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7.12 | [특집]
문화의 시대와 인구
문화저널(2004-02-12 14:23:54)
전라북도의 문화인구를 통계로 보면 얼마나 될까. 우선 지방정부나 문화예술단체에 의해서 공식적으로 집계된 통계는 없다는 사실을 먼저 밝혀두어야 한다. 그리고 지금까지 이런 통계를 확인해보고자 하는 시도도 거의 없었다고 보아야 한다.
그러나 우리가 흔히 이야기하는 문화의 대중성과 문화적 저변이라는 의미는 일정하게는 객관적인 자료를 통해 확인되어야 할 필요가 있다. 문화영역에서도 이제 지피지기(知彼知己) 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번 특집은 전북지역 문화인구의 저변을 점검해 보자는 것이었다. 첫 번째 글은 문화저널의 취재기사로 전북의 문화예술인구는 과연 몇 명인가. 그리고 문화예술을 향유한다고 볼 수 있는 대중들은 과연 몇 명이나 되는가를 나름대로 실증자료를 가지고 점검해 보았다.
그러나 취재 과정에서 계속되는 문제에 부닥쳐야만 했다. 기준이 되는 자료가 전무하다시피하고 최소한의 자료에 기댈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었다. 입으로만 전해지는 관객수, 사람마다 고무줄처럼 변화무쌍한 추계, 유명무실한 협회, 기록에 충실하지 못한 단체, 정부기관의 무성의와 불성실은 두말 할 것도 없었다. 따라서 제한된 시간과 인력으로 추진된 이번 작업은 시론적인 성격을 지닐 수밖에 없음을 널리 양해해 주셨으면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작업이 지역문화의 저변을 점검하는 기초적인 자료가 되었으면 하고 후속작업과 방법론상의활발한 비평 및 토론이 이루어지기를 기대한다. 두 번째 글은 오랫동안 연극계에서 활발하게 기획을 해왔던 한 공연기획자의 글이다. 그는 여기서 전북의 문화적 저변이 얼마나 열악한지는 실감나게 말해준다.
생활문화가 탄탄해야 지역문화가 산다
글·원도연 문화저널 편집장
예향의 자존심
예향 전북의 자존심이 소리없이 무너지고 있다. 21세기가 문화의 시대가 될 것이라는 예측에 대해서는 누구도 이의를 제기하지 않지만, 영상매체의 무차별적인 공략은 결코 ‘예향’을 비껴가지 않는다. 한 지역의 문화적 가능성은 총체적으로 주어진다. 생활문화의 현장이 탄탄하고 정책이 이를 뒷받침하며 그 기반 위에서 순수공연예술의 장르가 폭넓게 개방되어야 한다. 21세기 문화의 시대는 섣부른 기대와 성급한 예측으로만 주어지지는 않는다. 생활문화의 장을 넓히고 문화인구로 흡수해내는 일은 지역문화의 저변을 넓히는데 가장 중요한 관건이 된다.
그렇다면 지금 전라북도의 문화인구는 얼마나 되는가. 그리고 그 문화인구들은 어떻게 분포되어 있고 어떤 특성을 가지고 있는가. 21세기 문화의 시대를 지역문화의 번성으로부터 해답을 찾는다면 문화적 저변에 대한 구체적인 분석이 이루어져야할 필요가 있다. 그 문화적 저변을 구성하는 요소는 인구와 공간을 비롯해 많은 변수들이 있다. 예컨대 지역내의 문화유적이나 유물 혹인 문화예술인에 대한 인명록 등을 체계적인 정리하는 작업들도 문화적 저변을 다지는 작업이 된다. 그리고 그러한 작업들은 단순히 수량적인 호기심을 넘어 지역문화의 기초를 세우고 객관적인 전략을 가능케 하는 요소가 된다.
