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킵 네비게이션


분야별보기

트위터

페이스북

1996.9 | [특집]
유성기로 듣던 불멸의 명가수 일제시대 대중가요의 역사적 의미
문화저널(2004-02-12 12:32:19)
광복 51주년을 기념하여 일제시대 대중가요를 모은 자료집과 음반이 나왔다. 신나라음반사가 기획하고 군산대 판소리연구소(소장 최동현 교수)가 작업한 <유성기로 듣던 불멸의 명가수>는 모두 23장의 음반에 440여 곡이 실려있다. 당초 지난해 공복 50주년을 기념해 출반하려 했으나 방대한 작업 규모에 늦어진 것이다. 주된 자료로 쓰인 것은 신나라음반사가 수집해온 SP음반들로 해방 이전에 제작된 것들이다. 이 음반에 실린 가요들 가운데는 20%~30%만이 가사집을 통해 전해져왔고 나머지는 채록되어전해지거나 그러지 못했던 것들이다. 최동현 김만수 공종구 교수가 주석과 함께 전체 곡의 가사를 정리한 자료집만 해도 558쪽에 달한다. 자료집은 일제시대 대중강의 역사적 의미, 유성기 음반회사에 관하여, 가사집, 색인 등으로 구성되어있다. 이 가운데 「일제시대 대중가요의 역사적 의미」(군산대 김만수 교수)를 필자의 양해를 얻어 요약해 실었다. 망국민으로 더부살이일 수밖에 없던 일제시대에 대중가요는 우리 민족의 정서와 감흥을 어떤 모양으로 노래하고 있는지, 레게와 힙합 등으로 대표되는 신세대 가요와 대별해 소위 ‘뽕짝’이라고 불리고 있는 노래들 속에서 ‘올바른 우리노래 알기’는 무엇인지를 밝혀주는 귀중한 자료가 될 것이다. <편집자 주> 1. 자고 나도 사막의 길, 유랑(流浪)의 노래 자고 나도 사막의 길 꿈 속에도 사막의 길 사막은 영원의 길 고달픈 나그네 길 낙타등에 꿈을 싣고 사막을 걸어가면 황혼의 지평선에 석양도 애달파라 (김능인 작사, 「사막의 한」) 1935년 4월 신보에는 고복수 노래의 히트작 「사막의 한」이 담겨 있다. 꿈 속에서라도 사막에서 벗어나려는 의지는 왜 없었던가. 오아시스라도 찾아가려는 희망의 메시지가 왜 이 노래 속에는 없는가. 일제 시기의 가요에 대해 가지고 있는 부정적인 생각들 예컨대 당시의 모든 가요는 일본 가요 특히 엔까의 지배적인 영향력 하에 있었다고 본다던가, 아니면 당시의 대중가요는 지나치게 병적인 감상성은 오히려 일제의 지배를 합리화시켜준 암적인 존재였다는 생각들은 이제 수정되어야 할 시점에 와 있다. 당시의 가요가 담고 있는 허무주의적인 내용은 우리의 전통적인 시가(詩歌)가 담지하고 있는 거대한 뿌리, 즉 떠나간 님에 대한 한(恨), 그 내면적인 한의 정서를 밖으로 뿜어 내는 에너지의 일종이었으며, 이 또한 창조적인 에너지일 수 있는 것이다. 한편 일제 시대는 유랑의 시절이었다. 삼남(三南)지방의 흉년과 일제의 경제적 착취, 그로 인한 남부여대(男負女戴)의 행렬들. 혹은 일제에 대한 저항으로 망명이나 독립투쟁의 길을 떠났던 전사(戰士)들. 이들은 모두 유랑민들이었다. 이들은 목포에서 만포진까지, 부산에서 신의주까지 유랑의 길을 떠났고, 만주로 가는 길목이나 현해탄을 건너가느느 부두에서는 어김없이 눈을 돌려 고향산천을 돌아보았다. 압록강 하구의 국경지대인 통군정에서, 두만강 하구의 국경지대인 도문에서 이들은 이별의 노래를 남겼다. 2. 두고온 고향산천과 부모님에 대한 그리움 망국민의 설움은 백제의 패망이라는 역사적 사실에 기대어 표현되는 예가 흔했다. 