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7.6 | [특집]
남원 사람의 감성으로 예술세계 구현한 진정한 소리꾼
강도근의 예술세계
글/최동현 군산대교수·판소리연구가
(2004-02-12 11:33:32)
강도근의 예술세계는 동편제 판소리와 뗄레야 뗄 수 없는 연관을 맺고 있다. 동편제 판소리 하면 강도근. 강도근하면 동편제 판소리를 떠올릴 정도로 강도근과 동편제 판소리는 동일한 실체나 다름없었다. 사실 강도근이 동편제 판소리의 전형적인 소리꾼이란 말은 맞다. 그러가 같은 동편제 판소리라고 하여도 그 지시 범위가 넓어서 세세한 부분에서는 많ㅇ은 차이를 보인다. 예컨대 박초월이 동편제 소리꾼이라는 것과 보성소리 춘향가가 동편제 춘향가라는 것, 그리고 박동진의 적벽가가 또 동편제 판소리라고 할 때는 그 각각의 의미가 같을 수 없는 것이다.
지금 우리가 동편제 판소리라고 일컫는 소리는 실제로는 상당히 다른 소리의 집합체이다. 본래는 같거나 거의 비슷했을지 몰라도, 세월이 흐르면서 여러 소리꾼들에게 전승이 되는 동안 많은 변화를 겪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지금에 와서는 동일한 실체라고 하기 어려울 정도로 다른 모습을 보이게 된 것이다.
흔히 동편제 판소리는 송흥록이나 김세종, 정춘풍의 소리양식을 계편한 판소리를 가르킨다. 그러나 김세종이나 정춘풍의 소리는 후에 다른 소리들과의 상호 교섭을 통해 많은 변화를 입었기 때문에, 아무래도 정통 동편제 소리라고 하면 송흥록으로부터 시작하여 송광록, 송우룡을 거쳐 송만갑에 이르는 소리를 치는 것이 보통이다. 송흥록으로부터 시작된 동편제 판소리는 송우룡에 이르러 크게 유성준과 송만갑으로 갈라지게 되고, 송만갑의 소리는 박봉래, 박봉술로 이어진 소리와 김정문, 강도근으로 이어진 소리로 나뉘어진다. 그런데 송만갑, 김정문으로 이어진 소리가 박봉래, 박봉술로 이어진 소리보다 훨씬 동일성이 강하다. 송만갑과 김정문의 소리는 전문가도 구별하기 힘들 정도이다. 강도근은 바로 송만갑과 김정문으로부터 배운 흥보가를 생애 내내 장기로 삼았다. 강도근 또한 김정문이나 송만갑과 구별하기 힘들 정도로 유사한 창법을 구사하였다. 그래서 강도근이 다른 동편제 소리꾼들을 제치고 동편제 소리의 대명사가 되었던 것이다.
동편제 판소리는 ‘목으로 우기는 소리’라고 한다. ‘목으로 우기는 소리’란 좋은 성대의 기량을 자신의 판소리 기량을 중심으로 펼쳐 나가는 소리라는 뜻이다. 그러니까 동편제 판소리를 제대로 부르려면 성대가 좋아야 한다. 송만갑, 김정문, 강도근은 모두 성대가 좋은 사람들이었다. 고음과 저음을 자유자재로 구사할 수 있는 좋은 성대, 이것이 동편제 판소리를 할수 있는 첫 번째 조건인 것이다. 똑같은 동편제 판소리를 이어받았으면서도, 유성준이나 박봉술은 성대의 기량이 송만갑이나 강도근에게 미치지 못했기 때문에, 동편제 소리를 대표하는 사람으로 대우받지 못했다.