전라북도의 문화인구는
전라북도의 문화인구는 과연 얼마나 될까 사실 문화인구를 직접적으로 측정하는 일은 불가능하다. 문화의 영역이 그만큼 광범위하고 따라서 어떤 활동을 문화적으로 볼 것인지에 대한 객관적인 기준이란 존재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최소한의 자료를 통해서 문화인구의 범주를 간접적으로 확인해 볼 수는 있다. 여기서 문화인구의 범주를 확인하기 위해 첫 번째로는 전라북도 지역주민에 대한 조사결과를 사용하여 문화인구의 수치 및 특성을 보고, 다음으로 주요 문화공간의 공식·비공식 집계자료를 분석했으며 마지막으로 오랫동안 이 지역에서 활동해 온 전문활동가들과의 인터뷰를 활용했다.
사회학 연구자의 모임인 지역사회 연구모임에서 올해 1월 전라북도 지역민 500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조사결과를 통해 추산해본 문화인구는 약 5만 6천명에서 27만명 가량으로 나타났다. 이 수치는 먼저 ‘여가를 어떻게 활용하는가’ 라는 질문을 통해서 얻어진 응답자의 비율과 문화예술활동에 약간의 관심이라도 있다고 응답한 잠재적 문화인구의 수치를 전체 인구수에 대비해서 얻은 결과였다.
장르별로는 연극·영화인구가 역시 가장 많았고 음악인구도 상당한 비율을 차지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특이한 것은 역사기행이나 고적답사에 대한 관심이 상당히 높은 것으로 나타났다는 사실이다. 미술인구의 경우 수치는 낮게 나타났지만 미술품과의 접촉 가능성이라는 측면에서 본다면 사실 가장 정예화된 인구일 수 있다. 연극·영화인구가 높게 나타난 것은 영상매체에 대한 선호도가 역시 높다는 것을 보여준다.
이 결과는 지역별로 보면 역시 농촌보다는 도시 거주자들의 문화적 활동이 활발한 것으로
나타났지만, 그 차이는 예상보다 그다지 크지 않았으며, 특히 연극·영화와 역사기행의 경우 잠재적 문화인구는 거의 비슷한 수준으로 나타났다. 특이한 것은 적극적인 미술인구의 경우 농촌이 오히려 도시를 앞지르는 것으로 나타났다는 점이다. 여기에는 전문적인 미술인구의 경우 개별적으로 작업이 이루어지고 농촌에 들어가 활동하는 숫자가 다른 장르에 비해서 상대적으로 많다는 사실이 통계적으로 확인된 경우라고 볼 수 있다.
성별로는 문학과 영사기행에서는 남성이, 음악, 미술, 연극·영화에서는 여성이 적극적으로 나타났으며 잠재적 문화인구는 문학과 음악은 여성이, 연극·영화와 역사기행에서는 남성이 더 높게 나타났다. 연령별로는 20대와 30대가 연극·영화와 음악을 주로 즐기고, 40대와 50대가 음악과 역사기행, 60대는 주로 음악을 선호하는 것으로 드러났다. 특히 연극·영화인구의 경우20대가 전체의 42%, 30대가 29%를 차지하고 있어 다른 장르에 비해 가장 젊은 애호인구를 가지고 있다고 볼 수 있었다. 그러나 20대는 문학과 미술에는 거의 관심이 없는 것으로 나타났으며, 역사기행에도 특별한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60대의 경우 음악인구가 비교적 높게 나타난 것은 판소리나 국악애호가들이 여전히 건재하다는 점을 반영하지만, 전체적으로는 문화활동에 가장 관심이 없는 계층이기도 했다. 역시 전반적으로는 30대가 문화활동에 관심도가 높은 것으로 나타났으며, 다만 미술인구의 경우 수는 작지만 연령에 관계없이 고르게 분포되어 있다는 특징을 보여주었다.
소비수준이 높을수록 문화활동에 대한 관심도 높게 나타났다. 거의 전체 장르에서 소비수준이 높을수록 문화적 관심도도 높게 나타났지만, 문학의 경우는 소비수준이 낮은 계층에서 관심도가 높았다는 점도 이채로운 결과였다.
열린음악회와 김홍도전
다음으로는 조사결과가 아닌 실제 결과를 놓고 전북의 문화인구를 살펴보았다. 먼저 최근 3년동안 전북에서 벌어진 각종 문화예술 이벤트 가운데 가장 많은 관객이 몰렸던 프로그램을 분석해 보았다. 역시 가장 성공적인 이벤트로 꼽힌 것은 작년 6월은 열린음악회로 약 3만명의 관객을 동원한 것으로 추산되었다. 또 옥내 대중공연으로는 94년 12월 전주실내체육관에서 열렸던 ‘패티김’ 공연으로 역시 1만 4천여명의 관객이 몰려들었던 것으로 집계되었다.
