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7.3 | [문화저널]
이 사람의 세상살이 / 윤도장 기능보유자 김종대씨
어디 이게 돈 벌자고 허는 일이 것소
글·김경모 전북일보 기자
(2004-02-12 15:00:23)
1960년경부터 백부로부터 전수를 받게 되었는데 혼자 작품을 완성하는 일을
시키지 않았던 탓에 각고의 노력 끝에 45세가 되어서야
비로소 재료준비에서부터 완성하기까지의 본격적인 작업을 할 수 있었다.
형형한 눈빛.
아직도 청년 같은 풋풋함이 있어 보이는 김종대 씨(金種岱, 63세)를 만난 것은 배추밭에 잔설이 여기저기 남아있는 2월의 끝에서였다.
고창에서 708번 국도를 따라 10여 분을 달리다 성내면 신림리에서 왼쪽으로 꺾어들면 남도의 나긋나긋한 소리가락처럼 굽이굽이 이어지는 황토밭길, 부드러운 능선 밑에 낙산마을이 실낱같은 저녁햇살을 받으며 엎드려 있다. 한 쪽 대문도 달아난 집에 성큼 들어서자 솜털에 싸인 꽃봉오리 몇 개를 매달고 있는 목련나무 밑으로 누렁이 한 마리가 어슬렁거리고, ‘인간문화재’가 되었다고 그 날도 가까운 소도시(정읍)에 가서 계군들한테 한 턱을 내고 왔노라고 자랑삼는 그의 아낙이 소박한 얼굴에 함박웃음을 지으며 반긴다.
그는 지난 해 12월 31일 중요무형문화재 제 110호로 윤도장(輪圖匠)의 기능 보유자가 되었다. 몸에 차고 다닌다고 해서 패철(佩鐵)이라고도 하고, 지남철, 지남반, 지남침 등 다양하게 쓰이는 이 용어는 ‘조선왕조실록’에 근거하여 문화재위원회의 심의과정에서 ‘윤도장’이라는 이름으로 종목지정을 하였다 한다. 윤도(輪圖)는 일정한 방향을 가리키는 지남성(指南性)이 있는 바늘자침(?針)을 활용하여 지관들이 풍수를 알아보거나 여행자들에게 길을 인도하기 위하여 사용되는 풍수지남반(風水指南盤)이다. 이것은 향해자의 뱃길을 유도하고 천문학자들의 휴대용 해시계에서 정확한 남북(南北)을 지침하는 중요한 도구로도 쓰였다. 과학기재가 발달한 현대에도 명맥을 끊이지 않고 유지하고 있음은 천만다행이라고 생각할 일이다. 우리 나라에서는 신라말부터 윤도라는 풍수나침반이 발달하였고 고려초에도 지상(地相)을 보는 풍수가나 자관들에게 중요한 기구로 쓰이면서 서운관(書雲觀)에서 제작되었다. 조선시대인 15세기경부터는 풍수가의 전용물에서 벗어나 항해자나 여행자들에게 실용적인 목적으로 사용되었다.
기능보유자 김종대 씨는 4살때부터 조부 김권삼(金權三)씨의 지남철 제작과정에 상당한 흥미를 가졌다한다. 백부 김정의(金正義)씨는 20세에 조부 김권삼 씨의 대를 이어 1971년 66세의 나이로 작고할 때까지 많은 양의 윤도 및 선추(扇錘), 면경대(面鏡臺)를 제작하였는데 손재주가 좋아 중부 이남은 물론(남북으로 갈리기 전) 멀리 평안, 함경에서까지 주문이 많았다고 한다. 그는 친자에게 기술을 물려주고 싶었으나 패철에 대한 관심과 소질이 없어 조카 김종대씨에게 전수한 것을 매우 서운하게 생각했다고 한다. 백부가 돌아가시면서 “우리집 가업이니 어떠한 일이 있어도 이어야 되지 않겠느냐” 하였다. 김종대 씨는 1960년경부터 백부로부터 전수를 받게 되었는데 혼자 작품을 완성하는 일을 시키지 않았던 탓에 각고의 노력 끝에 45세가 되어서야 비로소 재료준비에서부터 완성하기까지의 본격적인 작업을 할 수 있었다. 과거와 달리 요즈음은 선추(扇錘:조선시대 선비들이 부채에 매달아 달고 다니던 일종의 휴대용 나침반), 면경대(面鏡臺:작은 거울과 나침반이 결합된 것)에 대한 수요가 없어 패철(佩鐵)만을 제작한다고 한다.
