한다. 민속문화가 죽어갈 때 우리 삶도 죽어가기 때문이다.
이상훈 / 64년생 전북대학교 사회교육과에서 역사를 전공했고 대학 졸업후에는 민속에 관심을 갖고 마을 곳곳을 돌아다니면서 전교조 활동에도 열성을 냈다. 문화저널 편집위원으로 활동했었고 지금은 진안제일고 교사로 재직하고 있다.
우리가 진정으로 보듬어 잃지 않아야 할 자산
제5회 전라도의 춤 전라도의 가락
글/류장영 전북도립국악원 수석연구원
전라도가 우리 나라 민속 예술의 가장 큰 진원지이자 성장의 중심이 되었다는 사실을 알만한 사람은 다 안다. 드넓은 평야와 기름진 땅을 젖줄 삼아 형성된 전라도의 민속 예술은 한마디로 우수하고 탁월하다. 전문적인 예술 영역은 차지하고라도, 전라도 땅 어느 구석 어느 구비라고 걸쭉한 육자배기 한 대목, 푸짐한 풍 물 가락, 하다못해, 제 흥에 겨운 보릿대 춤 한 자락 못 듣고, 못 볼 곳이 있겠는가.
그러한 전라도 땅의 춤과 가락을 찾는 여정(旅程)을 5년째 쉬지 않고 있는 문화저널의 「전라도의 춤, 전라도의 가락」공연이 지니는 의미는 참으로 각별하다. 특히 이미 성가가 높아 익히 잘 알려진 대상보다 우리가 진정으로 보듬고, 함께 부추기며, 잃지 않아야 할 대상에 초점을 맞춰 꾸미는 이 무대는 지역 문화의 발굴과 계승이라는 측면에서도 이미 충분한 공감과 격려를 받고 있다.
이날 공연의 첫 자리는 도립국악원 교수진의 ‘산조 합주’로 꾸며졌다. 김유앵(장고), 전태준(대금), 강정렬(아쟁), 김계선(가야금), 거문고(한정순)으로 구성된 산조 합주는 이들이 모두 도립국악원의 쟁쟁한 교수들이라는 점에서 우선 공연의 질을 보장하기에 충분해 보였다. 거문고의 묵직한 성음, 폐부를 깊숙이 파고드는 대금의 성음, 아기자기하고 낭랑한 가야금의 성음, 그리고 구곡간장을 녹이는 듯한 아쟁의 성음이 각각 독특한 음향력 표현력을 충분히 드러내 보였다. 여기에 마치 능숙한 선장처럼 선율 악기를 옥죄었다가 슬며시 늦춰 마음대로 활개치도록 부추겼던 장고 가락과 그 농익은 성음은 선율 악기의 탄탄한 받힘이 되어 산조 합주 감상의 또 다른 묘미를 선사했다.
이미 1973년에 중요무형문화재 진도 들노래 기능보유자로 지정받은 조공례(72)씨의 공연은 시작 전부터 잔뜩 기대에 부풀어 있는 청중들에게 응분의 모상을 하고도 남음이 있었다. 백제 때부터 그 이름에 이미 보배 ‘진’(珍) 자를 달고 있었던 진도(珍島)는 왕조시대의 가장 유명했던 유배지 중의 하나이자 고려 때는 몽고에 항쟁한 삼별초(三別抄)의 근거지가 되었다.선비들의 유배 문화가 꽃피고 아울러 민속 예술 최후의 보루가 되었던 진도는 오늘날 민속 예술의 최고(最高)의 보고(寶庫)로 평가받는다. 반도(半島)인 우리나라에서 대륙과 가장 멀리 떨어진 진도는 우리나라 고유 문화의 디옥시리보핵산(DNA)을 가장 많이 간직한 땅인 것이다. 조공례가 그의 수양 딸이자 진도 들노래 이수자인 박종단(54)와 함께 ‘어디를 갔다가 때를 찾아서 다시 오는’ 느진 상사소리로부터 자진 상사소리, 강강술래, 방애타령, 육자배기에 이르기까지 절절히 풀어 제친 그 소리 속은 참으로 ‘먼디 사람 듣기 좋고 가찬 사람 보기 좋은’ 것이었다. 특히 조공례가 이면(裏面)을 그리노라 ‘왕개골을 찾을라고 양팔을 뜩뜩 걷는가 하면, 흥에 겨워 무대를 지근지근 밟으며 어깨춤을 아끼지 않을 때는 객석에서 한숨과도 같은 탄성이 절로 났다. 이 날 조공례의 소리며 몸짓은 그렇게, 우리 나라 땅끝 진도에서 바람처럼 거슬러 올라와 전라 감영이 있던 이곳 전주에다가 그동안 역사에 묻혔던 이 땅의 설움과 보배로운 문화 유산, 그리고 전라도의 한까지도 잔뜩 한판 시명으로 풀어놓고, 긴 여운을 남긴 채 되돌아갔다.