그리고 가장 성공적인 전시로 기록된 것은 국립전주박물관이 주관하여 올해 3월 12일부터 한달여동안 열린 김홍도전이었다. 박물관측의 공식기록에 따르면 김홍도전에는 한달동안 무려 5만 9천여명이 몰린 것으로 집계되어, 전북의 인구 가운데 100명당 3명꼴로 전시장을 찾았던 것으로 나타났다. 이같은 성공적인 이벤트의 결과만을 놓고 보면 전북의 문화인구는 대략 5만여명 안팎이라는 추산이 가능하다. 또한 국립전주박물관의 일년 관람객이 올해를 기점으로 20만명을 넘어섰다는 것도 의미있는 기록이다. 이러한 수치를 문화인구의 최소한으로 보느냐는 문제는 관점에 따라 다를 수 있다.
마지막으로 지난 10여년 동안 전북 문화예술의 메카로 자리잡아 왔던 전북예술회관의 지난 3년간의 관객현황을 조사했다. 1년동안 예술회관에 드나드는 관람객들의 연인원에 대한 공식통계는 없다. 다만 예술회관 관계자들이 전시장은 하루 500명 정도로 추산하고 있고, 유료 공연의 경우 문예진흥기금 정산을 위해 정리해두는 서류를 통해서 확인이 가능하다. 물론 무료공연인 경우는 방법이 없다. 공간과 문화인구는 직접적인 상관관계를 갖지는 않는다. 공간은 물리적인 시스템이므로 평가되는 것이므로 문화인구와 직접적으로 연관시킬 수는 없다. 그러나 간접적으로 전북지역 공연인구의 현황은 파악될 수 있다.
먼저 예술회고나 유료공연의 관객현황을 보면 평균 300-400명을 기록하는 것으로 나타난다. 94년이 371명, 95년이 319명, 96년은 298명에 그치고 있다. 그러나 이 가운데 실질적으로 문화 매니아라고 볼 수 있는 유료관객의 수는 대체로 60-70% 정도에 불과한 실정이다. 이같은 결과는 전북지역의 문화인구가 아직은 공연물에 대한 접촉이 활발하지 않다는 점을 말해준다. 즉, 전체 인구 가운데 잠재적인 문화 인구들이 적극적인 문화활동에 참여하는 빈도가 아직은 매우 낮다는 사실을 말해주는 것이다.
느리지만 진지한 관객들
앞서의 조사결과와 전문가들이 꼽는 전라북도의 문화인구의 특성은 전반적으로 문화의 반응이 느리다는 점, 그리고 20대의 젋은 층이 문화인구로 흡수되지 못하고 있다는 점, 30-40대가 주요 문화인구층을 형성하고 있다는 점 등으로 요약된다. 또한 장르별로는 국악의 경우 애호가들의 노령화로 인한 자연감소가 계속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가장 높은 선호도를 보여주고 있다. 도립국악원의 수강생은 처음 시작했던 81년에 비해 무려 4배이상 증가했으며 어린이나 주부수강생들도 꾸준히 배출되고 있다. 음악이나 무용인구의 경우 다른 지역에 비해 훨씬 많은 전공자들이 해마다 배출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수용자들의 폭은 제한되어있고, 연극인구는 전문적인 인력의 배출기관이 전혀 없음에도 불구하고(이것은 공연에서 조직동원이 불가능하다는 점을 말한다) 다른 장르와 비슷한 정도의 세를 유지하고 있다는 점도 독특한 양상이다.