패철은 주로 대추나무를 사용한다. 물론 오래될수록 좋다. 이는 눈매가 곱고 단단하여 정교한 조각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거기에 오랜 대추나무는 빛깔이 비단쪽같이 윤이 나며 터짐이 없어 작품으로는 그만이다. 옛날에는 충청도 보은에서 구해서 썼으나 현재는 경기도 화성군에서 200년 가량된 대추나무를 구입해 온다. 그러나 그것도 여간 어렵지 않다고 한다. 패철(佩鐵)의 제작은 먼저 대추나무를 둥글게 잘라 쪄서 그늘에 자연건조 시킨다. 상부 덮개의 속을 끌로 파내고 칼로 문댄 다음 밑 부분을 잘라내어 윤도의 본체를 만들고 방향이 표시되는 면을 평면 또는 약간 둥글게 배가 나오도록 다듬는다. 그런 다음 24방을 잡는데 6칸, 12칸, 24칸의 순으로 분할한 후 콤파스로 원을 그어 각 부위마다 내용(팔괘, 오행…등)을 깊게 음각한다. 먹과 옥돌분을 바른 뒤 지침(지남침)을 올려놓고 유리를 끼우면 패철이 완성된다. 지침이 독자적인 자력을 갖게 하려면 자연자석(천연수중자석)에 30여분 간 붙여 놓으면 된다. 이 원석은 약 280년전부터 계속 사용되어 내려오는 것으로 이 집안의 가보이다. 윤도는 24방위로 나타낸 동심원의 숫자에 따라 1층부터 24층까지 다양한 종류가 있다. 지관들은, 7~8층을 많이 찾으며 재료의 넓이가 마땅치 않아 24층은 제작을 못하고 있다 한다. 김종대 씨가 농사짓는 틈틈히 일년에 만드는 패철은 30~40개란다. 물론 주문생산이다. 얼마나 값을 받느냐는 질문에 “3층은 70만원, 5층은 80만원으로 개중에는 100만원을 훨씬 호가하는 것”도 있단다. 그의 아낙이 말을 받아 “좀 더 받을 수 있는디도 이 양반은 만든 기간에 대한 일당만 쳐서 받는 당게요?”하며 곱게 눈을 흘기자 그는 눈을 부라리며 “어디 이게 돈 벌자고 하는 일이간디?” 한다. 따져보면 그의 지남철 제작수입으로는 식솔들을 제대로 건사하기에는 애초에 틀린 일이다. 다행이 선조로부터 50~60마지기의 물려받은 전답이 있어 4남 1녀 대학공부 시키는데 어려움이 없었다 한다. 이런 연유 탓에 “함부로 기술을 배우겠다고 나서 지도 못하고 전수를 받겠다는 이도 없다.”고 걱정을 얹어 말한다. 그러나 다행히도 그의 걱정을 덜어준 것은 큰아들 희수씨다. 5년간이나 작업을 같이 해온 희수씨는 어려서부터 아버지 김종대 씨의 패철제작에 대한 깊은 관심을 부였다 한다. 희수씨는 현재 대학을 졸업하고 서울에서 건설회사를 다닌다. 언젠가는 낙향하여 가업을 이어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다.
대추차가 식는 줄도 모르고 편안한 목소리에 실려오는 그의 얘기를 오랜 전설처럼 듣다보니 한 줌 남아있던 겨울 햇살이 자취를 감추고 말았다. 슬그머니 돌아서서 나오는 발길이 ‘낙산마을(落山마을)’이라고 새겨진 돌팻말이 다시 눈길을 잡는다. 옛날 홍덕읍에 속하던 때는 흥철(興鐵)로, 고창으로 편입된 지금에는 ‘고창지남철방(高愴指南鐵房)’으로 유명한 낙산마을.
“산에 거북모양의 바위가 있는데 머리가 정북(正北)을 했었다. 이는 하도낙서(河圖洛書: 고대 중국에서 예언이나 수리의 기본이 된 책)에 나오는 낙구와 같이 선천십이지(先天十二支)를 상징하는 것으로 ‘거북바위’라 일러온다. 무슨 천리(天理)인지는 모르나 지남철(指南鐵)을 거북바위 아랫마을인 낙산리에서 만들어야지만 지오(指午:정남향을 가리키는 것)를 하지 다른 인근 마을에선 만들래야 만들 수 없을뿐더러 지오도 하지 않는다.”라는 상징적인 전설이 전해 내려온다. 이런 전설 탓일까. 이곳은 처음에는 전씨(田氏), 정씨(鄭氏), 서씨(徐氏), 한씨(韓氏)로 전해오다 이후 5대(약 150여년)전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김종대씨 집에서 지남철을 제작해 오고 있으니 말이다. 일찍이 문화재 위원 예용해(汭庸海)씨는 1962년 백부 김정의(金正義)씨의 글에서 “우리나라에서 오직 한 곳인 이 지남 철방은 전국 각지에 흩어진 풀수(지사:地師)에게는 메카와도 같다”고 평가한 바 있다. 모든 가치가 해체되고 자기 자신은 물론 ‘배우자’를 선택하고 때론 부모를 대하는 것마저도 ‘상품’이라는 교환가치로 여겨지는 팽배한 물신주의 세태 속에서 돈벌이도 안되는 윤도제작을, 오직 가업을 잇겠다는 신념 하나로 살아가는 그의 모습은 다시 한 번 우리를 돌아보게 한다.
김경모 / 1960년 부안 출생. 1988년 전북일보사에 입사해 편집부를 거쳐 현재 고창주재기자로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