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7.3 | [문화저널]
꽁트
구멍에 대하여
글·한창훈 소설가
(2004-02-12 14:45:26)
우리가 세상을 보는 것도 구멍을 통하는 것이고 듣는 것도 그렇다.
말이 나오는 것도, 음식을 집어넣은 것도 입이라는 구멍을 통해서요
그것들이 건더기로 빠져 나오는 곳도 물로 빠져 나오는 것도 아아, 영락없는 구멍이었다.
한사람이 있었다. 그 사람은 해뜨면 일어나 밥 찾고 밥 먹고 나서 담배 찾고 하여간 겉으로 보면 그저 주변에 흔한 가나다라 중의 하나였는데 흔해 빠진 인물들이라도 낱개로 두고 짯짯이 훑어보면 범상치 않은 곳이 한 가지 쯤은 꼭 있듯이 별다른 구석 하나가 있었다.
그 사람은 평생을 구멍에 대한 사유 및 분석을 하였고 근자에 이르러서는 구멍을 통하여 구도(求道)를 하는 지경이 이르렀다는 풍문이 들기도 했는데, 그 이가 생각하기로는 인생이란 게 구멍에서 출발하여 구멍으로 끝나더란 것이다. 아버지의 구멍을 통해 들어간 반쪽이 나머지 반쪽을 통해 세상에 나왔고 죽을 때도 땅에 작은 구멍 하나 파는 것으로 끝나지 아니하더란 말인가.
그가 일찍이 몸의 구멍들이 영글어지기 시작하는 초등학교 3학년 때 재미없고 싱겁고 지겹고 구잡스럽고, 째째하기 이를 데 없는 수업을 마치고 어매 아배 종일 먼지 속에서 상자를 묶어대는, 좁아터진 집을 행해 오다가 서쪽으로 늬엇늬엇 넘어가는 해를 보냈는데, 다들 아시다시피 뜰 때와 질 때의 해는 사람 눈으로도 바라볼 수 있어서 그도 멍하니 그것을 바라보며 홀로 터벅터벅 걷다가 문득 깨달은 게 있었다.
해라는 게 어쩌면 허공에 떠 있는 물건이 아니고 이 세상을 감싸고 있는 지붕에 생겨난 구멍 같았다. 구멍이라면 글세 살아 움직이는 구멍이겠으나 아무튼 그가 보기엔 우우 저 바깥 세계는 온통 빛으로 차있고 그 빛이 저 움직이는 구멍을 통해 이 곳으로 쏘아오지 않겠는가 라는 조금은 동화적인 착상을 했는데 그 때부터 구멍은 그의 화두가 되었다. 그러고 보니 달은 차갑되 저 홀로 벌어지고 메워지는 구멍이며 별은 산탄 총 맞은 구멍들로 보였다.
그의 사유와 분석은 나날이 발전해 발전을 거듭하였다.
우리가 세상을 보는 것도 구멍을 통하는 것이고 듣는 것도 그렇다. 말이 나오는 것도, 음식을 집어넣는 것도 입이라는 구멍을 통해서요 그것들이 건너기로 빠져나오는 곳도 물로 빠져나오는 곳도 아아, 영락없는 구멍이었다.
그러고 보니 구멍이 아닌 것이 없었다. 주전자, 샤워기, 펜꽂이, 라이터, 주사기 이런 저런 총, 크고 작은 병, 보일러, 연통, 에프킬라, 피리, 수채구멍, 단추구멍, 사진기, 볼펜, 플러그꽂이, 압력밥솥, 신발끈, 자동차엔진, 가습기, 소화기, 가스렌지, 나팔, 스프링쿨러, 호스 따위들이 구멍을 통해 각자의 쓰임새가 만들어지고 있었다. 거기에다 그의 사유와 분석은 더욱 진보를 이루어 전라북도 장수 땅 수분리에 있는 금강의 젖꼭지인 뜸봉샘과 참머루 같은 아내의 가슴줄기도 구멍임을 알아냈고, 탄탄했던 살과 피를 모두 사주한 뒤 숨이 끊어진 다음에도 바람 껴안고 한 세상 더 사는 느티나무, 그 고목의 깨끗한 구멍을 지나 올가미에 걸린 토끼를 통해, 삶은 늘 느닷없이 발목을 잡고 몸부림 필수록 바짝 조여옴을 간파해내고 한평생 갈대구멍으로 하늘을 보고 살았음을 인정하면서 화장터에서 불구멍으로 들어가 검은 연기가 되어 굴뚝 구멍으로 풀어져 나오는 이들을 어루만지게 되었다.*
그는 심지어 구멍과 관련된 우스개 이야기까지 확보하고 있었다. 그 이야기는 이랬다.
평생을 여자와 술만 밝히며 살았던 사내가 있었다. 술과 오입질로 인생의 경륜을 쌓았으니 가족은 물론 친구들의 고생이야 자심한 정도가 아니라 죽고 못살 지경이었다. 그 사내가 주었다. 훗날 친구 하나도 죽었다. 그 친구는 덕을 쌓으며 살았던지 옥황상제가 천국, 지옥, 연옥 총망라한 자유이용권을 끊어주었다.
