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7.3 | [문화저널]
여성과 문화
어느 할머니 이삿날에 생각해 본 우리의 역사
글·혜진 나눔의 집 원장
(2004-02-12 14:56:27)
나중에 알게 된 일이지만 중국에서 위안부 생활을 하다 해방이 되어 고국에 돌아왔으나 그 누구도 반겨주는 이 없어 다시 일본으로 떠나야만 했던, 그래서 20년 후 친척의 소개로 고향에 돌아왔으나 그 소개가 사기로 이어질 줄이야.
작년 이후 여러번씩이나 약속을 미루다 잡은 날, 10월 21일이다. 아마도 머물던 곳을 떠나 낯선 곳을 거처를 옮긴다는 것이 할머니에게 있어 대단한 결심 내지 그 어떤 것을 요구했는지도 모른다. (나중에 알게 된 일이지만 중국에서 위안부 생활을 하다 해방이 되어 고국에 돌아왔으나 그 누구도 반겨주는 이 없어 다시 일본으로 떠나야만 했던, 그래서 20년 후 친척의 소개로 고향에 돌아왔으나 그 소개가 사기로 이어질 줄이야. 그 동안 생명보다 소중히 여겨왔던 전 재산을 하루아침에 믿었던 사람에게 사기 당하고 고향 주변을 떠돌며 어눌한 고국의 말솜씨로 갖가지 겪기 힘든 고통을 감내해야만 했던 할머니이기에 이젠 마지막 휴식처를 갖는다는 심정으로 95년 겨울이후 여러 번 전화와 방문으로 여건을 살피는 조심성을 보이시다 드디어 이사오는 날이다.)
새벽 5시에 일어난다는 것이 6시에 간신히 일어났다. 김 간사 깨우려니 이미 준비하고 기다리고 있었다. 법당에 들어가 부처님 전에 세 번 인사(삼배)를 드리고 바삐 나와 차에 시동을 걸었다.
팔당 상류가 흐르는 강을 다라 새벽 물안개가 자욱하다. 옅은 회색을 띠고 강을 따라 이어지는 물안개는 경치가 그리운 서울사람 들에게는 일종의 휴식처다. 그래서 그것은 이곳 퇴촌의 명물이다. 그것은 때론 나를 유혹하고 나의 마음을 사로잡고 움직이게 만드는 그 무엇이다. 이 외진 시골길에서…
처음으로 뛰는 장거리 여행길, 안개 때문이기도 하지만 초행길이라 처음에는 조심을 떨다가 대전 지난 뒤로 신나게 페달을 밟아 3시간을 조금 넘기고서야 왜관에 도착했다. 왜관 기차역에서 전화를 하니 조명자 (본명은 배춘희-무슨 이유 때문인지 그때까지는 조명자 할머니라고만 밝혔다.) 할머니가 나오셨다.
"방이 누추해서… 방에 가면 왜 내가 지난번 집을 안가르쳐 줬는재 알~게다"
고향 읍내를 연상케 하는 도로변 집들, 가게들, 노상 장터를 지나 꽤 괜찮은 집 앞에 도착했다 내려서 그 집 옆으로 난 골목으로 가다 보니 약간 허름한 집이 보였다. 이 정도면…했는데 또 집 옆으로 난, 한사람 들어가기 족한 길로 들어가니 창고 같은 3평 남짓 공간이 보였다. 한마디로 허름하기 짝이 없는 방이었다. 이런 곳에서 사셨다니… 생각이 들었지만 문득 내 학창시절의 초라한 친구 자취 집이 생각났다.
그러나 할머니에게 이곳은 잠시라도 빨리 벗어나야 할 공간이었다. 주인 아주머니도 마을 사람도 할머니가 어디로 이사가는지를 모르고 있었고 누구하나 이삿짐을 챙기거나 나르는데 도와주는 사람이 없었다. 아마 할머니가 말씀하셨는지, 하릴없는 동네 아주머니와 할머니들은 할머니가 가까운 어느 절로 이사하는 줄로만 알고 있었다. 떠나는 마지막 순간까지 할머니는 자신의 가는 곳이 혹 알려질까 쉬쉬하고 있었다. 그래서 나에게는 바깥에 내놓은 짐을 지키는 일이 떨어졌다.
미처 정리하지 못해 꺼내놓은 옷가지와 살림의 더욱 할 일을 많게 만들어 놓았다. 하루종일 정리해도 끝나지 않을 것 같아 인부 두 사람을 불렀다. 정리를 하자니 시간이 너무 걸리고 해서 우선 일단 가져가야 할 것, 안 가져가야 할 것, 그리고 쓰레기까지 몽땅 싸서 박스에 담았다. 헌 냉장고를 버리자니 쓰레기 값 줘야 한다고 싣고 왔을 정도니 할 말을 다 했다.
나머지 쓰레기 값 처분하는데 5천원 줬다고 헤어지는 순간까지 주인 아주머니와 좋은 얼굴은 아니었다.
다시 4시간을 달려 나눔의 집에 도착하니 짐은 부려진 상태지만 내려진 이삿짐을 사이에 두고 모두가 황당한 표정이었다.
입주 약속한 지가 한 달이 넘었는데도 짐을 싸지 않았으니 다시 짐 정리하는데 며칠 걸릴지 두고 볼 일이다.
