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7.3 | [문화칼럼]
‘자기모험’으로서의 문화
글·허소라 시인·군산대교수
(2004-02-12 14:50:46)
‘문화’란 한마디로 야만으로부터의 해방이며 자연으로부터의 경작이라 할 것이다. 고로 문화란 팔짱끼고 저절로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그 원어가 지칭하듯 끊임없이 가꾸고 경작해야 한다.
20세기의 데칼트로 일컬어지고 있는 화이트헤드 (1861-1947)는 그의 저서『관념의 모험』(1933)에서 한 사회가 진리, 아름다움, 예술, 모험, 평화의 개념을 모두 갖추었을 때라야 비로소 ‘문명화’가 충족될 수 있다고 지적한다. 그러므로 이 책은 위의 다섯 개념들을 둘러싼 관념의 자기 모험인 셈이다. 이어서 그는 한 시대의 정신이란 그 사회의 교양 있는 사람들을 사실상 지배하고 있는 세계관에서 싹트는 것이라고 부연하고 이러한 세계관은 문화의 여러 부문에 상응하여 다양하게 나타나는 것으로 보고 있다.
서두가 다소 장황한 느낌이나 결국 문화란 다양성 속의 축적물이요, 모든 분야에 있어서의 지적 대모(代母)가 된다고 하겠다.
한마디로 문화는 오랜 전통의 축적과 ‘존재하려는 노력’에 따르는 자율적 표현을 그 속성으로 하고 있다. 그러나 우리는 불행히도 지난 30여 년의 군사문화 속에서 존재하려는 노력으로서 ‘자기 모험’의 기회를 억압당해왔던 것이다. 문화의 다양성은 오직 지휘봉에 의해 획일화되어 왔고 같은 목소리, 같은 색채로만 훈련되어왔던 것이다. 여기서 파생된 것이 다름 아닌 굴신과 종속의 문화다. 그리하여 이 지방의 독특한 문화예술들이 지역차별의 철저한 푸대접 속에서 엉성한 유니폼을 걸친 채 동면 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물론 지난 군사문화 30여 년 속에서의 공업화, 과학화 등 일련의 경제적 성과를 부인할 수는 없다. 그러나 그 과정에 있어서, 전체로부터의 개체 소외, 전통과 역사로부터의 단절, 자원 고갈과 환경 훼손, 그리고 보다 조직적인 사회 통제, 말뿐인 문화·인문주의 고양 등의 반작용을 결코 놓칠 수가 없다.
이런 정치·문화적 좌절감과 자포자기 속에서 오랜만에, 실로 오랜만에 지적 허무주의를 벗어나게 한 것이 지난 동계U대회가 아니었나 싶다. 그나마 무공해 천혜의 땅인 무주(茂朱)가 있었기에 가능했을 것이다.
특히 지난 U대회 기간동안 도내 곳곳에서 펼쳐진 문화예술행사와 경축행사는 우리 전통문화의 우수성을 내외에 널리 알리는 한편 축제 분위기를 고양시키는 데 적잖은 효과를 낸 것으로 평가되었다. 그리하여 경기장과 문화행사장에서는 각 국 선수들이 메달보다 값진 우정을 나누며 스포츠 등을 통한 국경 없는 문화공간으로 용해될 수가 있었던 것이다. 얼핏 보아 동계 스포츠와 무관해 보이는 세계서예대전과 창무극 <춘향전> 소극장 연극제, 정읍사 가무악극 등 크고 작은 문화 이벤트가 곁들여짐으로 더욱 잊지 못할 추억의 공간으로 확산되기에 이르렀다. 특히 우리 지방은 이런 문화주의, 온정주의가 무한정으로 매장된 보고가 아니겠는가? 다만 앞으로를 위해 몇 가지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이 있다.
문화예술분야의 아이템이나 진행 등에 있어서도 이 고장의 예술종사자나 전문인들과 보다 충분한 협의와 그 참여의 폭이 넓었더라면 하는 아쉬움을 갖게 된다. 또한 문화는 자연이 정복이 아니라 자연과의 조화라 할 수 있다. 어떻게 하면 천혜의 자연경관을 최대한 살리면서 경기장과 부대시설을 곁들여야 하는가 교훈으로 삼을 일이다.
물론 처음 치르는 큰 행사인 탓도 있고 박자 느린 우리의 기질 탓도 있겠지만 홍보부족을 들지 않을 수 없다. 시작 며칠은 관중 부족을 메우기 위해 청소년 동원에 관계직원들이 진땀을 흘려야 했고 이른바 세계대회인데도 관람차 내도한 외국인들이 그다지 눈에 띄지 않았다. 다음으로는 행사주체의 과도한 의타주의를 지적하고 싶다. 문화예술분야의 아이템이나 진행 등에 있어서도 이 고장의 예술종사자나 전문인들과 보다 충분한 협의와 그 참여의 폭이 넓었더라면 하는 아쉬움을 갖게 된다. 또한 문화는 자연이 정복이 아니라 자연과의 조화라 할 수 있다. 어떻게 하면 천혜의 자연경관을 최대한 살리면서 경기장과 부대시설을 곁들여야 하는가 교훈으로 삼을 일이다.
정부는 올해를 ‘문화유산의 해’로 정해놓고 있다. 문화유산에는 유형의 것과 무형의 것이 있고 우리 고장은 이 유·무형의 문화유산이 가득한 곳이다. 다만 위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오랜기간 군사문화와 지역소외 속에서 체계화를 이루지 못해온 게 사실이다. 그 사이에 세월은 흘러갔고 여러 분야에서의 전수문제 등 해야할 일이 많다. 당장 판소리의 고장이라고 하나 후계자 양성과 현대와의 접목 등 역시 난제가 산적해 있다.
되풀이하거니와 문화란 축적의 소산이다. 이제는 단체, 또는 집단에게 주어지는 문화가 아니라 향수자가 개별적으로 ‘자기 모험’을 통해 창출되는 문화라야 한다. 그가 바로 양질의 문화로서 생명력을 지니게 된다. 그러기 위해선 우선 탈관료주의가 필요하다.
허소라 / 시인·군산대교수. 1959년 『자유문학』지의 추천으로 문단에 데뷔했다. 전라북도 문화상(문학), 전북대상(학술), 백양춘 문화상, 풍남 문학대상 등을 받았다. 시집으로 『목종』, 『풍장』, 『아침시작』, 산문집 『흐느끼는 목마』등 다수가 있고, 논저 『한국현대작가연구』를 펴낸 바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