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의 축' 발언 이후 세계가 숨막히는 하루 하루를 보내고 있는 상황에서 미국 부시 대통령이 한국방문을 마치고 돌아갔다. 전국의 시민, 사회, 종교단체들은 각각의 요구를 내걸고 부시방한을 규탄하고 또 규탄하였다. 부시가 방한한 2박 3일 동안 한반도는 유례 없는 반미 반전 분위기로 가득 찼다. 수많은 성조기가 불에 그을리고 부시의 얼굴은 찢겨져 적어도 2박3일 동안 미국은 아주 만만한 상대였다. 방한 마지막날인 21일은 소위 '빙판 테러'라고 불리는 쇼트트랙 사건이 불거지면서 주체할 수 없는 반미 분위기가 형성되었다. 고령의 신부는 과거 닉슨 대통령이 한국을 방문할 당시 서울 시청 앞을 가득 메운 환영인파와 대조적인 작금의 상황을 주목하면서 많은 회한을 더듬기도 하였다.
우리 국민은 '전쟁'과 '평화'는 반대말이라는 사실을 분명히 알고 있었다. 이것은 종교적 심성의 문제도 아니고 오로지 한국전쟁이라는 고통의 역사에 대한 반성과 평가에 기인한 것이었다. 그래서인지 우리 국민들은 미국이 뒤늦게라도 우리 국민들의 이러한 분노를 올바로 이해할 수 있기를 희망하였다. 평화를 위해 전쟁을 감행한다는 비상식이 사라지기를 희망하였다. 전쟁을 축구 게임정도로 인식하는 일방적인 미국중심의 패권주의가 미국에게도 결코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올바로 간파하여 미국의 한반도 정책의 근본적인 변화를 기대하기도 하였다.
그렇다면 '뜨거운 감자'로 기록될 부시방한의 결과는 무엇일까? 과연 우리 국민의 상식의 발로가 충족된 것일까?
미 부시대통령과 김대중 대통령은 도라산역 방문, 장시간 회담을 통해 '한미 동맹관계 확대강화' '대 테러전쟁 긴밀 공조' '북한 대량살상무기(WMD) 및 재래식 무기 대화를 통한 조속 해결'이라는 합의를 보았다. 각 언론들이 다소 차이가 있지만 부시대통령이 북을 상대로 전쟁을 하지 않겠다는 말이 마치 평화 메세지인양 대서특필하며 이제 한숨 돌리기나 한 듯한 태도를 취하고 있다. 그러나 이것은 한미정상회담 합의가 지닌 문제의 심각성에 대한 완전한 왜곡이다.
하나하나 따져보자
첫째, 한미동맹관계가 정상적으로 발전되기 위해서는 미국이 더 이상 미국중심의 일방적 패권주의를 우리 정부에 강요하여서는 안될 것이다. 미국은 당연히 평화를 위한 국제적 노력에 부응해야 할 것이다.
미국은 자신의 공격적인 핵무기 정책을 보완할 MD(미사일방어망) 구축을 위해, 2001년 12월 지난 1972년 소련과 체결한 'ABM조약'(방공망제한협정)을 탈퇴했다. 그리고 핵무기 성능의 지속적인 개량을 위해, 이미 164개국이 서명했고 89개국에서 비준한 '포괄적 핵실험금지조약'(CTBT)의 의회 비준을 거부한 바 있다(1999년). 또한 2001년 7월 생화학무기 조약의 강화를 위한 런던회의에서 중도에서 거부했다. 미국은 2001년 7월 불법소형무기의 국제 거래를 규제하려는 UN합의를 거부한 유일한 국가이며, 1997년 12월 오타와 에서 122개국이 서명한 지뢰조약(Land Mine Treaty)도 거부한 바 있다. 비난받아 마땅한 이러한 행동들이 철회되지 않는 상태에서 유독 한국에게만 과거의 신의만을 내세워 동맹관계를 요구한다면 우리에게 '평화'를 저버리라고 말하는 것과 같다.
두 번째 대 테러전쟁 긴밀 공조는 미국의 전쟁에 무조건 지지하겠다는 것이다. 전쟁은 복잡다다한 배경과 목적을 가지고 있다. 대테러전쟁이 이라크로 확대되는 것에 서유럽을 중심으로 비난이 높아지자 단독으로라도 전쟁을 하겠다고 호언하고 있는 상황에서 미국 일본 한국이 국제적으로 어떠한 축이 될 것이지 분명한데도 국제상식에도 어긋난 전쟁에 긴밀히 공조하겠다고 다짐하는 것이 정상적인 일은 아닐 것이다.