「낙화유수」,「낙화삼천」,「꿈꾸는 백마강」등 일련의 ‘낙화암’과 ‘백마강’시리즈는 이렇게 탄생된다. 이러한 망국의 정서는「마의 태자」같은 곡에서도 확인된다. 시조 부흥웅ㄴ동을 편 시조 시인 이은상이 작사하고, 연대 음대 교수를 역임했던 안기영이 작곡하고 스스로 노래한 「마의 태자」는 망국의 애절한 심사를 격조높게 표현한 곡으로 알려져 있다. 그 나라 망하니 베옷을 입으시고 그 영화 (榮華)바리니 풀뿌리 맛보셨네 애 다 우리 태자 그 마음 뉘 알꼬 풍악산 험한 곳에 한 품은 그 자취 지나는 길손마다 눈물을 지우네 (이은상 작사,「마의 태자」) 이처럼 백제와 신라의 패망을 다룬 노래는 망국의 처지에 놓인 당대의 현실에 대한 민족적 한의 표현이었다. 이제는 사라진 조국. 이들은 이제 고향산천과 부모님을 두고 멀리 떠나야 했던 것이니,「아리랑」을 부르며 고향을 떠나는 그들은 부모에게는 불효자였고, 또 남에게는 야속한 연인들이었다. 유랑의 역사는 가족과의 이별의 역사이기도 했던 것이다. 3. 사랑과 한의 정서 끝없는 유랑의 시절 속에서 겪는 고통은 사랑의 기쁨마저도 퇴색시켜 버렸는지 모른다. 일제 시기의 사랑노래는 대부분 떠나간 님, 기다리는 여인, 버림받은 자들의 고통으로 점철되어 있다. 사랑 노래하면 으레껏 항구와 포구, 철도와 고갯길을 등장시켜야 제격이었던 것이다. 이별의 눈물은 류 기생들의 전유물이었다. “사랑에 속고 돈에 울고”운명에 울어야 했던 화류계의 기생들은 이별의 눈물을 있는 그대로 드러낸 대중가요 속에서 자신의 처지를 위앙ㄴ받을 수 있지 않았을까. 동양극장에서 상연되어 한국 연극사상 최고의 관객을 모은 것으로 알려진 연극 <사랑에 속고 돈에 울고>속의 가련한 여주인공 홍도의 일생이야말로 자신들의 일생이었던 것이다. 이서구 작사 「사랑에 속고 돈에 울고에 삽입된 노래가 히트 될 수 있었던 요인 중의 하나는 가사의 탁월함이 아니었나 싶다. “세상은 구름이오 홍도는 달빛”이라는 비유를 통해 우리는 구름 낀 탁한 세상, 그 구름에 가리워져 은은한 얼굴을 드러내지 못한 달빛의 비극을 접할 수 있다. “이 얼마나 얄 은 운명의 장난이란 말이냐”식의 울분도 그러거니와, 구름의 먹빛 이미지야말로 임금의 총애를 가리는 간신배의 무리를 상징하는 ‘구비공식구(oral formula)'였다. 송강 정철의 「속미인곡」을 보라. 구름을 원망하며 멀리서 남에게 보내는 애절한 사라의 정서야말로 전통적인 한국의 여인상이었던 것이다. 백제 때의 가요 「정읍사」이후 우리의 여인네들은 달에 기탁하여 자신의 사랑과 그리움을 표현하는 공식에 익숙했던 것이다. 4. 새로운 세태와 민중의 애완 무성영화의 변사로 더 잘 알려진 김용환은 코믹한 노래로 당대의 삶의 애환을 잘 보여주고 있다. 양금(洋琴)이라고 불렀던 바이올린을 들고 창가를 연주하는 음악가, 한국판 「춘희」를 유창하게 해설하는 변사, 엿을 팔아 고학하는 학생의 엿파는 소리 등이 그의 노래 속에 흥겨운 멜로디로 그려지고 있는 바, 그는 이 노래의 제목을 「낙화유수 호텔」이라 붙였다. 지금의 본격적인 연극과는 다르게, 당시의 연극은 비극하나, 코미디 하나, 약간의 노래와 연주가 섞인 일종의 ‘버리이어티 쇼’였다. 비극은 너무도 심각하였고, 코미디는 재미는 있었으나 보고 나면 본전 생각이 절로 날만큼 별다른 주제가 없었다고 관객은 느끼고 있었으니, 이를 절충하기 위해 이러한 편법이 생겨났을 것이다. 지방이나 만주 일대까지 순회하며 공연했던 유랑극단의 애환도 많은 아류작을 낳았다. 