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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7.3 | [세대횡단 문화읽기]
호남좌도 정월대보름굿을 보고 이 땅에 영원히 그 소리를 울려라
글·김용택 시인·운암 마음분교교사 (2004-02-12 15:06:32)
굿판이 최고 절정에 다다르면 사람들은 숨을 죽이다가 상쇠잽이가 스스로 굿판을 끝내며 숨을 몰아 쉬면 구경 군들도 후유 숨들을 토해낸다. 상쇠가 체를 내리고 땀을 닦으면 구경 군들은 상쇠를 향해 잘했다가 아니라 수교했다는 말을 하여 상쇠에 대한 최고의 예의를, 마음속에서 우러난 진정한 찬사를 보내 준다. 그리고 굿을 서서히 끝내간다. 풍물굿은 일과 놀이의 절정이며 꽃이다. 따라서 정월대보름 굿은 풍물굿의 종합적인 대동놀이의 완성이요, 새로운 시작의 장이기도 하다. 정월대보름굿은 대대적인 마을의 공식적인 예술공연장이며 새로운 굿 형식 창출 마당이기도 하다. 동시에 개인의 기량을 마음껏 펼칠 수 있는 공식적이고도 공개적인 시연장이기도 하다. 이러한 대보름 풍물굿은 또 농민들에게 각별한 의미를 가진다. 설과 대보름이 겹쳐 배불리 먹고 맘껏 놀 수 있기도 하거니와 코앞에 닥친 일철을 앞두고 마을 사람들간에 얽히고 설킨 그 동안의 묵은 감정들을 풀어내는 화해와 대화합의 마당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그 동안 농사지으며 쌓인 좋지 않은 감정들을 묵혀 둔 채 새로운 농사를 짓는다는 것은 같이 일을 해야 하는 마을에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정월대보름 굿은 농촌 농민들에게는 풍물 이상의 굿이었던 것이다. 한 마을에 태어나 죽을 때까지 함께 살아야 하는 공동체적인 삶의 형식과 내용이 아니고서는 나타나기 힘든 이러한 풍물굿이 하마터면 이 땅에서 사라질 위기에 처해 있을 때, 꺼져가는 풍물굿을 다시 살려낼 수 있었으니 임실군 강진면 필봉리 필봉풍물굿이 호남좌도 풍물굿의 그 원형이다. 우리 민족의 영원한 예술형식과 내용의 최고봉인 판소리와 쌍벽을 이루는 체계적이고도 종합적인 굿판인 호남좌도 풍물굿이 우리 곁에서 아직도 살아 숨쉬고 있다는 것은 우리 민족에게 행운이며, 민족 예술의 끈질긴 생명력을 다시금 우리들 가슴에 새겨야함을 서늘하게 일깨우고 있는 것이다. 오늘날 우리들에게 공연되어지는 온갖 풍물굿 형식을 갖춘 풍물은 그 형식이 너무 굳어있다. 사람들이 너무나 의도적으로 관련하여 화석화 되어버렸다. 땅과 자연과 인간들의 일에서 우러나온 것이 아니라 단지 보여주기 위해 눈요기 감으로 조작해낸 것들이 태반이다. 거기엔 뛰어난 기교가 있고 눈부신 율동이 있고 뛰어난 가락이 재창조되었지만 땅과 인간이 함께 어울어져 들어 설 자리가 없어 보인다. 거긴 인간과 자연, 인간가 인간들에게 헝크러지고 어지러워진 갈등을 화해해 낼 만한 힘이 없다. 오직 진땀나는 헛 신명만이, 소리는 나올망정, 이미 거기엔 나의 춤과 나의 소리와 나의 혼은 없다. 우리들에게 가장 아쉽고도 서러운 것은 농촌이 황폐화 되어감에 따라 일 속에서 건강하고 활달하게 분출되던 이러한 놀이들이 사라져 가버렸다는 현실이다. 풍물굿은 누구에 의해 공식적으로 그 기능이 전수되지 않았다. 그것은 마치 농사를 배우는 일과 같아서 자연스러웠다. 같이 농사일을 시작해도 어떤 사람은 쟁기질을 잘하고, 어떤 사람은 나무를 잘하는 것과 같아서 다 타고난 제복대로 풍물굿판에서 꽹과리도 치고, 장고도 치고, 징도 치고, 소고도 쳤다. 이도 저도 아무 기능도 없는 사람들도 풍물판이 벌여지면 다 자기 나름대로 자기 몫을 해냈다. 우리 동네 어떤 이는 모든 놀이하고는 담을 쌓고 살며 어디에서 노래 한 곡하는 것을 보지 못했지만 동네 풍물굿판이 벌어지면 어디에서 그런 차림을 하고 나오는지 배와 등에 바가지를 엎어 넣어 가지고 곱추춤을 그렇게나 잘도 추는 것을 나는 보았다. 