금파 김조균(57)은 자타가 공인하는 우리 지역 남무(男舞)의 최고봉이다. 특히 이날 공연된 한량무(閑良舞)는 금파가 평소 가장 즐겨추던 것으로, 한량무는 춤꾼 금파의 장점이 가장 잘 드러나고 그의 장기(長技) 또한 가장 많이 응집되어 있는 춤이다. 금파는 남자 춤꾼으로는 비교적 큰 키에 체구도 당당하다. 다라서 한량무가 금파를 만나면 언제나 그 사위의 기품과 당당함을 제대로 풀어내는 것을 볼 수가 있다. 싱그레 웃는 입가의 미소와 가끔씩 거들뜨는 눈매의 시원함도 한량무가 아니면 맛볼 수 없다. 오랜 세원 간단없이 다져진 금파의 한량무는 그 어느것 하나 버릴 것 없이 다 아깝다. 금파가 수상한 많은 상들이 바로 한량무에서 비롯되었음은 결코 우연한 일이 아닌 것이다.
한애순(73)은 원래 심청가에 장하다. 그의 심청가는 박유전→이날치의 정통 서편제의 맥을 이은 박동실로부터 전수 받은 것이다. 박동실은 타고난 음악성과 함께 창작 능력에도 남달랐던 인물이다. 한애순의 심청가를 들어보면 박동실의 음악적 능력이 얼마나 출중했는지 단번에 알아낼 수 있을 정도다. 그러나 이날 공연에서 한애순은 그가 장기로 삼는 정통 서편제의 시청가 대신 박녹주로부터 물려받은 정통 동편제의 흥보가 중 박타는 대목을 주봉신의 북반주에 맞춰 불렀다. 박녹주(1905~1979)는 경북 선산 태생이다. 그의 절창으로 꼽히는 흥보자는 송만갑→김정문→박녹주로 이어진 것이다. 따라서 박녹주의 소리는 극도로 절제되어 어느 한구석 빈틈이 없으며, 대마디 대장단으로 단조로운 듯하지만 한편으로는 엄청난 기백이 담겨 있음을 느낄 수 있다. 한애순이 부른 이날 흥보가는 박녹주의 대꼬챙이와 같은 꿋꿋함은 적었지만 역시 73세의 고령에도 불구하고 꾀목을 쓰지 않고 모든 소리를 통성으로 내질러 장쾌함과 시원함이 객석을 넘쳤다. 통성은 듣기에는 수월하지만 기실 엄청난 공력이 들어간 소리인 것이다.
김매자의 창작무용 ‘춤본Ⅱ’를 무대로 올린 박미진, 박수량, 박현희 세 사람은 모두 우석대에서 무용을 전공한 재기발랄한 젊은 춤꾼들이다. 진도씻김굿 음악을 차용해 만든 이날 공연에서 이들은 모두 시종일관 몸이 중심을 발 디딤새 아래에 놓은 안정된 자세를 취함으로서 객석의 눈길을 편안히 이끌어갔다. 결코 만만치 않았을 연습량이 엿보였고 그들의 숨은 재능을 가늠케 하기에 충분한 자신감도 넘쳤다. 젊은 춤꾼 특유의 유연함과 역동성은 안정감을 바탕으로 더욱 고운 빛을 발했다. 이날 공연은 앞으로 펼쳐질 이들의 활동이 충분히 기대될 만한 것임을 예고해 주었다.
