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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6.9 | [문화저널]
<축제>와 <꽃잎> ‘그 드물다는 굳고 정한 갈매나무’와 같은 영화
글/ 이정하 영화평론가 (2004-02-12 12:31:41)
여름 내내 시인 백석과 연애를 하다시피 했다. 그 중에서도 남신의주 유동 박시봉방(南信義州 柳洞 朴時逢方)을 읽고 또 읽었다. 해방 직후 만주에서 돌아와 신의주에서 썼다는 시이다. 마지막 부분은 이렇다. 나는 이런 저녁이면 화로를 더욱 다가끼며, 무류을 꿇어 보며, 어늬 먼 산 뒷옆에 바우섶에 따로 외로이 서서. 어두어 오는데 하이야니 눈을 맞을, 그 마른 잎새에는, 쌀랑쌀랑 소리도 나며 눈을 맞을, 그 드물다는 굳고 정한 갈매나무라는 나무를 생각하는 것이었다. 영화평론가라니 흔히 어떤 영화를 좋아하느냐, 어떤 영화를 보아야 하느냐고 묻는 이가 많으나 ‘그 드물다는 굳고 정한 갈매나무’같은 영화는 선뜻 떠오르지 않는다. 외로이 박시봉(朴時逢)의 방에 앉았을 때 떠오르는 것은 결코 영화는 아니다. 오히려 내게 ‘그 드물다는 굳고 정한 갈매나무’는 황현의 「매천야록」며, 그 중의 ‘절명시’며, 김수영이며, 김지하며, 초기 송기원의 시 등이다. 이것은 나도 모르는 어느 평론가의 절필 운운하고는 관계없는 일이다. 얼마 전에 극장엘 갔다가 <지독한 사랑>을 보면서 지독한 마음이 들어 출입문을 너댓번 들락날락 하다가 도저히 그대로는 집으로 갈 수 없을 것 같아 미루어 오던 <축제>를 보았다. 보고 또 보았다. 인내심이 없어 연속극을 보지 못하는 나로서는 참 이례적인 일이었다. 풍부한 하위 풀룻과 관객에게 내재된 텍스트를 절묘하게 이어 담박에 한국인의 심층에가 닿는 임권택의 솜씨에 혀를 내둘렀다. 그는 여전히 가장 젊은 감독이고 그의 <축제>는 가장 낯선 영화였던 것이다. 아마 <축제>는 쌍차쌍조(雙遮雙照 )의 중도불교 사상과 맥락을 같이하는 영화가 아닌가 여겨진다. 혹은 지독한 영화를 본 다음이어서인가. <꽃잎>은 정당하게 평가되지 못했다. 부당하고 편견에 찬 평가르 fqkedkT다. 그러나 심란하기 이를 데 없는 영화 <꽃잎>은 탁월한 문제작이다. 나는 이 영화를 통해서 무더위에 노랗게 지친 저 1980년이 여름으로 되돌아갈 수 있었다. 그곳은 물론 나의 , 우리의 ‘박시봉 (朴時逢)방’이었다. <꽃잎은 시점, 서사구조, 표현방법이 혼란스러이 충돌하며 스크린에 끊임없이 파열구를 내는 영화이다. 적어도 한국영화에서 이런 예는 찾을 수 없다. 장선우가 그 파열구를 통해서 드러내는 것은 절망의 밑바닥이다. 삶의 역사와 인간에 대한 궁극적인 긍정의 몸부림이 시작되는 바로 그 지점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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