목으로 우긴다는 말은 또 전력을 다해놓고 힘찬 소리를 구사한다는 말이다. 동편제의 전형적인 소리꾼이라고 하는 사람들은 모두 통성으로 전력을 다하는 치열한 창법을 구사한다. 통성이란 가성을 쓰지 않고 뱃속에서부터 그대로 힘차게 뽑아올리는 소리를 말한다. 통성으로 전력을 다해 소리를 내지르다 보니 어떨 때는 소리가 갑갑하게 느껴지기도 한다. 김소희같은 사람은 생전에 지나치게 소리를 되게(높고 힘차게)만 하려다가, 발음이 분명하지 않은 경우도 많다고 흠을 잡기도 하였다. 이 말은 사실이다. 송만갑이나 김정문, 강도근은 너무 되게 소리를 하려고 하다가 가사를 분명하게 발음하지 못하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이를 나쁘다고만은 할 수 없다. 전력을 다할 때 나오는 치열함이 있기 때문이다. 현대에 와서 전형적인 동편제 판소리가 별다른 호응을 못받은 이유 중의 하나도 이 치열성 때문이었다. 쉽고, 달콤하고, 부드러운 것을 좋아하는 사람들의 감성에는 아무래도 동편제 소리는 부담스러웠던 것이다.
좋은 성대로 전력을 다해 소리를 하다 보니, 당연히 동편제 소리는 자잘한 기교를 부리지 않게 되었다. 소리를 떨고 꺾어 아기자기하게 엮어 간다든가, 장단의 기교를 부린다든가 정교한 너름새(육체적인 동작)를 곁들인다든가 하는 일을 하지 않는다.그러다 보니 동편제 소리꾼들은 거의 뻣뻣하게 서서 건조하게 소리를 한다. 강도근은 그렇게 소리를 하던 사람이었다. 자연히 동편제 소리에는 투박하고 억센 남성적 힘이 넘쳐 흐른다.
송만갑으로부터 강도근에 이르는 소리의 특징 중에서 빼놓을 수 없는 것이 소위 철성(철성)의 전통이다. 철성이란 쇠같이 단단한 느낌의 소리를 이르는 말이다. 판소리에서는 보다 거칠고 쉰 목소리를 수리성이라고 하는데, 여기에 오랜 수련을 통해 단련된 단단한 맛이 더 붙으면 철성이 된다. 강도근은 현대에 남은 유일한 철성의 소리꾼이었다. 송만갑에 비해 강도근이 부족한게 있다면, 깊고 부드러운 저음과 교묘한 성음의 변화였다. 생전에 강도근은 송만갑 선생의 저음은 자신이 도저히 흉내날 수 없다고 했다. 이는 강도근이 부족한 소리꾼이라기 보다는 송만갑이 너무 훌륭한 소리꾼이었기 때문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강도근이 이러한 동편제 소리를 그대로 지켜올 수 있었던 것은 , 우선 그가 정통 동편 소리의 대가로부터 소리를 이어받았다는 점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 판소리는 전승예술이기 때문에, 어떠한 소리를 이어받았으냐 하는 것이 자신의 예술 세계를 구축하는 첫 번재 관건이 되기 때문이다.
다음으로 들 수 있는 것은 배운 것을 나름대로 고쳐 부르려고 하지 않는 강도근의 고집이다. 강도근은 늘 <나는 자작은 안 한다. 배운 그대로만 한다>고 말하였는데, 이는 그만큼 그가 전통에 충실하려고 한 소리꾼이었음을 뜻하는 것이다. 그는 평소 ‘선생님께 배운 소리는 한자 획도 마음대로 바꾸지 않는다’고 하는 원칙을 목숨보다 중히 지키면서 판소리를 지켜왔다. 강도근이 온갖 유혹에도 불구하고 남원을 떠나지 않고, 남원을 지키며 제자들을 양성할 수 있었던 것도, 동편제 소리의 전통에 대한 자부심과 고집 때문이었을 것이다.
여기에 강도근의 지극한 성실성을 보아야 한다, 강도근이 마지막 동편제 소리의 대가로 남을 수 있었던 근본적인 원천이 되었던 것은, 아무래도 칠십이 훨씬 넘어서까지 쉬는날이면 도시락을 싸들고 지리산 골짜기를 찾아가 연습을 하는 소리에 대한 지극한 열성이었을 것이다. 명창이 되고 문화재가 되어서도 쉼없는 소리에 대한 열정이 없었다면, 그 힘든 동편 소리를 생애의 마지막 순간까지 지켜내지는 못했을 것이었다.