한편 막간가수들의 노래도 하나의 장르로 형서오디었다. 말 그대로 연극의 막(幕)사이에 등장하는 가수들이다. 이애리수, 강석연, 이경설, 김선초 복혜숙은 1920년대의 「토월회」시절부터 연극에 참여한 배우들이자 이후 막간가수로 자리잡은 인물들이다. 세태를 그린 노래 가운데 「눈깔 먼 노다지」는 일제말에 불어닥친 금광(金鑛)열풍을 풍자하고 있다. 이 시대에도 세상은 요지경 속에 있었다. 카페와 술집이늘고, 마약 장사와 여자 장사가 늘고, 졸부으 자본 논리가 세상을 지배하게 된 그 사회는 이미 정상적인 단계를 넘어선 요지경 속의 세상이었다. 김정구가 불렀던 「세상은 요지경」은 요즈음 신신애가 다시 불러 히트한 바 있다. 예나 지금이나 요지경 속의 세상은 변하지 않았던 것이다. 한편 베를린 올림픽에서 우승한 마라톤 선수 손기정과 3등을 한 남승룡의 쾌거를 담은 음반도 제작되었다. 「마라톤 재패가」외에도 그때의 환희를 재생한 다큐멘타리 형식의 음반도 제작된 것이다. 물론 여기에도 친일의 논리가 약간 끼어 있어 눈살을 찌푸리게 하지만, 어쨌든 대한 남아의 승리는 침체에 빠진 조선 민중 전체에게는 하나의 장관이었을 것이다. 5. 일제하의 검열과 저항 일제 하의 검열은 문화 전반에 걸쳐 광범위하게 가해지고 있었다. 복자(覆字)투성이의 문학잡지, 임석 경관이 참석해야 공연을 올릴 수 있었던 연극, 휴간과 정간을 되풀이하던 신문, 간간히 터진 불온 독서회 사건들은 모두 일제의 검열에서 비롯된 일들이다. 이난영을 일약 스타로 만들어준 노래 「목표의 눈물」에도 검열의 그림자가 깔려 있었다. 이 노래에는 임진왜란 때 왜구를 맞아 싸운 이순신 장군의 이로하가 담겨 있다. 목포의 유달산은 노적봉이라는 별명을 가지고 있다. 군사가 많은 것처럼 위장하기 위해 쌓아두었던 노적(露積)을 멀리서 보고 이를 두려워한 왜구의 이야기를 담은 노적봉은 일본에 대한 저항의 상징이기도 한 것이다. 위의 노래 제 2절의 “삼백연(三百淵)원안풍(願安風)은”은 실제 노래에서는 “삼백 년 원한(怨恨)품은”으로 부른다. 실제로 이 노래에서는 “삼백 년 원한 품은”으로 바뀌어야 전후의 맥락이 통한다. 「목포의 눈물」은 발매 직후 검열에 걸려 발매 금지된 경우에 해당된다. 우리는 이와 비슷한 검열의 사례를 여러 차례확인하게 된다. 심지어는 노래 속에 봄이 등장하면 무엇을 기다리는 봄인가 해명해야 했고, 한(恨)이 나오면 왜 한이 생겼는가를 일일이 해명해야 하는 단계까지 이른 예들은 여러 원로 가수와 작곡가들의 증언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7. 千年의 시간을 뛰어넘어 우리는 일제 시대의 대중 가요를 들으면서 천년 전의 역사인 고려 시대의 속요를 떠올리게 된다. 어쩌면 그리도 변하지 아니하였는지! 고려 속요「서경별곡」,「가시리」에서 우리는 천년 후의 장세정, 이은파, 이화자이 여류 비극을 생생하게 경험하게 된다. 떠난 님을 두고 끈이 덜어졌지만 믿음이 끊어진 것은 아니라는 것, 떠나는 님을 붙잡지 못하고 보내는 님의 모습이 고려 속요 속에 표현되어 있는 것이니, 이는 1930년대의 모든 사라오가 이별의 노래와 상통하는 것이다. 이제는 이 나그네 실어 건너고 오늘은 설운 소식 전하여 오는 두만강 건너는 늙은 뱃사공 힘없이 푸른 물에 노를 접니다 (이원형 작사, 「두만강 뱃사공」) 님에 대한 상실감,, 보상없는 기다림, 한의 정서 등등이 너무도 닮지 않았는가. 