결국은 전통적인 농경사회로서의 문화적 토대를 지니고 있었던 전북지역의 문화적 특성이 산업화된 사회구조속에 완전히 적응하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을 말해준다. 판소리의 본고장으로서 어느 곳에서나 소리 한가닥이 흘러나오던 지역의 문화적 자산이 점차 소멸하고, 새롭게 부상하는 문화적 장르들에는 익숙하지 않은 전환기적인 지역정서가 문화현상에서도 그대로 반영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위험한 생각은 전북이 산업화를 이루고 인구증가를 이룸으로써 지역문화의 저변이 넓혀질 것이라는 생각이다. 실제로 올해 초 진행된 한 여론조사의 결과를 보면 전북의 대중들은 문화적 발전을 소망하면서도 동시에 산업발전이 이루어져야 한다는 바램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즉 문화적인 발전에 대한 강한 열망과 생활문화의 정착을 원하면서도 문화적 발전과 경제적 성장을 등치시키지 못하고있다는 것이다. 산업발전과 인구는 문화발전의 충분조건이기는 하지만 결코 필요조건은 아니라는 사실을 선진도시들의 사례는 보여준다. 문제가 되는 것은 문화의 저변을 넓히고자 하는 지방정부와 문화예술인들의 의식적인 노력이다. 지역문화예술인들의 이런저런 노력이 잠재적인 문화인구를 현실화시키지 못하고, 특히 젊은 층을 수용하지 못한다면 그것은 일차적으로 문화예술인들의 잘못된 전략에서 비롯된 것일 수도 있다는 것이다. 여기에 지방정부의 문화정책에 대한 깊은 자성도 필요하다. 선거때마다 앞다투어 문화도시를 만들겠다는 자치단체장들은 문화적 저변을 넓히기 위한 보다 치밀한 기획을 가져야 한다.
그러나 문화는 결코 하루아침에 만들어지지 않으며, 김용택 시인의 말처럼 건설되는 것이 아니다. 무엇보다도 생활문화를 살려내는 문화기반시설의 확충이 절실한 과제라고 할 수 있다. 전북지역의 문화적 토양이 반만년의 농경적 전통에서 생성된 생활문화에 기반하는 것이라면 새로운 시대에 걸맞는 문화적인 전략도 지역적 특성에 맞게 끈질기게 모색되어야 한다.
오늘도 걷는다마는...
우리시대 일그러진 영웅들을 위하여
글·이근영 진포문화예술원 기획
언제 어디서 누가 무엇을 왜 어떻게
학창시절 학급회의 시간의 의사결정 과정으로 배운듯한 육하원칙이 늘 머릿속에 떠나지 않던 시절이 있었다. ‘공연 기획자’ 라는 낮설지만 전문적인 용어가 내 명함에 찍혔던 시절. 늘 ‘신장개업’ 간판을 눈여겨보며 만나는 사람의 명함을 항상 모으곤 하던 시절이었다. 혹시라도 우연히 회사의 홍보실이나 총무과, 관리과에 소속된 사람들을 만나면 열심히 그의 얘기를 들어주곤 하던 바로 그 시절이었을 것이다.
누구도 나에게 이 길을 가라하지는 않았지만 작품(?)을 상품처럼 팔거나, 상품(?)을 작품처럼 팔아야 하는 일인 공연기획이 나의 사회적 책임인 양 들떠 최후의 판단도 팔고 결과까지 팔아버리고, 끝내는 빨리 잊어 치워버리는 것을 최선으로 알던 그 일을 사실은 지금도 손에 붙여두고 산다. 내가 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책임 때문이건 별다른 선택이 없어서 하는 일이건 전북지역의 공연문화의 저변을 검토해보는 일은 아직은 조심스럽기만 하다. 다시 공연기획의 육하원칙으로 돌아가 보자. ‘어디서?’ 당연히 지역 내에서 지역주민들과 함께 하는 일이다. 사실 ‘어디서’는 전문적인 시설이라고는 보잘 것 없기만 한 전북의 현실에선 그다지 고민스러운 일도 아니다. 선택의 여지가 좁다는 것은 아이러니컬하게도 오히려 기획자의 번거로움을 많이 줄여준다. ‘언제’라는 것도 무조건 공연장 사정에 따라야만 한다. 비어있는 날짜, 미리 대관신청을 해두었다면 몰라도 보통 공연 3-4개월 전에 공연 가부가 결정되기 때문에 무조건 비어있는 날짜만 잘 골라내면 된다. 전주에서 심심치 않게 평일에도 공연이 올려지는 까닭도 여기에 있다. 이제 남은 것은 ‘누가 무엇을 어떻게 왜?’ 라는 질문이다. 난감한 문제가 아닐 수 없다. 결론부터 말한다면 오늘의 공연장엔 ‘관람객’ 이 아닌 ‘구경꾼’만 가득한 것이 현실이다. 전시장에 오는 손님들은 말한다. “아 작품이 너무 난해하네요. 무슨 뜻인지 잘 모르겠어요.” 정작 화가는 전시장에 오는 사람들이 잘 모르는 정도가 아니라 하나도 몰라도 상관하지 않을 수 있다. 누구를 가르치기 위해 전시회를 여는 작가는 거의 없기 때문이다. 공연장에 연극을 보러 오는 관객들도 말한다. “이 연극은 너무 딱딱하네요. 의상이 나 분장도 좀 조잡한 거 같고. 뭐랄까 전위적이라고 할까?”