강도근은 또한 남원의 소리꾼이었다. 남원의 소리꾼이라는 말은 여러 가지 의미를 지닌다. 먼저 그는 남원 출신이다. 그리고 남원지방을 중심으로 전승된 소리, 그러니까 동편소리를 이은 사람이다. 도한 강도근은 남원에 살며 남원에서 제자를 양성하던, 그야말로 남원의 터줏대감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몇몇 사실보다 더 중요한 것은 , 그가 남원 사람의 감성으로 자신의 예술 세계를 구축해 왔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이러한 의미에서 강도근은 진정한 의미에서 남원의 소리꾼인 것이다.
강도근이 남원의 소리꾼이라는 것은 그의 남원 사투리에서 가장 두드러진다. 남원 지방의 전형적인 사투리가 강도근의 판소리에는 가득하다. 지나친 사투리의 사용은 때로, 강도근 판소리의 사설에 오자(誤字)가 많다는 오해를 불러일으키기까지 할 정도였다. 이러한 사투리를 통해서 표현되는 것은 남원 부근 민중들의 감성과 정서이다. 그렇다고 해서 강도근의 판소리가 남원이라는 지역에 한정되는 특질을 지니고 있다는 뜻은 아니다. 다 같은 민족예술인 판소리이되, 정권진의 판소리가 남도 사투리의 억센 맛에 독특한 묘미를 담고 있듯이, 강도근의 판소리는 남원 사투리의 독특한 맛으로 인하여 민중적 색채를 강하게 띠고 있다는 말이다.
시골에서 옛 판소리의 전통을 고집스럽게 지키고 있던 강도근인 1980년대 들어서야 인정을 받기 시작했다. 물론 그 이전에도 강도근은 명창으로 이름이 높았었지만, 그것은 한낱 시골 소리꾼의 그것이었다. 적당히 잔꾀를 부려 소리를 꾸미고, 곱고 슬픈 목소리로 청중의 기호에 영합해가던 소리판에서 꾀부리지 않고, 자신의 소리를 고집하며 혼신을 다해 뽑아내는 선생의 우람한 소리가 충격으로 다가갔고, 마침내 인정을 받기 시작한 것이다. 결국 1988년에 강도근은 동편제 판소리 홍보가로 무형문화재 보유자로 지정되었지만, 한평생 그가 목숨보다 소중하게 지켜온 우리 것에 대한 보답으로는 차라리 너무 늦고 작은 것이었다고 하는게 옳으리라.
강도근은 이제 저 세상으로 갔다. 그러나 그가 생전에 남긴 수궁가 한 종류와 흥보가 두 종류의 음반, 그리고 영상을 담은 한 종의 레이저 디스크가 오래오래 우리와 함께 하면서, 그 웅장했던 동편제 소리의 진수를 보여줄 것이다.