친구는 어느 날 지옥을 구경하게 되었다. 목 귓덜미에 천 개의 쇠파이프를 박고 있어야 되는 사람, 10원짜리로 구천구백구십구억 원을 하루만에 모두 먹어야 죄가 풀리는 사람, 천 대의 외제 자가용을 맨 몸으로 끌고 수미산으로 올라가야 되는 사람, 입만 다물었다 하면 댓뿌리 회초리가 온 몸에 쏟아져 끊임없이 주절주절 말을 해야하는 사람, 총알이 뒤로 나오는 총을 천년간 날마다 518번씩 쏴야하는 사람, 썩어서 부글부글 끊어 오르는 강물을 다 마셔야 되는 사람들을 구경하고 나니 문득 그 오입쟁이가 궁금해졌다. 눈이 세 개나 달린 지옥 직원에게 물어보자 안내를 해주었다.
오입쟁이는 뜻밖에도 분홍빛 실크 커튼이 드리워진 깨끗하고 분위기 있는 방에서 침대에 앉아있었는데 오른쪽 무릎에 옷을 홀랑 멋은 팔등신 미녀를 앉혀두고 왼손으로는 술이 찰랑찰랑한 술병을 들고 있는 게 아닌가. 친구는 기가 막혀 물었다.
“아니 저게 지금 벌받고 있는 거요?”
“그렇소. 벌받고 있는 거요.”
“저 사람은 평생 술과 여자만 밝혀 집안 말아먹는 작자인데 저런 벌도 벌이라고 주는 거요?”
직원이 대답했다.
“저 여자와 술병에는 구멍이 없소이다.”
아무튼 구멍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선과 면이 변형된, 완성된 구도를 지니고 있으며 그 속에는 그늘과 틈과 주름이 자리하고 있는 것이다. 모름지기 바닷가 바위를 보면 알 것이다. 살아있는 것들은 죄다 햇볕 받는 평평한 곳보다 그늘이 있는 틈과 구멍에 자리잡고 있지 않은가. 구멍이란 휘어지고 구부러진 공간인데 삶의 지혜와 생존방식의 진화가 그곳에서 시작하고 그곳에서 결말지어지더라는 것이다.
하여 그는 인간의 삶이란 구멍과 구멍의 연결선 중 어느 한 점에서 끝없이 이동을 꿈꾸는 것이라는 결론에 도달했다. 더불어 인간이란 한 구멍에서 다른 구멍을 향해 탈출을 끊임없이 시도하는 존재임도. 결국 모든 의미의 육화(肉化)가 구멍을 통해 이루어진다는 사실도 덧붙이게 되었다. 벽만 바라보고 있어도 득도를 한다는데 평생 구멍에 대해서 관찰하고 연구 및 공부를 한 그는 이 세상이 하나의 거대한 구멍임을 알아차리는 경지에 도달한 것이다.
그런 그가 요즘에는 조금 의기소침해 있다. 구멍을 통해 나온 술을 또 다른 구멍에 알뜰히 채우고서 구멍에 털어 넣으며 그는 요즘 새로운 구멍에 대한 고민 때문에 어쩌면 자신의 구멍 철학을 새로이 뜯어고쳐야 될지 모르겠다고 한숨지었다.
요는 이렇다. 지난 해 12월 26일 새벽 신한국당 국회의원들이 새벽에 모여 일제히 앉았다 일어섰다를 하고 있는데, 노동법과 안기부 법을 6분만에 날치기 통과를 하고 있는데, 그 장면을 뉴스시간에 바라보고 있는데 갑자기 어마어마한 새로운 의미의 구멍이 다가오더라는 것이다. 민주주의의 대 국민적인 약속에 구멍난 것부터 해서 텔레비전 뉴스, 신문 사설, 투표했던 손모가지들과 논산훈련소 훈련병들처럼 착실하게도 일어섰다 앉았다를 하는 국회의원들의 대갈통에 이따 만한 구멍이 하나씩 나있더라는 것이다.
“내가 지금까지 보고 생각해온 구멍 중에서 아마 가장 큰 구멍일 거요. 이를테면 우주에 있는, 어마어마한 중력 때문에 모든 물질의 부피가 제로를 향해 수렴해드는, 지나가는 빛까지도 빨아들여 버리는, 그래서 시간까지도 뒤틀려버리는 블랙홀보다도 더 큰 구멍이 그곳에 있더란 말이요.”
그는 속이 꽉 차있는 구멍. 김밥을 한 점 씹으며 말을 이었다.
“그 구멍은 내가 지금까지 살펴온, 삶이 낳고 자라는 구멍과는 각도와 색채와 모양이 전혀 다른 것이더란 말이요. 블랙홀보다도 무서운 구멍이었오. 아무래도 내 공부는 새롭게 시작해야 될 것 같소. 아줌마 소주 한 상자 있죠? 있으면 그 중에서 한 병만 더 줘봐요.”
*유용주의 시집 <크나큰 침묵> 3부 구멍 연작에서 부분인용
한창훈 / 63년 전남 여수 출생. 작품집으로 <바다가 아름다운 이유>가 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