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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7.3 | [매체엿보기]
음반감상 / 「라흐마니누프 피아노협주곡 2번」 애잔하게, 격정적으로 울려 퍼지는 선율
글·송준호 우석대교수·국문학과 (2004-02-12 14:59:42)
내 연구실 책장 한켠에는 LP음반이 가지런히 꽂혀 이다. “교수님도 젊은 시절에 참 외로우셨던가 봐요.” 언젠가 그걸 보고 한 학생이 그렇게 말했었다. 지금도 젊다고 대답하면서 빙긋 웃어넘겼지만, 그 순간 그 학생의 눈빛은 참 따뜻해 보였다. 그랬다. 대학원 시절, 나는 울고 싶도록 외로웠다. 확신할 수 없는 미래가 나를 그렇게 만들었을 것이다. 한 여자를 떠나보낸 것도 그 무렵의 언저리였다. 12월이 시작되던 그 날, 그녀와 헤어진 뒤 밤늦은 시각에 시내버스 정류장에서 시큰거리는 눈을 들어 밤하늘을 올려다 보고 서있던 나는 근처의 레코드점에서 울려나오는 음악소리를 듣고 그 곳으로 달려갔다. 공교롭게도 그건 그녀가 매우 좋아하던 곡이었고, 그래서 함께 자주 신청해서 듣곤 했던 곡이기도 했다. 세상에 태어나서 처음으로 구입해 보는 음반이었다. 그럴 만한 것이 그 때까지 내게는 오디오가 없었던 것이다. 집에 들어온 나는 음반 한 모서리에 ‘12월 1일, 오늘밤에는 눈이 내리지 말아야 한다.’라고 쓰고 그 위에 투명 테이프를 붙였다. 그걸 내 책상머리에 세워놓고 귀를 기울였다. 바로 ‘라흐마니노프 피아노 협주곡 2번’이었다. 그 뒤 나는 학교에서 돌아오는 길에 이따금씩 음반을 한 장씩 사들고 오기 시작했다. 그 때마다 자켓 구석에 메모하는 걸 잊지 않았다. ‘12월 8일 첫 눈’, 혹은 ‘봄이 오는 소리’와 같은 것들이었다. 그리고 그걸 책상 앞에 세워두면 자켓 표면에서 음악이 배어 나오는 듯했다. 학원강사로 아르바이트를 해서 모은 돈으로 3개월 뒤 내 소유의 오디오를 구입했을 때 나는 이미 스무 장도 넘는 음반을 갖고 있었다. 나는 당연히 라흐마니노프를 맨 먼저 턴테이블에 얹었다. 바늘을 처음 울리던 그 순간의 떨림을, 그리고 그윽한 저음으로 울려나오던 건반 소리를 나는 두고두고 잊지 못할 것이다. 그 음반에서 애잔하게 때로는 격정적으로 울려 퍼지는 피아노 선율에 가슴이 흥건하게 젖어드는 소리를 새벽이 밝아오도록 듣고 또 듣고를 반복했다. 떠나 보낸 그녀를 생각하면서. 그 음반은 이제 자켓도 너덜거리고, 잡음도 많이 섞여 나온다. 하지만 나는 라흐마니노프만은 새 걸로 바꾸고 싶지 않다. 바늘에 무수히 긁혀서 소리가 더 이상 울려나오지 않게 될 때까지 아껴가면서 두고두고 들을 생각이다. 저 안에는 내 젊은 날의 그 터널처럼 깊고 암울했던 기억과, 섬세하게 물결치던 느낌이 고스란히 살아 숨쉬고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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