지리산 계곡과 섬진강 물줄기를 잇는 소리
강도근의 소리와 인생
글/윤영근 소설가·예총 남원지부장
강도근은 소리꾼이다 그것도 남원의 소리꾼이다. 여기서 구태여 그를 남원의 소리꾼이라고 지역적으로 한계를 지어 얘기를 하는 것은 그의 태생지가 남원이고 소리의 시작부터 끝까지 남원을 텃밭으로 해서 일구어진 동편제를 지켰으며, 해방전 젊어 한때 창극단을 따라 다닐 때를 빼놓고는 남원에서 살아왔다는 그런 의미가 아니다. 그의 소리를 듣고 있으면 남원 사대부의 냄새가 난다. 아침저녁으로 카랑카랑한 기침소리와 함께 자신의 존재를 이웃에 알리려는 고집스럽지만, 줏대도 있고 감히 함부로 범접할 수 없는 위엄도 갖추고 있는 남원 사대부의 냄새가 물씬 풍기는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그의 외모가 그렇다는 것은 아니다. 외모로만 따지자면 그가 스무해 이상을 타고 다녔던 헌 자전거처럼 소박하고 촌스럽고, 방금 못자리를 끝내고 나온 농부처럼 소탈했다. 그러나 그것은 무대 밖에서의 얘기이고, 일단 정장을 하고 무대에 서서 ‘저 제비보소, 보은표 박씨를 입에다 물고 이리저리 나온다. 단상봉황이 죽실을 물고 오동 속에서 넘논 듯, 북해 흑룡이 여의주를 물고 채운간에서 넘논 듯, 집으로 펄펄 날아들어 흥보 앉은 처마 끝에 들어갔다 나갔다, 무엇이라 지지우지 우지주지, 함자표지, 우지매라. 찬찬히 살펴보니 절골 양각이 완연하고 당사실로 감은 다리가 아리동 아리동 뫼야, 박씨를 떼그르르 던져놓고 백운간으로 날아간다. ’ 하고 흥보가 중 ‘제비노정기’라도 한바탕 불러 제낄 때면 약간 쉰듯하면서도 통목으로 내지르는 수리성이 좌중을 꼼짝 못하게 휘어잡았으니, 그때는 이미 촌스러움과 소박함과는 거리가 멀었는데, 소리 중간중간에 관객들을 한번씩 휘둘러 볼 때면 지리산 천황봉같은 고고함이나 오만함이 물씬 배어 나오기도 했던 것이다. 그래서 남원의 소리꾼이고 남원의 사대부 냄새가 난다고 했던 것이다.
강도근은 1917년 남원시 용정동(기왕에 나온 전기에서는 남원시 향교동으로 되어있으나, 이 글을 쓰기 위하여 조사를 해보니용정동 출신이 맞음) 구공다리 깨에서 아버지 강원중과 어머니 이판녀 사이의 구남매 가운데, 넷째로 태어났는데, 어린 시절의 그를 마을 사람들은 도근이라는 이름대신 ‘들돌’이라고 불렀다. 마을 사람이 그렇게 부른 것은 키는 작달막하지만 행동거지며 말투가 야무졌을 뿐만 아니라, 남원 사투리로 상당히 땡갈지게 생겼기 때문이었다. 요즘은 사라지고 없지만, 지금부터 스무해 남짓 전까지만 해도 마을마다에는 회관이나 정자나무 아래 같은 곳에 마을 장정들이 힘자랑을 하는 ‘들돌’이라는 것이 있었고, 그것은 눈으로는 시퍼보였지만 워낙 단단하여 실지로 들어보면 쉽게 들어올려지지 않은 돌이었다. 강도근은 들돌이라는 별명답게 소리도 어려서부터 마을 사람한테는 “얼씨구 잘한다”는 추임새를 받을 만큼 제법 잘했고, 그것이 빌미가 되어 비교적 어린 나이인 열살 남짓 때부터 구례의 박봉래 명창에게 정식으로 소리공부를 시작했다. 그가 어린 나이에 소리공부를 시작하여 소리꾼의길로 들어선 것은 집안의 내력과도 무관하지 않다. 즉 그의 아버지 강원중은 남원 요천수를 가로지른 다리중에서 가장 먼저 놓여진 승사교의 낙성식 때에 모래밭에 줄을 매고 줄타기 묘기를 보이기도 했던 소문난 줄타기꾼이었는데, 소리도 썩 잘했다는 것이다. 지금도 용정동에 가서 나이 많은 노인들한테 물어보면 강원중이 마당에 줄을 매놓고 석근의 동생인 도근에게는 북장단에 맞추어 춘향가며 흥부가며 하는 소리를 가르쳤던 것을 기억하고 있는데 아버지에게서 소리의 맛을 익힌 강도근이 정통 소리를 배우기 위하여 박봉래의 문하로 들어간 것이었다. 박봉래는 구례출신 소리꾼이었는데, 송만갑의 제자였으나, 스승과는 달리 오로지 동편제만 고집하고 자신도 부르고 제자들에게도 가르친 사람이었다. 그러나 박봉래와 강도근의 인연은 길래야 길 수가 없었다. 박봉래가 서른 셋이라는 젊은 나이에요절을 했기 때문이었다.