모두 그런 식이어서 굿판에서는 모두 나름데로 다 자기 몫을 했던 것이다. 정말 아무것도 할 줄 모르는 사람은 굿판에 모닥불이라도 꺼지지 않게 살려냈던 것이다. 동네마다 섣달 그믐이 가까워지면 서서히 사랑방에 먼지를 쓰고 걸려있는 풍물도구들을 점검하기 시작했다. 장구통과 꽹과리 징은 사왔지만 장구의 열채와 궁굴채의 가죽은 손수 만들었다. 열채쪽 가죽은 개가죽을 벗겨 오랫동안 사랑방 오줌통에 담가두었다가 기름끼와 털을 뺀 뒤에 짱짱하게 버팅김해서 말려 만들었고, 궁굴통쪽 가죽은 노루 가죽을, 소고는 토끼가죽 만들었던 것이다. 소고도, 고깔도, 굿띠도 그렇게 만들었다. 그렇게 섣달 그믐까지 모든 풍물도구가 다 만들어지면 섣달 그믐달 당산제를 지냈던 것이다. 그리고 설을 지내고 대보름이 오면 대보름풍물굿판을 밤새워 벌였던 것이다. 우리 동네는 동네가 작아서 상쇠잡이가 없었다. 동네 큰 굿판을 벌일려면 다른 동네에서 상쇠잡이를 사와야했다. 상쇠를 사와 어느 집 마당에서 판굿이 벌어지면 나는 그때마다 무동이었다. 나는 우리 동네 판굿의 무동을 하며 풍물굿의 분위기를 내몸에 익혔다. 그 때를 생각하면 지금도 내 마음 어딘가에서는 굿소리와 모닥불과 굿판의 그 신나는 몸짓들이 몰려오곤 한다. 그 설레임으로 나는 남원시 주생면 도산 마을에서 판을 벌린 호남 좌도 정월대보름굿을 판을 갔다. 호남좌도굿은 박합삼, 김문숙, 송주호, 양순용으로 이어져 지금에 이르렀다. 양순용 선생은 임실 필봉에서 사그러질뻔한 좌도 풍물굿을 지킨 이 땅의 마지막 상쇠였다. 양순용선생은 1995년에 돌아가셨다. 이제 다시는 이 땅에서 저절로 살아나는 상쇠를 우리는 볼 수 없게 되었다. 올 대보름굿은 전국적인 관심 속에 양순용 씨의 맏아들인 양진성이 상쇠로 굿판을 이끌었다. 내가 주생면 도산마을에 들어섰을 때는 풍물굿패는 굿패를 따르는 600여명의 관중(?)들과 함께 길굿을 치며 뒷당산을 향하고 있었고 마을앞에 만들어진 달집을 중심으로 온갖 깃대가 매운 바람에 나부끼고 있었다. 뒷동산 당신 나무는 죽어 그 흔적만 남아 있었고 대신 위엄을 자랑하는 노송이 두 그루 서있었다. 대단한 소나무였다. 내 옆에서 굿을 보고 있던 유 아무개라는 화가는 소나무를 보러 다시 온다고 했다. 그 화가가 아니더라도 소나무를 보고 그 소나무의 알 수 없는 위엄에 기가 눌리지 않은 사람은 아마 없을 것이다. 당산제가 끝나고 다시 내려와 마을에 있는 공동 우물에 가서 샘굿을 쳤다. 매운 바람이 살을 파고들어 새파랗게 떨면서도 굿을 보는 사람들은 계속 우줄거리며 굿쟁이들과 함께 신명을 냈다. 샘굿의 끝나고 다시 굿패는 어느 농가 마당으로 들어갔다. 그집 대주인 주인은 쌀을 상에 차려놓고 쌀 위에 불을 켜놓고 굿패를 정중하게 맞이했다. 여기에서 마당밟기 굿의 순서를 말해보면 다음과 같다. 마당에 들어가 처음 문굿을 친다. 그 다음 마당굿, 부엌에 가서 치는 조왕굿, 장독대에 가서 치는 철륭굿, 그 집 샘에 가서 치는 샘굿, 나락 뒤주에 가서 치는 노적굿, 마지막으로 큰방을 향해 치는 성주굿이다. 마당밟기가 끝나면 이제 마당에 불을 피워놓고 판굿을 친다. 판굿이야말로 풍물굿 중의 굿이다. 말 그대로 판이 벌어지게 되는데 이 판굿에서 다양한 진풀이, 그리고 구성진 잡색놀이, 굿패들의 묘기가 백출하고, 구경꾼과 굿패들이 함께 어울어지는 대동판굿이 벌어진다. 판굿에서의 절정은 뭐니뭐니해도 이 굿판에 참여한 모든 굿쟁이들이 일년 동안 나름대로 갈고 닦은 자기 기량을 맘껏 자랑하는 시간일 것이다. 이 시간이 되면 상쇠는 모닥불을 중심으로 판을 둥그렇게 정리한다. 이 때 굿쟁이들은 모두 둥그렇게 원을 그리고 서서 쉬기도 하고 잠깐 담배를 태우기도 한다. 모닥불이 최고조로 흥을 돋구면 상쇠잡이는 제일 먼저 장고잡이를 마당 가운데로 서서히 끌어낸다. 마당 복판으로 나온 장구잽이는 있는 기량 없는 기량을 다 해 자기를 과시한다. 