그 뒤 할머니가 짐을 정리하는데 꼬박 한 달이나 걸렸다.
지금 이렇듯 나눔의 집에는 사연과 아픈 기억을 안고 세상사를 헤쳐오신 정신대 할머니들이 모여 살고 계신다. 할머니들의 피맺힌 상처가 50여 년의 세월이 흐른 지난 90년 무렵에야 비로소 세간의 관심을 끌게 된 것은 그나마 다행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하지만 그 오랜 세월 그분들의 고통을 외면해 온 우리는 앞으로 비명에 사라져간 십만에 이르는 정신대 영혼들과 앞으로 얼마 남지 않은 여생을 보내고 계시는 생존 정신대 할머니들에게 진 빚을 갚아야 할 책임이 남아 있다.
얼마 전 몇 분의 정신대 할머니들이 일본의 국민기금을 받았다는 소식에 한편 그분들이 원망스럽기도 하였지만 사전에 미리 대책을 상구하지 못한 우리의 잘못이 더욱 큰 것이 아닌가 생각해본다. 다시 생각해 볼일이지만 50여 년이 흐른 지금까지도 태평양전쟁 당시 일본 국가차원의 조직적이고 비인간적인 성범죄에 대한 진상규명은 물론 책임자 처벌, 그에 따른 배상문제 등 어느 것 하나도 해결될 것이 없다.
얼마 전부터 일본은 가까스로 위안부에 대한 사실 자체를 인정하였다. 그것도 그들 스스로 인정한 것이 아니라 지난 90년 말 김학순 할머니를 시작으로 생존 정신대 할머니들이 피맺힌 증언을 토해내기 시작하면서부터이다. 다시 말하면 할머니들 자신의 투쟁의 성과물인 것이다. 할머니들이 매주 수요일이면 일본대사관 앞에서 시위를 하고 계신다. 비가 오나 눈이 오나 한 번도 거르지 않고 당신의 지친 몸을 이끌고 나와 일본의 사죄와 진상규명, 책임자 처벌, 국제법에 따른 배상과 책임자 처벌을 요구하고 있지만 일본은 끝끝내 국가적인 책임을 회피하고 아시아평화우호기금이라는 허울좋은 민간기금으로 문제를 무마하려고 하고 있다. 민간기금이란 단지 불쌍한 아시아 여성에게 지급되는 구호금일 뿐이다. 지금도 일본의 망언이 끊이지 않는다는 것을 우리 모두는 알고 있다. '종군 위안부는 조선여성들이 돈을 벌기 위한 방편이다.'라는 말을 서슴없이 뱉아내며 할머니들을 또 다시 유린하고 있다.
국제법에 따르면 전쟁에 대한 책임과 그에 따른 배상과 처벌은 시효가 없이 영원히 지속된다고 한다. 일본은 65년 한일 협정에 의거하여 더 이상의 국가적인 배상은 있을 수 없다고 주장하지만 위안부 문제는 당시에도 언급된 바 없거니와 중대한 전쟁범죄의 경우에 해당하는 죄는 시효가 적용되지 않는다는 것은 국제법상 명백히 적용되고 있다. 똑같이 전쟁을 일으킨 나찌정부가 당사자국인 독일 등 전세계에서 아직도 처벌되고 있다는 것과 같이…
그러나 애석하게도 이렇듯 끊임없이 싸워 나가야 할 정신대 할머니들이 한 분 두 분 사라지고 계신다. 한 많은 세월을 살아오신 정신대 할머니들이 하나 둘 사라지고 나면 정신대 또한 역사의 저편에 파묻혀 버리고 말지도 모른다.
얼마 전, 나눔의 집에서 사시다가 돌아가신 강덕경 할머니는 폐암 말기의 고통과 상폐색 그에 따른 합병증으로 오랜 시간을 병상에서 보내며 투병하시면서도 일본에 대한 사죄와 책임자 처벌을 원하셨다. 또한 나눔의 집에서 생활하시면서 시작된 그림 수업을 통해 많은 그림을 남기셨는데 그 그림 하나 하나에 할머니의 피맺힌 한과 절규가 그려져 있다. 사죄와 배상이 이루어지기 전에는 절대로 일본을 용서할 수 없다는 굳은 의지가 담겨져 있다. 그것은 바로 우리 후손들에게 남기신 할머니의 유언이라 할 수 있다.
우리는 할머니들의 한을 풀어주어야 할 책임이 있으며 또한 이제 얼마 남지 않은 여생을 살고 계시는 생존 정신대 할머니들을 지켜야 할 것이다.
일본의 사죄와 배상은 쉽게 이루어지지 않을지도 모른다. 그러기 때문에 할머니들의 생존해 계시는 동안 우리는 모든 자료와 증언 그에 따른 기록 할머니들의 자취나 그들의 유품을 정리하고 보존하는 작업이 시급하다. 역사상 유례를 찾아보기 힘든 일본의 범죄행각에 대한 처벌이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우리 모두가 자각하고 한마음이 되어야 할 일이다.
혜진(慧眞) / 성균관대학교 전자공학과 졸업. 89년 지원스님을 은사로 수계(송광사), 91년 불교 인권위원회 총무를 지냈으며 지금은 경기도 '나눔의 집'에서 정신대 할머니들을 돌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