박봉래에게 소리를 익힌 강도근이 창극단을 따라 다니기 시작한 것은 그의 나이 열네 살 때부터였다. 살아 생전 강도근의 기억에 의하면 그가 열네 살 무렵에 남원의 김억득이라는 사람이 창극단을 조직하였으며, 근방의 명창들이 다 모여들었을 뿐만 아니라, 해금을 잘 부는 장계량이며 가야금을 잘 타는 금지 사람 김옥돌이며 고수로 이름을 날리던 조평욱 같은 사람도 김억득의 창극단에 함께 했다는 것이다. 그렇게 조직된 김억득의 창극단은 구례며 곡성이며 함양이며 거창같은 남원 인근의 고장과 마을을 돌아다니면서 소리도 하고 창극도 공연했다. 어린 나이라서 심부름을 주로 많이 했지만 무대에 올라 춘향가, 흥부가, 적벽가를 부르며 관중들의 박수도 꽤나 많이 받았다고 하니, 강도근의 소리 재질은 그때부터 발휘된 셈이었다. 그러나 강도근은 어린 시절에 창극단을 따라 다녔던 기억이 썩 유쾌하지만은 않은 듯 했다. 그것은 소리꾼 중에는 아편 중독자가 많았고 더럽고 추접스러운 게으른 사람들이 많아서 어린 강도근이 보고 배울 것이 소리를 빼놓고는 없었다는 것이다.
강도근이 김억득의 창극단 생활을 그만 둔 것이 창극단이 해체되어서 그랬는지, 아니면 본격적으로 소리공부를 하고 싶은 열망 때문이었는지는 확실하지 않지만, 그가 진짜 스승다운 스승을 모시고 소리공부를 시작한 것은 열 일곱 살 때 남원 주천면의 주레기라는 곳에 사는 김정문의 문하에 들어가면서 부터였다. 강도근의 말에 의하면 김정문의 집에서 머슴을 살다시피 하면서 소리공부를 했다고 하는데, 김정문의 가르침이 꽤나 까다로왔던 모양이었다. 소리를 가르틸 때에 소리가 삐뚤어지면 담배대로이마를 사정없이 내리치는 것은 물론 피우던 댐배불로 발등이며 손등을 지지기까지 했다는 것이다. 도한 소리를 가르치다가 잠시 쉬는시간에는 꼭 낮잠을 청했는데, 그럴 때면 강도근이 스승의 발을 씻어주고 발바닥을 살살 긁어주어야 잠이 들었다고 했다. 또한 아편을 하는 김정문이 아편에 취해있을 때면 눈가에 눈꼽이 덕지덕지 끼었고, 그 눈꼽을 닦아주는 것도 강도근의 몫이었다. 아무튼 강도근은 꽤나 까다로운 스승 밑에서 2년여 동안에 판소리 다섯 마당을 뗄 수 있었다.
1935년 스승 김정문이 죽자 강도근은 서울 종로구에 있는 조선성악연구회를 찾아가 송만갑, 정정렬, 이동백 등을 만났다. 그때에 송만갑으로부터 김정문 스승에게 미처 다 배우지 못한 흥보가는 물론 춘향가 심청가 적벽가를 배울 수 있었다. 그러나 번잡한 서울은 강도근에게는 있을 곳이 못 되었다. 일년도 못 되어 낙향을 하여 구례로 내려가서 박봉래의 형 박봉채에게서 가르침을 받는 한편 쌍계사에 들어가 독공을 했다. 이때부터 쌍계사는 구례 산동의 수박폭포와 남원 대복사 토굴과 더불어 강도근의 독공장소가 되었다. 더구나 이 쌍계사의 주지스님이 판소리를 좋아하여 강도근이 독공을 들어가면 두 손을 들어 환영을 했고, 강도근은 그런 쌍계사가 좋아서 이후 이십여년 동안을 들락거리며 소리공부를 했다. 어느땐가는 주지 없는 절에서 머리를 깎고 승복을 입은 채 주인 노릇을 하면서 소리공부를 했는데, 화개근방에 있는 섬거주조장 주인인 구 처사라는 사람이 열흘에 한 번식 돼지 다리를 하나씩 가져와 먹을 것이 없어 마뿌리를 갈아 끼니를 때우던 강도근에게 몸보신을 시켜주기도 하였다.