명성과 물량으로 공습해오는 ‘세계적인’ 혹은 ‘전통적인’ 유명 공연단의 공연장은 언제나 가득 메워주는 것이 지역주민들의 미덕이 되어 버렸고 “역시!” 라며 아낌없는 찬사까지 보낸다. 물론 그 중에는 뛰어난 작품들도 있고 ‘벌거벗은 임금님’ 같은 현상으로 뛰어나게 보여지는 작품들도 있다. 대형화되고 기관이나 언론의 영향력 아래 올려지면서 홍보전에서 일단 한수 접고 들어가는 공연물은 개인의 감성을 뚫고 작품으로 인정되어 박수를 받고 지역 예술인의 표현은 그 사람의 ‘편력’ 또는 ‘특이한 끼’ 의 산물로 보여져 ‘동정’을 받는다.
물론 이런 상황들이 전적으로 관객들의 문제라고 말할 수는 없다. 문제점을 찾아내고, 반드시 답을 제시하라고 학습 받아온 시민들에게 공연단이 친절하지 못한 점도 있다. 그러나 문제를 좀 더 차분하게 생각해보자. ‘무엇을 어떻게 해야할 것인가’ 예술인도 한 사회의 구성원이고 한 집안의 어엿한 가장이다. 경제적 논리 앞에 무능력한 시민, 은행에선 무자격자 개인 하나 하나가 모인 단체는 어떠한가? ‘자생력’ 이라는 일상적이고 평범한 논리앞에서 예술단체는 한결같이 당당하지 못하다. 지역문화의 견인차, 원동력, 돌파구, 가능성 등등의 온갖 수식어를 가져다 붙일 수 있는 단체라 하더라도 정당한 거래가 불가능한 것이 현실이다. 즉 제작에 들인 공력만큼 합당한 가격에 손님을 모실 수가 없는 것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서 공연은 올려지는가. 우선 재원확보라는 측면에서 보면 몇 가지의 실날같은 가능성이 있다. 첫째는 비록 일부분이지만 문예진흥기금이나 시, 도 예산 등을 지원 받는 방법이다. (관립예술단이다 시, 도 국립예술단의 봉급 및 제작, 운영비는 해당기관에서 전액을 지급하는 것을 원칙으로 하지만 일부만 받는 곳도 더러 있다. 민간단체는 공연비 일부를 지원 받기도 하지만 기획자들끼리는 때로 ‘나눠먹는다’ 라고 표현하기도 한다.)
두 번째 방법은 인쇄물 제작비 마련을 위해 기업의 후원 또는 협찬금을 요청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 경우는 첫 번째 경우보다 더 비감해지기 마련이다. “어려운 줄은 아는데, 도와줘야 하는데, 돕고는 싶지만...예산이 넉넉하지 않아서 내년에도 하죠? 내년에 봅시다.” 담당자들의 이런 설명을 들을 때마다 불우이웃돕기 성금 걷으러 아니 구걸하러 다닌다는 느낌을 떨칠 수 없다. 그래도 오늘도 누군가를 만나러 가고 또 이런 방법 말고는 사실 이렇다할 길도 없다.