그 다음 징잽이, 그 다음 소고쟁이 이런 순으로 마당에 있는 모든 굿쟁이 들을 다 놀리고 나면 마지막으로 이제 굿판의 어른인 상쇠잽이의 놀이가 이어진다. 이때 굿판에 있는 모든 사람들은 예의를 갖추어 상쇠놀음을 기다린다. 상쇠잽이가 서서히 자기의 기량을 발휘해 가면 모든 굿쟁이들은 모두 둥글게 원을 그려 자기 자리에서 서서히 굿판을 달구어 낸다. 상쇠잽이는 장구잽이를 끌어내어 짝을 이루기도 하고 소고잽이를 끌어내어 짝을 이루기도 하며 신명을 낸다 굿판을 빙글빙글 돌기도 하고 발끝과 뒷꿈치를 이용하여 벙거지 끝으로 온갖 모양을 다 만들며 굿판을 절정으로 몰아간다. 하얀 벙거지가 펑펑 퍼지기도 하고 벙거지 끝이 벙거지를 콕콕 찍기도 하고 살이살짝 벙거지가 벙거지 갓에 사려지기도 한다. 이러한 묘기가 나올 때마다 사람들은 숨을 죽이며 침을 삼키기도 하고 자기도 몰래 신음 소리를 내기도 하고 저절로 탄성이 터져나오기도 한다. 이 때 상쇠잽이의 진가가 발휘되고 그 상쇠잽이의 격이 정해지기도 한다. 이렇게 해서 굿판이 최고 절정에 다다르면 사람들은 숨을 죽이다가 상쇠잽이가 스스로 굿판을 끝내며 숨을 몰아쉬면 구경 군들도 휴우 숨들을 토해낸다. 상쇠가 체를 내리고 땀을 닦으면 구경 군들은 상쇠를 향해 잘했다가 아니라 수고했다는 말을 하여 상쇠에 대한 최고의 예의를, 마음 속에서 울어난 진정한 찬사를 보내 준다. 그리고 굿을 서서히 끝내간다. 이 판이 끝나면 대동굿을 치면서 지난해의 묵은 액운을 태워 보내고 새해를 맞이하는 정월대보름 달집을 태운다. 달집이 다 사그라질 때까지 마지막 놀이를 하면서 굿판을 정리한다. 이날의 정월대보름 굿은 다른 어느 해보다 많은 사람들이 운집했으며 많은 관심을 불러일으키기에 족할만큼 기대에 부응했다. 다른 지역의 많은 굿패들도 참여했으며 전국에서 수많은 보도진과 풍물굿에 관심이 있는 학생과 일반인들이 참여해 열기를 더 했다.이상하게도 전북 사람들보다 다른 지역의 사람들이 더 많았다. 우리 것에 대한 우리 당사자들과 관계기관의 보다 적극적인 관심과 지원이 아쉽다는 마음을 떨칠 수 없는 한 대목이기도 했다. 허기사 언제 문화에 관계 된 기관이 문화발전을 위해 진정으로 지원을 해 준 적이 있었던가. 방해나 안놓으면 다행한 일이 허다했지. 말로는 무얼 못하겠는가. 마을을 빠져나오며 나는 좌도풍물굿이 살아 있음에 안도감과 피폐해가는 오늘의 농촌현실의 아픔이 교차하는 착찹함을 숨길 수 없었으며 이 좌도 풍물굿이 임실 필봉마을에서 공연되지 못하는 현실이 안타까웠다. 나는 늘 대보름이 되어도 적막하기 만한 우리 동네와 이따금 지나는 필봉 마을이 쓸쓸함이, 그 필봉풍물굿 전주회관의 조용함이 그 순간 나를 쓸쓸하게 했기 때문이다. 모든 것, 이 세상의 모든 것은 제자리에 있을 때 더욱 빛나고 아름다웁지 않겠는가. 그러나 또 어찌하겠는가, 일과 놀이의 절정이요, 농민 문화의 꽃인 호남좌도 풍물굿이여! 이 땅에 영원히 그 소리를 울려 이 땅의 모든 잡귀 잡신을 물알로 떠내려보내고 액을 막아 우리 삶의 터를, 아! 자본에 대한 끝없는 탐욕으로 빚어지는 이 방향 없는 광폭과 광란의 시대, 참으로 참을 수 없는 이 치욕의 시대, 안전지대 없이 더럽혀지고 훼손당할대로 훼손당한 인간의 자존심을 영원한 고향인 농심으로 지켜라. 김용택 / 1948년 전북 임실에서 태어나 순창농고를 졸업했다. 1982년 ‘창비 21인 신작 시집에 「섬진강1」외 8편을 발표하면서 작품활동을 시작하였으며 1986년 제 6회 김수영 문학상을 수상했다. 시집으로 『섬진강』,『맑은 날』,『누이야 날이 저문다』,『꽃산 가는 길』, 『그리운 꽃편지』,『그대, 거침없는 사랑』,『강같은 세월』등이 있고, 산문집으로 『작은 마을』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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