나이 서른 살 안쪽의 어느 해, 쌍계사에서 독공을 마친 강도근이 학동 악양에 살고 있는 유성준을 찾아가 수궁가를 배운 적이 있었다. 그 당신 유성준의문하에는 임방울도 함께 있었는데, 제자를 하나만 두고 싶어하던 유성준이 임방울만 예뻐하고 자기는 마음에 미워한 통에 마음고생이 많았다. 그러나 그걸 견뎌 내고 김정문에게 미처 다 배우지 못한 수궁가를 마저 배우고는 두 달만에 유성준의 문하를 떠나왔다.
이후 강도근은 호남창극단이며 동일 창극단이며 조선창극단 같은 창극단을 김소희, 한갑득, 박봉술, 배금향 등과 함께 다니며, ‘춘몽전’같은 창극에서는 농사꾼 역할도 하고, 벙거지에 꿩털 꽃고 칼을 들고 설치는 의병노릇도 하다가, 기회가 닿으면 흥부가며 수궁가 같은 전통 판소리도 부르면서 암울한 일제시대를 견디어 냈다.
강도근이 해방을 맞은 것은 김소희, 한갑득 등과 함께 했던 호남창극단의 통영 공연에서였다. 목메이게도 그렸던 해방이 되고나자 단원들의 마음이 들떠서 공연이 제대로 될 수가 없었다. 경상도 진영에서 창극단을 해체하고 단원들은 뿔뿔이 흩어졌는데, 강도근이 미군을 본 것도 이때였고, 미군의 차를 얻어타고 남원까지 올 수가 있었다. 남원으로 온 강도근은 국악원에 농악대를 조직하여 마을마다 공연을 다니기도 했고, 제자들을 모아 소리를 가르치는데 심혈을 기울였다. 또한 6.25때는 목포, 전주, 이리, 여수, 순천 등을 다니며 소리를 가르쳤는데, 한때는 광한루 옆에 있는 ‘칠선목’이라는 요정에서 기생들에게 소리를 가르치기도 했다. 강도근은 자신이 꽤나 까다로운 스승 밑에서 까다롭게 소리를 배운 것과는 달리 제자들에게는 비교적 너그러웠다고 한다. 그는 제자들을 모아놓고 단체로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하나식 마주 앉아서 일대일로 가르치는 구전심수(구전심수)의 방법을 주로 사용하였는데, 어쩌다 제자의 소리가 삐뚤어지면 ‘에라이, 그것도 소리라고 허고 자빠졌냐? 가서 똥물이나 한 바가지 퍼묵어라’ 하는 말이 꾸중의 전부였다는 것이다. 이렇게 해서 길러 낸 제자가 안숙선을 비롯하여 동편제의 맥을 이어가고 있는 이난초, 전인삼 등이었다. 이제 그의 육신은 비록 갔지만 소리는 남아서 지리산의 수많은 봉우리며 골짜기를 울리고, 길고 긴 섬진강 줄기처럼 영원히 그 맥을 이어갈 것이다. 그만큼 강도근은 큰 소리꾼이었다.
윤영근 / 소설 ‘동편제’로 널리 알려진 판소리 연구가이자 소설가이다. 남원에서 윤한의원을 운영하는 한의사이기도 하며 남원의 민속과 예술에 대한 관심과 애정으로 평생을 살아왔다. 지금은 예총 남원지부장으로 활동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