이도 저도 안된다면 마지막으로 입장수입이 공연의 성패를 가름하는 유일한 원천이 된다. 다시 처음 질문으로 돌아온 셈이다. “1인당 예매, 8천원(일반)5천원(학생)/현매 1만원” 관객 입장에서는 수천억을 들여 제작한 영화나 시청료만 내면 볼 수 있는 드라마에 비하면 경쟁력이 떨어지는 비싼 가격이라고 불평할 수도 있겠다.
그런데 이 입장료도 사실 일관성이 없다. 후원금 또는 회비를 내는 회원도 거의 없는데 ‘극단 동인’이라거나 ‘후원자’들은 할인된 가격에 모셔야하고 단체 특히 중·고생은 거의 절반가격, 삼천 원 정도의 할인권을 따로 제작해야 한다. 거기다 초대권까지 챙긴다. 최후의 보루는 이제 앙상해진다. 대부분 공연단체에 소속된 배우들의 지인이거나 얼굴도장 찍기 위해 오는 관객이 점차 많아지는 이런 공연장 현실을 어쩌면 단체 스스로 묘안을 찾지 못한 채 임시방편으로 한회 한회 공연만 거듭해 오면서 생긴 악습일 수 있고 이미 구조적으로 어찌 해볼 수 없는 악순환의 연속일 수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게시판도 없는데 프스터는 이삼천장씩 만들어서 불법 부착을 감행해야 하고 팜플렛은 24페이지는 제작해야 웬만큼 지역에서 흉내내는 수준이 된다. 그렇다면 이런 질문이 나올법 하다. “배우도 없고 관객도 없고 돈도 없는데 그런데도 공연은 계속된다. 너무 엄살이 지나친것 아니냐?”
이제공연기획의 마지막 질문인 “왜” 아른 물음에 답해야 한다. 무용, 국악, 연극, 음악 등 공연분야의 예술인들은 하루아침에 되지는 않는다. 오랜 도안의 실기 레슨과 연습은 물론이고 공연에 적합한 몸을 만들고 그 상태를 유지하는 것은 차마 지켜보기 안스러울 정도의 고난에 가깝다. 전북에서만도 매년 수백여명이 되는 공연분야 에술학과의 졸업생들이 학사학위를 박고 사회로 진입해 들어온다. 그들은 예술가라는 이름을 걸고 여기 저기를 기웃거려 보지만, 대부분의 졸업생들은 상인, 직장인, 주부로 평범한 생활인이 된다. 결국 창작을 통해자기실현을 이루고자 뛰어든 예술세계에서의 ‘전문가’ 는 이제 ‘문화재’ 라고 불릴 정도로 귀하고 드문 존재가 된다. ‘예술’ 이 지구를 구원하기에는 아직 힘에 벅찬 것이다. 그래도 마치 복사기로 찍어내듯 전 세계의 공중에서 무차별로 살포되는 영상매체와는 달리 지역의 정서와 고민을 가장 장 표현해 낼 수 있는 것은 역시 ‘공연’ 밖에 없다는 인식에 전업 예술가들은 뜻을 같이한다. 결국 그들은 또 다른 표현양식을 찾아 늘 고민하고 있고 지금도 그 고민은 계속되고 있다.
조직에 만들어나는 일에는 언제나 일정한 힘이 존재한다. 그래서 집단은 때로 스스로 최면당하기도 하고 그 속에서 도무지 불가능해 보이는 성과를 이루어내기도 한다. 그러나 어떤 경우 개인적인 창작물에도 늘 구경꾼들이 모이는 일도 있다. 전문예술가라는 이름앞에도 석박사 학위 하나 정도는 붙고 사회적으로 탄탄한 인맥을 가지고 있어야 그나마 안심이 되는 것도 최근의 경향이다. ‘우리 시대의 일그러진 영웅’ 들은 너무 고단한 것이다.
이근영 / 전북대 독문과 졸업. 대학 졸업후 지역 연극계에서 활동하면서 전주창작극회와 시립극단에서 공연기획을 맡아오다 지금은 군산「진포문화예술원」에서 기획을 담당하고 있다. 대학시절에는 강변가요제에 전북대표로 출전 수상할 정도로 노래실력이 빼어나고 지금은 군산 KBS에서 라디오 프로그램을 진행하고 있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