세 번째, 북한의 대량살상무기 및 재래식 무기감축을 전제로 북과 대화를 하겠다고 밝혔다. 이것이 부시방한의 최대 하이라이트이다. 미국은 세계 최대의 대량 살상무기개발국, 세계 최대 군수물자 수출국이라는 오명은 한마디 언급도 없이 미국제 미사일은 선, 북한제 미사일은 악이라는 논리적 박약을 드러냈다고 볼 수 있다. 이른바 대량살상무기 문제를 대화로 해결하자고 하면서 94년 제네바 협약과 2000년 공동성명 이행에 대해서 전혀 언급이 없었던 것은 미국의 대화의사가 전무하다는 의미로 보여진다. 북한은 1994년 미국과의 제네바 기본합의를 통해 미국과의 전면적인 관계 개선을 전제로 핵무기 개발 중단을 실제로 수용했다. 북한은 제네바합의를 성실히 이행해온 반면, 실제 제네바합의를 고의적으로 방기하고 있는 쪽은 미국이다. 또한 북한은 미사일 문제에 관해서는 1999년 중국 및 러시아와의 협의를 거쳐, 미국이 양국간의 상호관심사에 대한 협상을 지속한다는 전제 하에서 2003년까지 미사일 시험발사를 유예한다는 중대 결정을 발표한 바 있다. (역시 북한이 미사일 또는 인공위성 시험발사를 해서는 안 된다는 국제적 규정은 존재하지 않는다) 북한은 부시정부가 들어선 이후에도 이 약속을 지키고 있으나, 부시정부는 북한과의 미사일 협상을 거부하고 있다. 이미 전제된 요소에 대한 부정은 미국내의 문제를 북한에 떠넘기는 이중적인 태도이다. 또한 남쪽 정부에게는 가공할 대량살상무기 수입을 강요하는 것이 대화를 하자는 자들의 자세는 아니다.
우리의 정부의 '자주성'의 문제도 다시 한번 드러났다. 방한 직전 용산미군기지 내 아파트 신축을 정부차원에서 허락한 사실은 김대중 정부가 이번 한·미 정상회담에서 처음부터 끝까지 미국의 비위맞추기로 일관하겠다는 의사를 드러낸 것이나 다름없다. "전쟁을 할 의사가 없다" "햇볕정책을 지지한다"는 '립 서비스`를 받아내는데 급급하여 부시의 부당한 요구를 수용하기에 바빴다. 발표는 되지 않았지만 F15-K전투기 구입 강요나 한미투자협정 강요에도 굴복했을 것이라는 세간의 분석도 결코 틀리지 않을 것이다. 미국 파월 장관의 뒷수습이 주목되는 대목이다. 노근리 등 양민학살 진상규명문제나 용산미군기지 반환, 매향리 폭격장 폐쇄, 불평등한 소파협정 개정 등 현존하는 문제에 대해서는 일체 언급을 하지 않았다.
결국 이번 방한은 마냥 그랬던 것처럼 오만한 제국주의적 요소와 전전긍긍하는 정부가 만들어놓은 합작품이다. 평화를 위한 정치적 전쟁이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선동되고 합의되고 있는 '가치의 전복'과 지난 시간의 과정을 무시하고 제국주의 입맛대로 바뀌는 '논리의 박약'이 그 어느 때보다 구체적으로 드러났다.
부시방한이 끝난 뒤 이라크 공격이 임박했다는 소식이 전해오고 있다. 또다시 CNN생중계를 통해 전쟁을 즐기는 국민이 되어야 할 판이라고 생각하면 몸서리쳐진다. 이런 반미분위기를 교단에서 어떻게 설명해야 하는지 전전긍긍하는 선생님과 아직도 미국에 대한 부정적 언어를 사용하면 북한 빨갱이로 매도되는 현실이 우리 상황이다. 이번 방한을 계기로 우리사회의 이념적 갈등의 원천을 파악하고 진보된 사회적 합의를 만들어 나가는 것도 중요한 문제이다.
한반도의 평화구축은 국제적 평화구축과정과 함께 해야 한다. 미국에 의한 전쟁은 언제든 성토되어져야한다. 우리가 참여하지 않도록 촉구해야 한다. 전쟁 없는 평화를 원한다면 우리스스로 평화를 준비해야 한다. sharpjs@hanmail.net
김종섭/ '군산미군기지 우리땅찾기 시민모임' 사무국장과 '불평등한 SOFA개정 국민행동' 사무국장을 지냈다. 지금은 '노동의 미래를 여는 현장연대' 대표와 전북민중연대회의 집행위원장으로 활동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