아무래도 이날 공연의 절정은 끝자리, 전라 좌도농악 상쇠 유명철(55)의 공연에 있었다 할 것이다. 유명철은 오랫동안 풍물판에서 모습을 감추고 살아오다. 최근에야 비로소 다시 활동을 시작한 인물이다. 그는 전판이(남원)→이화춘(임실 청웅)→유한준(남원)→강태문(남원)→유명철(남원)로 이어지는 전라 좌도 남원 농악의 정통 계보에 속하는 귀한 존재이다. 유명철은 젊었을 때부터 이름을 날리던 쇠잽이였으나 풍물판에 염증을 느낀 나머지 그 동안 쇠를 놓고 지냈으며, 심지어는 픙물과 관련된 사람의 접촉마저 피해 왔다. 따라서 이날 공연에 그가 모습을 드러낸다는 사실만으로도 이미 마음이 설렐 지경이었다. 특히, 그는 부들상모를 가지고 노는 솜씨 하나만으로도 객석을 압도하고 남음이 있었다. 우도농악 쇠꾼들은 부포를 곧추 세워놓고 기예를 벌이기에 용이한 ‘뻣상모’를 쓴다. 이에 반해 전라 좌도 농악 쇠꾼들은 물체가 부드러운 노끈인 ‘부들상모’를 쓴다. 그의 개꼬리 상모 놀음이나 돛대 세우기 등의 절묘한 기예는 근래 그 어떤 좌도 쇠꾼도 실연하지 못했던 특출한 것이 아닐 수 없었다.
그러나 이번 공연의 큰 성과와 깊은 의미, 그리고 나름대로 다양한 감동을 전해 준 것과는 달리 아쉬운 점 또한 적지 않았다.
먼저, 산조 합주는 연주자 각자가 보여준 능숙한 연주 솜씨와는 달리 진양 첫 장단의 첫 각 부침에서부터 어긋거려 연주 내내 불안함을 떨치지 못했다. 이것은 평소 아무리 익숙한 공연물이라도 무대에 올리려면 충분한 연습이 불가결한 요소라는 평범한 교훈을 일깨워 주기에 충분했다. 우리 나라 성악곡을 감상하는 자리에서 대체 그 사설의 의미마저 알아듣기에 미흡한 기계 증폭 장치의 음량 조작은 누가 책임지는 문제인가. 이러한 문제는 사전 시험과 점검으로 얼마든지 극복될 수 있는 것으로, 조공례의 소리가 충분히 전달되지 못한 것은 큰 유감이 아닐 수 없었다.
조명이 공연의 느낌에 작용하는 영향은 실로 대단하다. 그렇지만 조명은 공연의 내용에 적합하게 운용될 때만 비로소 제 역할을 다 한다고 할 것이다. 금파 한량무에서의 어둡고 칙칙한 조명은 오히려 그 춤의 기개나 당당함을 해쳤을 뿐이다.
전라북도는 전체적으로 동편제가 강하다. 따라서 정통 서편제의 맥을 가장 잘 잇고 있는 한애순을 어렵사리 초청한 이 자리에서는 동편제 흥보가 대신 서편제 심청가를 듣는 것이 제격이었을 것이다. 박미진, 박수량, 박현희의 창작 무용 공연은 그들의 안정된 춤솜씨로 그들의 공연이 이날 무대에 과연 합당한가라는 의문을 어느 정도 상쇄시켰다. 하지만 눈의 즐거움과 달리 풀어질 대로 풀어진 테이프와 섞일 대로 섞여 버린 잡음 일색의 음악으로 귀는 공연 내내 시달려야 했다.
마지막으로 「전라도의 춤, 전라도의 가락」이 기왕의 훌륭한 공연기획 의도를 제대로 살리려면 어렵더라도 이 지역의 새로운 문화 발굴에 좀더 비중을 모아 줄 것을 당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