우리는 여기에서 천년의 세월을 버텨온 우리 고유의 마음의 한 원형을 보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예는 「청산별곡」에서도 확인된다. 파란 색이 산인 청산(靑山)은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나 이상향(理想鄕)으로서의 청산은 우리들의 가슴 속에 천년전부터 자리잡고 있었다. 왜 우리 민중들은 청산을 만들어냈을까. ‘골망태 둘러 메고 소를 모는 저 목동’으로 시작하는 조명암 작곡의 「꼴망태 목동(牧童)」을 보자. 일제의 궁핍기에 ‘꼴망태 목동’의 목가적인 정취, ‘초가삼간’의 정다움을 노래하는 것은 시대적 고민을 외면한 것으로 보일 수도 있다. 그러나 이들 노래는 역사와 시대를 외면했다는 이유만으로 비난받아서는 안될, 우리 민족의 원형적인 유토피아의 심상을 담고 있는 것으로 볼 수도 있는 것이다. 가난하되 유유자적하여 스스로의 분수에 만족하는 삶. 이 경지가 비단 조선조 사대부들의 이상만은 아니었을 것이다. 초가삼간의 가난한 살림살이, 꼴망태 목동의 한가롭고 평화로운 삶은 비록 그것이 가난이었을지라도 아름다울 수 있었던 것이다. 8. 잊혀진 작사가를 찾아서 우리는 지금껏 일제 시대의 가요, 그리고 그 이후의 노래를 들으면서 작사가들의 행적에는 거의 줌고하지 않았다. 나름의 이유가 있었을 것이다. 첫째 노래는 어디까지나 노래 자체가 우선이지, 노랫말 자체의 언어적 가치가 우선시될 수는 없다는 본질적인 측면을 들 수 있다. 둘째, 당대의 작사가들조차 몇몇을 제외하고는 자신들의 작업에 대해 그리 커다란 의미 부여를 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들 수 있다. 이들은 극작가나 문인, 혹은 작곡가로서 자신의역량을 펼치려는 사람이 대부분이었고, 따라서작사가로서의 활동은 여기(餘技)에 지나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꼼꼼히 작사집을 자료로 남긴 예가 없고, 필명과 익명을 남발한 것도 그 반증으로 들 수 있을 것이다. 셋째는 가장 많은 분량의 노랫말을 남긴 조명암, 박영호의 월북이다. 특히 조명암의 경우 북한 예술계의 중추적인 인물이 되면서 그의 이름이 오랫동안 가려져 있었고, 이로 인해 조명암 작사의 곡이 금지곡이 되거나 그의 작사곡을 다른 사람의 이름으로 바꾸는 편법이 횡행하여 작사가들에 대한 일목요연한 정리가 불가능해진 측면을 지적할 수 있다. 다행히 월북문인들에 대한 해금을 출발로 모든 분야의 월북 예술인에 대해 해금조치가 이루어졌으므로, 이제부터라도이에 대한 정확한 조사가 이루어질 것을 기대해본다. 필자 또한 이번 작업에 참여하면서 이러한 정확한 자료조사의 필요성을 절감했다(참고로 이번에 조사된 작사가/작곡가/가수의 명칭은 당시 발매된 음반에 대한 신문광고를 참조한 것이므로, 월북 작사가들의 이름이 다른 사람들의 이름으로 바뀐 경우는 있을 수 없다는 점을 밝혀둔다. 다만 필명, 익명에 대해서는 좀 더 치밀한 자료조사가 필요하리라고 본다). 이번에 새로 제작된 23편의 음반에 담긴 노래만을 대상으로 우선 소략하게나마 잊혀졌던 작사가들의 인명을 제시하는 것은 의미있는 일이라 생각되어, 그 일부를 적어 일제시대 대중가요 작사가 연구의 한 초석을 남기기로 한다(요약정리 편집부)
목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